제542화. 가족의 의미 (12)
손끝을 타고 흐른 공이 허공에 머무르는 짧은 시간. 그 찰나의 긴장감 속에 검은 동공이 조여들었다. 던지는 게 아니라 그곳에 놓고 오듯이. 하늘 높게 뻗은 손으로부터 만들어진 포물선이 부드러운 각도를 그린다.
들어간다.
확신한 순간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펄럭, 공이 림을 통과하며 네트가 흔들렸다. 통, 통. 공이 몇 번 튀어 오르다가 바닥을 굴러 발치에 톡 부딪혔다.
몸을 숙인 도현은 공을 품에 안았다. 적당한 무게의 공이 안정감을 선사했다. 검은 눈이 다시 잠잠해진 림을 응시한다.
역시 공놀이는 그다지 취향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주는 짧은 쾌감과 성취감은 확실히 중독적이었다. 도현은 다시금 무릎을 굽히고 자세를 잡았다.
- …그 작품?
떨떠름하던 목소리.
- 대표님이 주신 대본 중에는 마음에 드는 게 없었어? 난 윤정숙 작가님 대본이 꽤 괜찮아 보이던데. 아니면 그 재난 영화도….
이해할 수 있었다.
소속사가 그간 도현에게 작품 선정을 전적으로 맡겨온 건 도현의 장래성을 믿기 때문이었다. 일종의 투자였다.
그래서 도현이 영화가 아닌 드라마에 출연해도, 주연이 아니라 단역을 맡아도 마음대로 하라며 지지했다. 하지만 도현도 슬슬 느끼고 있었다. 이제는 그들이 바라는 성과를 낼 때임을.
정한결 대표가 도현에게 내민 대본들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나같이 규모가 큰, 상업적인 영화였으니까.
‘한국에 온 지 일 년 반 정도 되었나.’
직접적으로 말은 안 했어도 소속사 측에선 애가 잔뜩 닳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대본은 직접 골라서 줬겠지.
물론 명목상은 도현의 미국행이지만, 그래봤자 고작 한 달이었다. 한 달 동안 쌓인 대본이 아무리 많다 한들 도현이 검토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니, 이제 슬슬 영화를 찍을 때가 되지 않았냐는 우회적인 권유로 받아들이는 편이 정확할 터였다.
‘그 대본들.’
소속사에서 도현의 취향을 파악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괜찮은 것만 모여 있었다. 솔직히 그중 아무거나 골라서 촬영해도 괜찮을 정도였다.
그런데 자꾸 망설이게 되는 건….
팅!
“…아.”
림에 맞고 튕겨 나간 공에 도현은 반사적으로 이유찬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는 다른 아이들을 보느라 도현의 실수를 발견하지 못한 눈치였다. 도현은 남몰래 가슴을 쓸었다.
끼릭, 운동화 밑창과 매끄러운 바닥이 마찰하며 소리가 났다. 도현은 공까지 한 걸음 남겨두고 멈춰 섰다.
소속사의 기대, 그리고 하고 싶은 것.
지금껏 일치해왔던 것이 엇갈리기 시작하니 마음이 복잡했다. 도현은 가만히 눈을 깜빡이며, 며칠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 아!
매니저에게 부탁해 뭉텅이로 가져온 대본을 정리하다가, 실수로 손에서 떨어트렸다. 바닥에 펼쳐진 종이들이 희게 빛났다. 한숨을 내쉰 소년은 그것을 하나하나 줍기 시작했다.
성가신 감정으로 빛나던 검은 눈이 한 대본에 닿았다. 거기에 써진 단어가 너무 의외였기 때문일 수 있었다.
아니, 단어 자체가 아니라 단어의 조합이 의외였던가.
그건 독립 영화의 대본이었다. 상업적인 영화가 아니라는 사실만으로 왜 후보에서 탈락했는지 알 수 있었다. 더욱 특이한 것은 그 영화의 주제가….
발레, 그리고 정신병.
보자마자 머리가 멍해졌다.
발레까지는 그리 특별할 것도 없다. 도현이 발레를 배운다는 건 나름대로 유명한 사실이고, 그에 관한 예능은 물론 드라마 배역 출연도 제안받은 적 있었으니까.
하지만 도현은 그것들을 거절해왔다. <전지적 참견쟁이들>에서는 보였다지만, 그건 일상을 보여주는 예능이었으니 그랬고.
본격적으로 연기의 재료로 삼기엔 부족함이 많다고 판단했다. 제안받은 역할이 발레 신동이라 유학까지 갔다 오는 천재였기에 더더욱. 예능의 경우 뽐낼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해서 거절했다.
그런데, 저 두 소재가 얽힌다고?
정신을 차렸을 땐 대본을 모두 읽어낸 후였다.
이상하다. 그게 첫 감상이었다.
그런데 다음날 자연스레 그 대본을 다시금 찾았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나 이거 연기하고 싶구나.
평소라면 주저 없이 결정했을 것을, 도현은 망설였다. 독립 영화. 발레. 정신병. …그냥 대놓고 상업을 등졌군.
매니저를 슬쩍 떠보아도 돌아오는 건 난감해하는 반응.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란 거겠지.
으음, 눈썹을 찡그린 도현이 느릿하게 손을 뻗었다. 둥글고 단단한 공을 양손으로 들어 올린다.
체육대회에서 농구에 나가게 되었다고 말한 다음 날 당연하다는 듯이 신발장에 자리했던 농구화를 신은 발이 느릿하게 나아갔다. 걸음이 멈춘 건 3점 라인에 섰을 때였다.
해야 하는 거, 하고 싶은 거.
탕, 탕. 한 손으로 공을 튕기던 도현은 문득 생각했다.
…꼭, 그래야 하나?
계약서에 이름을 적은 순간부터 도현은 나이에 상관없이 프로였다. 소속사에서 편의를 주는 만큼 의무에 매인다. 당연한 등가교환이었다. 하지만.
‘정 안 되면 알아서 안 된다고 하지 않을까?’
곤란하다면 소속사에서 도현을 설득하면 될 일이었다. 헨리도 내가 프로기 전에 애라고 했잖아. 어째 미국에서 조금 안 좋은 태도를 배워온 거 같긴 한데, 도현의 머릿속은 점점 더 뻔뻔해졌다.
비록 머릿속에 스물여덟 살의 기억이 있더라도 남들이 보기엔 중학교 2학년이다. 사춘기에 접어들 나이. 그러면….
탁. 튀어 오른 공을 안정적으로 잡은 도현이 가볍게 무릎을 굽혔다가, 그대로 위로 뛰어오른다.
손톱 끝에 살짝 걸린 공이 높다란 천장 아래 떠올랐다. 동시에 도현의 몸은 아래로 떨어졌다. 반듯한 이마가 드러났다가 검은 머리카락에 가려진다.
포물선을 그리는 공에 체육관에 있던 다른 아이들의 시선이 모였다. 그들은 공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도현은 공이 만들어낸 흐름을 보고 있었다. 검은 눈에 아쉬움이 스쳤다. 약간 흔들렸다.
그래도….
툭, 림에 부딪힌 공이 잠시 느려졌다. 살짝 림을 타고 구르는 듯하다가 기우뚱, 기울어서.
“…들어갔다!”
유려한 슛 폼에 시선이 끌려 구경하고 있던 아이가 작게 외쳤다. 도현은 그 소리를 듣고 가볍게 미소 지었다. 네트를 통과한 공이 바닥에 떨어진다.
그 광경이 눈에 느리게 박힘과 동시에 속이 시원하게 뚫리는 기분이었다. 무표정하던 입가가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그래, 언제부터 욕심을 죽이고 살았다고.
얌전한 척, 말 잘 듣는 척하지만 실은 고집불통이었다. 하고 싶은 건 꼭 해야 했고, 납득할 수 없는 일은 하지 않았다.
명료해진 머릿속에 도현이 상쾌하게 웃었다. 좋아. 그럼 오늘 집에 가면 바로 매니저 형한테 연락을….
“이도현! 내가 레이업 슛 연습하라고 했지! 그거 통과 못 하면 집에 못 가!”
“…….”
도현은 깨달았다.
일단 집에 갈 수 있는지부터가 문제라는 걸….
* * *
“경 팀장님, 무슨 일 있어요?”
심각한 낯으로 한숨만 푹푹 내쉬는 경찬호에 지나가던 2팀 팀장이 말을 걸어왔다. 그가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지만, 상대는 조금 더 집요했다.
결국 경찬호는 힘없이 말했다.
“도현이가 독립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고 해서요.”
“오….”
짧은 탄식을 내던 팀장이 심심한 위로를 보내다가 물었다.
“그런데 도현 씨 성격이 순하지 않아요? 경 팀장님이 부탁하면 들어줄 거 같은데. 워낙 어른스럽기도 하고.”
나왔다. 도현에 대한 세간의 흔한 오해 3번째.
회사 내에서 늘 청량한 미소를 머금고, 한 손에는 고급 제과점에서 산 디저트를 들고 오다 보니 사람들은 자주 오해했다. 도현의 심성이 무척 착하고 순하다고.
착한 것까지는 부정할 생각이 없지만 순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좀.’
도현은 순하다기보단 영악한 쪽에 가까웠다. 예의 바르고 단정한 얼굴에 홀려 있다가 정신을 차려 보면 도현이 의도한 곳으로 가 있기 일쑤였다.
“한번 잘 설득해봐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믹스커피를 든 팀장이 경찬호의 어깨를 한 번 두드리고 지나갔다. 문이 닫히는 것을 보던 경찬호는 한숨을 삼켰다.
설득.
그래, 설득이란 걸 해야 하는데.
- 그 작품이 제일 마음에 들어요. 이유요? 재밌을 거 같기도 하고…. 그냥 하고 싶어요. 안 될까요?
동시에 과거의 소년이 겹쳐졌다.
꼭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고 알게 모르게 거리감이 느껴지던 소년. 가까워질 수 있을까 싶은 상대였는데 어느새 풀어진 낯으로 그를 대하며, 이제는 하고 싶은 것도 거침없이 말하고 있었다.
설득. 해야지. 근데.
문제는, 그 말을 그냥 들어주고 싶다는 거였다.
“아….”
경찬호는 대표에게 잔뜩 깨질 자신의 미래를 직감하곤 머리를 감싸 쥐었다.
* * *
가방을 챙기던 희운은 앞자리에서 무표정하게 책을 정리하던 도현을 보다가 물었다.
“오늘도 회사 가?”
“응.”
“아직도 반대하셔?”
두어 번 정도 눈을 깜빡이던 도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매니저 형은 이상하리만치 금방 수긍한 반면, 정한결 대표는 강적이었다.
그는 곧장 도현을 불러서 한 시간 동안 설득하려 굴었고, 도현이 굽히지 않자 전략적 후퇴를 택했다. 요즘엔 온갖 이유를 핑계로 도현을 불러내어 어르고 달래고 조르고 사정하는 중이었다.
그의 입장도 알 만했다.
계약을 연장한 것과 별개로 도현은 이미 장기 프로젝트에 투입되어 있는 몸이었다. 올해만 해도 촬영이 예정되어 있으며, 시즌 3도 몇 년 내로 촬영할 것이다. 아마도 고등학생 즈음이지 않을까.
그러니 연장된 계약에도 불구하고 안심할 수 없는 것이다. 계약 기간이면 뭐 해. 한국에 없을 수도 있는데. 이런 느낌일까.
“그럼 어떻게 해? 내가 도와줄 일은 없을까? 가, 같이 부탁이라도….”
희운의 성격에 대표에게 부탁하겠다는 말을 꺼냈다는 건, 있는 용기 없는 용기 다 끌어모았다는 소리였다. 흐뭇한 빛을 띤 도현이 부드러이 말했다.
“아냐. 마음만 받을게.”
“하지만….”
“괜찮아.”
아마 내가 이길 것 같거든. 뒷말을 삼킨 도현이 싱긋 웃었다. 미국행 덕분에 깨달은 게 있다면, 자신이 고집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