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3화. 가족의 의미 (13)
“대표님.”
“아, 도현 씨. 이쪽으로 앉으세요.”
도현은 이번 주에만 벌써 세 번째로 오는 대표실 소파에 앉았다. 이 정도면 내 지정석으로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 실없는 생각까지 들었다.
“오늘은 마카롱이에요. 여기 민트초코 마카롱이 유명하다던데. 도현 씨 민트초코 좋아해요?”
“네.”
치약이랑 초콜릿을 함께 먹는 것보단 맛있었다.
도현은 대표가 건네는 사소한 질문을 받아주었다. 지난 며칠간 계속 이런 식이었다. 불러내어서 맛있는 걸 먹이고, 사적인 얘기를 꺼내어 경계심을 낮춘 후 조금 분위기가 온화해질 즈음 은근슬쩍.
“혹시 윤정숙 작가님 이전 작품을 본 적 있어요?”
이렇게 본 용건을 꺼내는 것이다.
익숙해진 패턴에 도현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는 안색을 밝히며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줄줄 늘어놓았다.
“…그래서 이번 작품도 기대하는 분들이 무척 많아요.”
“저도 기대되네요.”
“그러면 도현 씨가….”
“대표님.”
내내 얌전히 이야기를 듣던 도현이 그를 응시했다.
“제 생각은 변함없어요. 이렇게 말씀하셔도요.”
움찔, 정한결의 뺨이 살짝 떨렸으나 아주 찰나였다. 그는 곧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생각을 바꾸란 게 아니라 그냥 한번 고려해 보라는 의미로 말한 거였어요. 부담을 주었다면 미안해요.”
그 광경을 보던 이 실장은 생각했다.
이런 게 창과 방패인가.
이후로도 이어진 대화의 패턴은 비슷했다. 그렇게 한 시간 가까이 다과 시간을 가진 대표는 웃는 낯으로 도현을 배웅했다.
달칵.
검은 물새의 깃처럼 까만 머리카락이 문 너머로 사라졌다. 웃는 얼굴로 도현을 배웅하던 남자는 문이 닫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테이블 위로 풀썩 쓰러졌다.
“오늘도 실패네요.”
담담한 목소리에 정한결은 울컥했다.
“아니, 이 실장은 왜 이렇게 도움이 안 돼?”
“배우님이 싫다는 걸 제가 뭐 어떻게 하겠습니까? 까라면 까야지.”
“대표는 난데?”
“대표님도 배우님한테는 어쩌지 못하시잖아요.”
이 실장은 현명하게 권력관계를 정리해 버렸다. 정한결은 부정하지 못하고 앓는 소리만 냈다. 소속사 대표라 한들, 상대의 몸집이 저 정도면 의미 없는 직함일 뿐이었다.
“…이 실장이 보기엔 어때. 마음을 바꿀 거 같아?”
“글쎄요. 강단 있는 분이라.”
이 실장은 그간 도현이 보여줬던 모습을 떠올렸다.
고소 후 쏟아지는 항의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단단한 심성이나 냅다 대표실부터 쳐들어와서 정희운을 데려오자고 말한 돌발성, 미국행을 결정한 후 곧장 떠버리는 실행력까지.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이 실장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아쉬운 표정을 짓는 전 대학 선배이자 현 상사를 보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헛된 희망에 매달리는 건 이쪽 같은데.
“계속 부탁하면 못 이기는 척 들어주지 않을까?”
“그 전에 소속사를 박차고 나갈 거 같은데요.”
“하하, 이 실장. 농담도.”
“…….”
“…진담이야?”
“예.”
아니, 정한결이 당황하여 말했다.
“재계약한 지 얼마 안 지나서 위약금도 엄청날 텐데?”
“신경이나 쓰겠습니까? 금수저잖아요. 그리고 배우님 출신이 할리우드 아닙니까. 억대 소송이 숨 쉬듯 일어나는 곳인데 그쯤은 겁낼 것도 없겠죠.”
“…….”
정한결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럼 왜 내 말을 들어주고 있는 건데?”
이 실장은 정한결이 정말 몰라서 묻는 건 아니라 생각했다. 그만큼 어리숙한 사람은 아니니. 잠시 미련에 눈이 멀어 헛짓거리하고 있긴 하지만.
“그야 착하시니까 그렇죠.”
이 실장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했다.
그는 며칠 사이 도현에게 진심으로 감탄했다. 대표가 쓸데없는 용건으로 계속 부르는데 부르는 대로 와 주고. 징징대는 성인 남성을 견뎌내며 짜증 한번 안 낸다. 존경스러운 인내심이었다.
테이블에 양 팔꿈치를 기댄 정한결이 깍지 낀 손 위에 턱을 괴었다. 그 시선 끝에 하얀 대본이 있었다.
욕심인 건가.
하지만 정한결이 보기에 도현은 더 날개를 펼칠 수 있었다. 좋은 대본과 좋은 자본을 만나면 천만 관객 정도는 우습게 모을 잠재력을 가진 배우였다. 그걸 썩히기엔 너무 아깝지 않나?
분명 처음엔 이도현 소속사라는 타이틀만으로도 충분히 제값을 한다 여겼고, 만족했다. 그러나 그 또한 사람인지라 점점 더 욕심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희운을 데려온 이후 온갖 광고를 휩쓸며 돈을 불리고, 회사 주가가 조금씩 올라갈 때마다 그 욕심은 부풀었다.
“이 실장. 나도 웬만하면 도현 씨 말 들어주고 싶어. 근데 잘 생각해봐. 이번 기회 놓치면 또 언제일지 몰라.”
“저도 아쉽긴 합니다. 그렇다고 강제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럴 수 있는 상대도 아니고요.”
“그러니까 조금 더 말해보면….”
뚜르르!
벨 소리에 정한결의 말이 끊겼다.
그는 이 실장에게 손짓하고선 전화를 받았다. 조금 긴장한 낯빛 위로 사교적인 미소가 올라왔다. 이 실장은 침묵하며 전화 소리에 집중했다.
“예, 오랜만입니다. 도현이 아버님.”
예, 예. 아이고, 그렇죠. 네, 네. 왼손으로 들었던 핸드폰을 오른손으로 바꿔 든 그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하하, 네, 그럼요. 당연히 알고 있죠. 웃음소리가 가득한 전화는 언뜻 들으면 화기애애해 보였다.
“예, 예에. 그럼 들어가세요.”
삼십 분 넘게 이어진 전화는 정한결의 공손한 인사와 함께 끝이 났다. 화면에 통화 시간이 떠오름과 동시에 액정에 비친 얼굴의 입꼬리가 뚝 내려갔다.
“…대표님?”
“이 실장.”
“예.”
“경 팀장한테 연락해.”
“예, 무슨 내용을 전달할까요.”
“…고, 거….”
“네?”
정한결의 낯이 슬픔에 물들었다.
“하고 싶은 거 하라고….”
* * *
핸드폰을 든 손을 내린 이장혁이 고개를 돌렸다. 하얗고 까만 소년과 눈이 마주친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됐어.”
확인까지 시켜주는 말에 소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당연히 아빠가 해야 하는 일이지.”
당연하다고 말하면서 이장혁의 뺨은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도현이 누군가.
되도 않는 루머에 휩싸이면서도 부모에게는 손 한번 뻗지 않는 매정하고 똑똑한 아들이었다.
그런 도현이 그들에게 먼저 도움을 요청했다.
- …이런 상황인데, 자세한 계약 사항은 저보다 부모님이 더 잘 아실 거 같아서요. 그러니까….
잠깐 주저하던 도현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아직도 그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했다.
- 저 대신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으윽!”
“…아빠?”
“아, 아니. 잠깐 심장에 무리가 와서….”
“네? 혹시 어디 아프신 건….”
“아하하, 아냐. 아빠 멀쩡해. 자, 봐!”
일어나서 갑자기 스쿼트를 하기 시작하는 남성에 도현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네, 건강해 보이시네요….
며칠간 따라다녔던 문제를 해결한 도현은 방으로 들어갔다. 불이 켜진 방 안이 오늘따라 고요하게 느껴졌다.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문득 대표실에 있다가 피곤하단 생각이 들었고, 부모님이 떠올랐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그게 낯설고, 또 그로 인해 상황이 쉽게 풀려 버린 게 이상해서.
그런데 또 나쁘지만은 않은 거 같아서.
도현은 한참을 미묘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가 정신을 차린 건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을 때였다. 흠칫 놀란 도현은 곧 표정을 가다듬고선 문을 열었다.
“무슨 일….”
말을 채 뱉기도 전에 시선이 주르륵 미끄러졌다. 아래에 고정된 시선에 머리 위에서 잔 웃음소리가 흩어졌다.
“그렇게 신기해?”
서혜나가 자신의 배를 가볍게 쓸었다.
아직 임신 초기라 겉보기에 티가 나진 않았다. 그런데도 도현은 그녀만 보면 배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서혜나와 이장혁의 시선에서는, 도현이 동생의 존재에 마냥 신기해하는 것으로 보였다.
‘애는 애네.’
일렁이는 빛무리에 신경이 쏠려 그 흐뭇한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도현은 느릿하게 답했다.
“…네.”
처음 공항에서 보았을 땐 입바람이라도 불면 흩어질 듯 미약했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더 진한 빛깔을 띠고 있었다.
아직은 형이 느꼈던 그 운명 같은 끌림은 잘 모르겠다. 신기하긴 해도 그런 애틋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눈을 뗐다 하면 달라져 있는 빛무리에 시선이 자꾸 끌리는 건 사실이었다.
“네가 지어볼래?”
“네?”
복숭아 같기도 하고, 벚꽃 같기도 한 빛 덩이에 주의가 쏠려 있던 도현이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들었다. 부드러운 눈빛을 한 서혜나가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동생 이름 말이야. 네가 지어볼래?”
순간 잘못 이해한 줄 알았다.
“…제가, 이름을요?”
더듬더듬 튀어나온 말에 서혜나가 가볍게 웃었다.
“응. 우리 바다도 좋아할 거 같은데.”
아이의 태명은 바다였다.
복숭아로 할까, 바다로 할까 고민했는데, 바다가 더 짧고 발음이 편하다는 이유로 선택되었다.
“그런 걸 제가 하기에는….”
“부담스러우면 후보도 좋아. 같이 고민해 보면 되니까. 그리고 네가 하는 게 어때서? 엄마도, 아빠도 좋고. 음, 그리고 우리 바다도 좋다네.”
“…걘 말을 못 하잖아요.”
“으응? 못 들었어? 방금 좋다고 말했는데.”
도현의 표정이 어이없음에 물들었다. 그걸 믿겠냐고. 딱 그 생각이 묻어난 얼굴에 서혜나가 빵 터지고 말았다.
그녀가 크게 웃자 도현의 표정이 뚱해졌다.
“그래서 무슨 용건으로 오신 건데요?”
조금 퉁명스레 나간 질문에 서혜나가 웃음을 눌러 참았다.
“응, 이따 외식할까 해서 물어보려고. 오랜만에 은혜네랑 같이 먹을까 하는데.”
“전 좋아요.”
“그럼 연락해야겠네. 일곱 시 괜찮아?”
아직 별로 배가 고프지 않으니 상관없었던 도현은 괜찮다고 답했다. 가벼이 고개를 끄덕인 서혜나는 나가기 전, 도현을 돌아보았다.
“이름은 진심으로 말한 거니까 한번 생각해 봐.”
탁, 방문이 닫히고 도현은 방에 홀로 남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민거리 하나를 해결했더니 하나가 늘어버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