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544화 (545/582)

제544화. 가족의 의미 (14)

이름, 농구, 그리고 영화.

무엇 하나 쉽지 않은 것들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 눈을 한 번 깜짝할 때마다 시간이 흘렀다. 무언가 한 것도 없는 거 같은데 정신을 차려 보니 감독과 미팅을 앞두고 있었다.

매니저의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고급스러운 한식집이었다. 들어가자 직원이 친절한 태도로 반겨주었다. 도현을 보고도 놀라는 기색 없이 차분했다.

“이 방입니다.”

드르륵, 장지문이 열리며 좌식으로 마련된 테이블이 보였다. 먼저 와 앉아 있던 여성이 스르르 몸을 일으켰다.

그 동작이 무척 간결하고 조용하여 시선이 갔다. 삼십 대 정도로 보이는 여성은 한옥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은은한 나무 향이 날 거 같은 인상이었다.

“만나 보고 싶었어요. 한주애입니다.”

“안녕하세요, 이도현입니다.”

“경찬호입니다.”

각자 한 번씩 악수하고 자리에 앉았다. 도현은 푹신한 방석 위에 자리 잡고는 상대를 바라보았다.

화장기 없이 수수한 얼굴, 자연스럽게 묶은 머리칼에도 불구하고 드러난 얼굴은 아름다웠다. 도현의 가족이 가진 화려하고 세련된 느낌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한 주애.

도현은 그녀를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녀가 출연한 영화를 본 적 있다는 말이 맞았다.

<주어화>. 그건 상업적으로 그리 성공한 영화는 아니었지만, 비평가들 사이에서 평이 좋은 영화였다. 그 후로도 쉬지 않고 몇몇 영화에 출연했고.

처음엔 누군가의 영화에 출연하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감독란에 그녀의 이름 석 자가 올랐다. 때론 감독의 이름으로만 등장했고, 어떤 때에는 감독이자 배우로서 이름을 올렸다.

그중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영화는 없지만, 3년 전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수상한 적이 있는 걸 보면 감독으로서의 재능도 뛰어난 모양이었다.

그녀의 삶은 도현의 것처럼 화려하진 않았다. 하지만 도현은 그녀의 이력에서 끊임없이 타오르는 열정을 느꼈다.

그리고 실제로 마주한 모습도 상상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희고 차분한 낯이지만, 결코 심지가 약해 보이진 않는 여성이 조용히 웃었다.

“오는 길은 힘들지 않았어요?”

“괜찮았어요. 학교랑 가까운 곳이더라고요.”

그 말에 한주애의 시선이 도현의 옷에 닿았다. 학교 수업이 끝난 후 곧장 매니저의 차를 타고 약속 장소에 온 도현은 교복을 반듯하게 차려입은 채였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네요. 일부러 가까운 곳으로 예약했거든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묘한 눈빛이 도현을 향했다.

“…무척 예의 바르네요.”

도현의 표정도 같이 미묘해졌다.

그럼 와서 깽판이라도 칠 줄 알았던 걸까.

다행히 적당한 순간에 장지문이 열리며 직원이 들어왔다.

직원은 테이블 위에 여러 가지 반찬과 연잎밥, 그리고 생선구이를 올리고 방을 나갔다. 어느새 꽉 찬 상에 자연스레 끊겼던 대화가 다시금 이어졌다.

“생선을 싫어하진 않죠?”

“잘 먹어요.”

“아, 그럼.”

갑자기 생선을 바르기 시작한 한주애에 도현은 당황했다. 능숙한 손길로 슥슥, 뼈와 살을 분리한 그녀는 도현의 가까이 접시를 밀어주었다.

“자, 먹기 편할 거예요.”

차분하고 우아한 인상의 여성에게서 어쩐지 밥을 먹을 때마다 흐뭇한 미소를 매달던 아빠가 연상되었다.

“…네, 감사합니다.”

준 걸 됐다고 거절하기도 뭣해 도현은 순순히 호의를 받아들였다. 그 후로 조용한 대화가 오가는 식사 시간이 이어졌다.

주 화제는 도현이었다.

“뮤직비디오 봤어요.”

“아.”

“발레는 알고 있었지만, 바이올린도 켤 줄 아는 건 몰랐어요. 굉장히 잘하던데요?”

“취미로 하는 수준이에요.”

얼굴에 금칠해주는 이 상황이 익숙하면서 안 익숙했다. 그런 기색을 내비치지 않고 태연히 응수하던 도현이 멈칫했다.

“저를 캐스팅한 이유에 그 뮤직비디오가 포함되어 있어요?”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던 여성은 순순히 답했다.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요.”

그녀는 잔에 담긴 녹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소리 없이 찻잔을 내려둔 후, 도현을 응시했다.

“맞아요. 대본을 완성하고 이걸 연기해줄 배우를 찾았죠. 그러다가 뮤직비디오를 봤고, 도현 씨가 제 영화의 주인공을 맡아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거기서 한 발레 때문에요?”

“계기가 되었을 뿐이죠.”

“…그 부분에 관해서 미리 말씀드릴 게 있는데.”

“말씀하세요.”

“제 발레 실력은 그리 뛰어나지 않아요.”

그럴듯하게 할 수는 있지만, 그뿐이었다. 발레에 모든 걸 거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도현은 가벼운 마음으로 배웠다. 반이 마땅치 않아 전공하는 친구들과 같이 수업을 듣고 있긴 해도 갈수록 그들과 격차가 벌어지는 게 스스로 느껴졌다.

분하거나 슬프진 않았다. 쏟는 시간이 다르니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최선은 다해 보겠지만, 만약 제게 예술성을 기대하셨다면 만족스럽지 않을 수 있어요. 이 부분은 솔직히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도현은 자신이 대중에게 어떤 이미지인지 알았다.

뭐든 잘하는 천재, 신동.

AI니, 뭐니 하는 말이 나오는 이유도 그런 이미지에서 비롯된 거였다.

만약 그녀도 그걸 알고 있고, 또 <전지적 참견쟁이들>에서 만든 발레 천재 이미지를 접해 보았다면, 어쩌면 그녀는 도현이 충족시켜 주지 못할 기대를 품고 있는지도 몰랐다.

“푸흐.”

“?”

“풋, 아, 죄송해요. 비웃은 건 아니고 그냥, 의외라서요.”

도현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매를 좁혔지만, 경찬호는 한주애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의외겠지.’

지금은 완전히 사적인 자리였고, 따지자면 이 관계에서 갑은 도현이었다. 그런데 도현은 그러한 것은 조금도 안중에 없는 것처럼, 도리어 자신이 감독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솔직히 궁금했거든요. 왜 내 작품을 고른 건지. 어쩌면 최근에 발레로 화제가 되었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고른 건 아닐까란 생각도 했어요.”

“가볍게 생각한 적은….”

“네, 알아요. 제가 잘못 생각했어요. 사과할게요.”

그녀의 눈매는 처음 마주했을 때보다 훨씬 풀린 상태였다. 처음에 화가 나거나 불편해 보였다는 건 아니었다. 그저 방관하듯, 관찰하듯 거리감 있던 시선이 부드럽게 누그러졌다.

도현은 깨달았다.

이 만남이 끝나고, 어쩌면 계약을 무르는 게 도현 측이 아니라 감독 측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것을.

“그리고 걱정할 필요 없어요. 그런 예술성을 바란 게 아니니까. 아니, 오히려 너무 천재 같아도 곤란해요.”

“네?”

“혹시 <뷰티풀 마인드>라는 영화 본 적 있어요?”

“…네.”

정신 분열을 앓은 천재 수학자의 삶을 각색한 영화. 무척 유명한 영화이니만큼 도현도 본 적이 있었다.

“무척 좋은 영화죠. 아름답고요. 하지만 제가 다루고 싶은 건 존 내쉬 같은 특별한 존재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경찬호는 도현이 눈앞의 감독을 마음에 들어 하는 걸 알았다. 꽤 오래 봐온 만큼 그 정도는 눈치로 알 수 있었다.

같은 배우라서 그런가 했는데, 이제 보니까 그냥 저와 닮은 사람이라서 그런 거 같았다.

톡톡, 그녀가 자신의 머리를 손끝으로 건드렸다.

“여기가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매체에서 소비되는 방식은 할리우드나 한국이나 꽤 비슷해요. 미화되거나, 동정받거나.”

“…….”

“전자는 특별하게 표현되죠. 마치 존 내쉬처럼, 그가 정신에 문제를 가졌지만 그러한 것조차 그의 특별함의 일부처럼 느껴지게. 후자는 마치… 봉사 단체의 기아 사진 같은 거예요. 불행을 전시하고 동정을 유도하죠.”

시니컬한 내용과 다르게 말투는 한없이 부드러웠다.

“둘 다 나쁘다 생각하진 않아요. 그냥 궁금한 거죠, 소비되는 이미지 외의, 현실의 사람은 대체 어디에 존재하는 건지요.”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흐트러진 기색이 조금도 없는 한주애가 도현을 반듯이 응시했다.

“저는 사람의 이야기를 남기고 싶어요. 미화된 천재도, 전시된 기아도 아닌 한 사람의 이야기요. …흠, 어떤 의미론 다큐멘터리에 가까울 수도 있겠네요.”

그리고, 그녀의 입술이 느릿하게 떨어졌다.

“도현 씨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요.”

* * *

흘끔, 경찬호는 생각이 많아 보이는 소년을 흘깃거렸다. 내리깐 눈매 아래로 깊은 음영이 윤곽을 그렸다.

“어떻게 할 거야?”

“뭐를요?”

“영화.”

깜빡, 깜빡. 말간 표정을 한 도현이 뭘 묻느냐는 듯 말했다.

“출연해야죠.”

“…당연한 거야?”

“네.”

“그럼 왜 그렇게 고민 중인 건데?”

“아.”

몇 번 입술을 달싹거리던 느릿하게 말했다.

“그냥… 배역 관련해서 생각이 많아져서요.”

“으음.”

“열심히 해보려고요.”

언제는 안 열심히 한 적이 있기는 했던가. 실없는 의문과 함께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을 대표를 향해 심심한 위로를 보냈다.

신호에 걸려서 멈춰 있던 경찬호는 파란 불로 변함과 동시에 브레이크에서 발을 뗐다.

“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천천히 해. 어차피 당장 촬영 들어갈 거 아니잖아.”

시즌 2 촬영 일정에 대해 간략히 전해 들은 한주애는 영화 촬영 시작일로 올해 말이나 내년을 거론했다.

막대한 자본이나 촬영장이 필요하지는 않으니 하려고 한다면 당장 두 달 내로 촬영에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주애 감독도, 도현도 그 선택지를 당연하다는 듯이 배제했다.

“그렇죠. 그보다는 다른 게 먼저죠.”

“맞아. 올해 잘 찍어서 작년에 너를 무시하던 사람들 코를 눌러 줘야….”

“아니요. 그 전에요.”

“그 전에?”

뭐지? 예능을 잡아뒀었나?

‘아닌데?’

다시 신비주의 전략으로 가자면서 예능 출연은 없앤….

“이틀 뒤에 체육대회거든요.”

“…….”

“이기고 올게요. 아, 저 집 말고 학교에 내려줄 수 있을까요?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친구들이 아직 학교에 있을 거 같아서요.”

“…그래, 학교로 갈게.”

그는 깨달았다. 아무리 작품으로 심각하게 고민하고 제가 하고 싶을 걸 척척 해낸다 한들, 결국 열다섯 살의 소년이라는 것을.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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