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5화. 가족의 의미 (15)
가연 예중의 체육대회는 이틀에 걸쳐 진행된다. 전날 축구, 야구, 배구, 농구 등등 갖가지 종목의 예선을 치르고, 당일에 결승전을 치르는 방식이었다.
실상 본격적인 체육대회는 결승전을 치르는 날뿐이지만, 한껏 들뜬 아이들에겐 그게 그거였다.
“저희 구경 갈래요! 네?”
“안 돼. 수업 시간이잖아.”
“아, 쌤! 옆 반 애들은 구경하러 갔대요!”
“우리 반만 응원 못 해서 결승전 못 가면 어떡해요!”
“나 참….”
골치 아픈 표정을 짓던 선생님이 반을 둘러보았다. 아이들이 반 정도 빠져서 숭숭 빈 교실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수업 시간이라 하긴 했지만, 남자 축구와 농구, 여자 배구 예선 경기를 치르는 아이들이 빠져서 자습 시간이나 다름없었다. 어차피 안 된다고 해도 말을 들을 거 같지도 않고….
선생님이 못 이기는 척 입을 열었다.
“대신 다음 주부터 수업 열심히 듣는 거다?”
“그럴게요!”
“저 완전 집중 왕이에요!”
여기저기서 환호가 터져 나오자 선생님도 피식 웃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희희낙락하며 무슨 경기를 보러 갈지 친구들과 떠들어댔다. 한설아와 최민지도 마찬가지였다.
“농구! 농구 보러 가자!”
눈을 반짝거리며 말하는 최민지에 한설아가 머뭇거렸다.
…축구 보고 싶은데.
가연예중의 체육복은 하얀색 위에 민트색이 포인트로 들어간, 전체적으로 화사한 디자인이었는데 체육복을 입고 운동장을 달리는 희운을 보고 있노라면 그녀의 심장이 쿵쿵 뛰는 기분이었다.
“응? 농구 보러 가자! 밖에 햇빛도 센데!”
“…그래, 그러자.”
결국 친구의 말을 거절하지 못한 한설아가 최민지가 이끄는 대로 걸었다. 터덜터덜, 조금 기운이 빠진 채 뒷문을 넘을 때였다.
“아.”
툭, 머리가 어딘가에 부딪힌 감각 다음에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탄식이 따라왔다. 한설아는 이마를 매만지며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열기가 멀어지며 시원한 공기가 뺨을 간지럽혔다.
“…도현?”
“미안, 앞을 못 봤어.”
한설아가 한 걸음 물러설 때 세 발자국 멀어진 도현이 멋쩍게 웃었다. 방금까지 뛰다 왔는지 머리카락이 젖은 채 이마에 엉겨 붙어 있었다.
“시합 끝난 거야?”
“응. 방금. 그래서 교실로 온 건데….”
도현이 주위를 둘러보곤 물었다.
“다들 어디 가는 중이야?”
“선생님이 경기 구경해도 된다고 하셔서.”
“아아.”
“참고로 나랑 민지는 농구 보러 가는 중이었어.”
“음, 근데 먼저 끝나버렸네.”
도현이 가볍게 웃자 한설아의 팔을 꼭 붙잡고 있던 최민지가 물었다.
“저, 도현아. 경기 어떻게 됐어?”
“그야….”
“다 비켜! 농구천재 이유찬 납신다!”
“오오오!”
정문을 활짝 열며 등장한 이유찬에 아이들이 반응해 주었다. 자연히 세 사람의 시선도 그쪽에 쏠렸다.
바람 빠지듯이 웃은 도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게 됐어.”
“이긴 거야!?”
“응. 이제 내일 결승전 치러야지.”
“꼭 응원하러 갈게!”
“하하, 고마워.”
저쪽에선 아이들이 이유찬에게 인간 가마를 태워주고 있는데, 이쪽에서는 청춘 로맨스물이 방영되고 있었다. 아니, 일방적인 청춘 로맨스물인가.
그때, 최민지가 용기를 냈다.
“도현아. 교실에 있을 거 아니면 같이 경기 보러 갈래?”
“경기?”
“응. 남자 축구 아니면 여자 배구! 지금 경기 중이라서.”
“같이 가도 좋긴 한데….”
도현이 곤란한 듯 눈매를 살짝 찡그렸다.
“지금 나한테서 냄새날 텐데. 화장실에서 대충 씻고 오긴 했지만….”
“안 나! 하나도 안 나!”
격렬한 반응에 제 옷소매를 들어 냄새를 맡아보던 도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안 나나.
한설아는 도현을 한번 보다가, 시선을 돌려 체육복 상의를 벗어 던지고 선풍기 아래 드러누워 반팔 티를 펄럭이는 이유찬을 보았다. 그가 반팔 티까지 벗으려 하자 여자애들이 더럽다며 질색했다.
…뭘까. 이 엄청난 차이는.
조금 떨떠름해지긴 했지만, 이쪽이 아니라 저쪽이 일반적이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하긴…. 사람이 너무 비현실적이니까.
“우리도 보러 갈 건데! 같이 가자!”
“어? 너희도?”
“응. 뭐 보러 갈 거야? 너 보러 가는 거 따라 갈래!”
“아, 나는….”
“야야야야야! 이도현은 우리 농구팀 거거든!”
아저씨처럼 배를 드러내고 ‘어 좋다’ 하고 있던 이유찬이 벌떡 일어나 여자아이들과 도현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가도 우리랑 갈 거야!”
“그런 게 어디 있어!”
“뭐. 불만 있냐? 불만 있으면 어쩔 건데?”
짹짹대며 말다툼을 시작하는 아이들에 도현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냥 다 같이 보러 가면 되는 걸 왜…? 그런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얼굴이었다.
한설아는 흘긋, 제 옆에 선 친구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어느새 뒷전으로 밀린 게 분한지 속상한 낯이었다.
그러니까, 사람이 너무 비현실적이니까 애들이 가만 못 두잖아.
후, 한숨을 삼킨 한설아가 익숙하게 친구의 어깨를 토닥였다. 어차피 같은 반에서 지낼 거면 일 년 내내 지독하게 보게 될 광경이었다.
* * *
결국 아이들은 사이좋게 축구를 보러 갔다. 축구를 보고 싶다는 도현의 의견 때문이었다.
몇몇 여자아이들은 친구를 응원해야 한다며 여자 배구를 보러 갔기 때문에, 거의 반반 정도 나뉘어서 이동하게 되었다.
도현은 운동장 벤치에 자리 잡았다. 적당히 앞줄에 앉자 아이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그 주변에 앉았다.
축구 경기는 현재까진 1 대 1으로 동일한 점수를 기록 중이었다. 한설아는 저 멀리서 갈색 머리카락을 붕붕 띄우며 뛰어다니는 희운을 보다가 제 옆자리를 보았다.
이젠 조금 익숙해진 흰 낯이 무심하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저 새카만 눈동자가 누구를 따라다니고 있는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냥 집중한 얼굴 같기도 한데….
“너 무슨 고민 있어?”
“…나?”
한설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도현이 제 뺨을 매만졌다.
“…그게 티 나?”
“티 나는 건 아닌데… 왠지 그런 거 같아서.”
한설아의 대답에 도현이 짧게 웃었다. 감이 좋네. 그런 말도 함께였다.
“음, 심각한 일은 아니고.”
“편하게 말해.”
“내가 동생이 생겼거든.”
“아, 동생이…. 도, 동생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주억이던 한설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제가 외쳐놓고 놀라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에 도현이 하하 웃었다.
“딱히 비밀은 아니야.”
“그, 그래? 다행이다….”
“응. 아무튼 동생이 생겼는데 엄마가 나한테 이름을 지어 보겠냐고 하셔서.”
“너한테 이름을?”
“좀 놀랍지.”
“으응….”
보통 동생 이름을 형제가 짓던가?
의아한 표정에 도현이 픽 웃었다.
“괜찮아. 나도 그래. 뭐, 예상되는 이유가 없는 건 아니지만….”
도현의 시선이 공을 굴리며 달리는 희운에게 닿았다.
도현은 동생을 신기해하는 것과 별개로 이렇다 할 정을 붙이고 있지는 못했다. 싫다는 게 아니라, 이상하리만치 아무런 감상도 들지 않았다.
그리고 아마 부모님도 이런 도현을 아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름을 붙여달라고 부탁했겠지. 그게 누구든 자신이 정의한 상대에게 정이 가는 건 당연할 테니.
“…그래서 이름 고민하고 있던 거야?”
“비슷해.”
그 고민이 무슨 이름을 할지가 아닌, 부모님의 제안을 받아들일지 말지인 것만 빼면.
도현은 자신을 잘 알았다. 그게 누구든, 이름 지어준 상대를 결코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단순히 책임감의 문제가 아니었다.
도현은 불안정한 영혼으로 태어났고, 또 다른 불안정한 영혼을 만나 새로이 구성되었다. 그 과정에서 일반적인 영혼이라면 평생 알 수도, 볼 수도 없는 섭리를 두 눈에 담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대가가 있기 마련이라. 섭리를 직접 느끼고 볼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대가는 남들보다 섭리에 강하게 속박되는 것으로 발현된다.
덩어리 님이 도현의 이름을 묻지 않고 부르지 않는 것 또한 그러한 이유였다. 그 순간 도현은 조금 더, 현실보다는 비현실의 세계에 강하게 속박될 테니까.
그러니 그 일부나마 비슷한 힘을 가진 도현이 누군가에게 이름을 붙인다는 건, 그 영혼과 자신의 영혼을 보이지 않는 실로 묶는 일과 유사했다.
부모님이 이걸 알고 말한 건 아니겠지만….
“내가 도와줄까? 예쁜 한자 같이 찾아봐줄 수는 있는데.”
“음, 아니야. 이름은 생각해뒀어.”
“…벌써?”
“응.”
“동생 성별은 알아?”
“아니.”
“근데 지었다고?”
“딱히 상관없지 않나?”
“그건 그런데….”
상대가 당당하게 나오니 딱히 할 말이 없었다. 말끝을 흐리던 한설아가 고개를 한번 털고선 물었다.
“그럼 이름 알려줄 수 있어?”
“아직 안 돼.”
“왜?”
“정하지 않았거든.”
나 지금 무슨 대화 중인 거지.
도현은 종종 뜬구름 잡는 얘기를 할 때가 있었지만, 오늘은 그게 유달리 심했다. 다른 애였다면 놀리는 건가 싶었을 텐데 또 상대가 상대다 보니까 ‘뭔가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라고 생각되는 게 문제였다.
“우아악! 골! 골인!”
그때, 희운의 발에서 뻗어나간 공이 골키퍼의 수비를 뚫고 네트에 강하게 박혔다. 아이들이 벌떡 일어나 환호하자 도현과 한설아도 덩달아 일어났다. 한설아의 얼굴이 흥분으로 붉게 달아올랐다.
“정희운! 잘했어!”
희운의 득점에 흥분해 소리를 지르던 한설아는 옆얼굴에 와닿는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아, 맞다. 나 얘랑 얘기 중이었지. 뒤늦게 귓불이 붉어지자 도현이 작게 키득거렸다.
“나중에 결정하면 알려줄게.”
“…그래.”
키득키득 웃던 도현이 환한 얼굴로 달려오는 희운을 맞아주었다.
“우리 팀 이겼어!”
“봤어. 잘했어.”
토닥토닥, 어깨를 두드리자 희운이 상기된 낯으로 물었다.
“너는?”
“우리도 이겼어.”
“우악!”
희운이 기쁨의 함성을 내뱉었다.
4반 남자 농구부, 그리고 남자 축구부 모두 결승 진출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