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6화. 가족의 의미 (16)
“네, 지금까지 1학년들의 입장식이었습니다. 아주 풋풋하고 멋졌는데요, 지금부터 2학년 입장식을 시작하겠습니다!”
가연 예술 중학교 1학년 아이들은 저마다 기대를 안고 운동장 한쪽을 응시했다. 사회자의 외침에 따라 2학년 1반이 제일 먼저 등장했다.
조금 부끄러워하던 1학년들과 달리 2학년들은 조금 더 뻔뻔했다. 대통령을 호위하듯 선글라스를 끼고 담임 선생님을 둘러싼 채 입장하는 모습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다음은 2학년 4반!”
사회자의 외침에 1학년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다른 선배들의 입장식도 분명 재미있었지만, 그들이 진짜로 기다리는 건 바로 지금 입장할 사람이었다.
“…나왔다!”
“보여? 어디? 어디?”
“저기 맨 끝에!”
아이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헐, 토끼 귀!”
2학년 4반의 컨셉은 토끼 인간인 건지, 남학생 여학생 할 것 없이 복실한 토끼 귀에 꼬리를 매단 채였다. 앞줄에 선 몇몇 학생들이 네발로 깡충깡충 뛰어대면서 관종력을 뽐냈다.
아쉽게도 그들이 기다리던 인물은 얌전히 등장할 따름이었다. 아쉬움을 삼킨 1학년 이 모 양은 평소에 보기 힘든 얼굴을 마음껏 구경했다.
학교에서 가장 유명한 2학년 선배는 그 얼굴을 보기가 쉽지 않았다. 쉬는 시간에는 항상 교실에만 있었고, 점심시간에는 늘 주위에 사람이 넘쳐났다. 그래서 같은 학교임에도 불구하고 그 용안을 직접 본 날은 별로 없었다.
“…잘생겼다.”
옆에 앉은 친구가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이 모 양 또한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취향 위에 있는 얼굴이었다.
역시 가연예중에 오길 잘했다.
아마 그녀뿐만 아니라 태반이 비슷한 생각 중이지 않을까. 올해 입시가 다른 해에 비해 유난히 치열했다고도 했고.
3학년까지 입장식을 마치고 나자 단상에 교장 선생님이 올라갔다. 아직은 귀에 덜 익은 교가를 부른 후에 개회식이 이어졌다.
물론 얌전히 교장 선생님의 연설을 듣는 아이들은 없었다. 이 모 양 또한 방금 보았던 유명인을 주제로 떠드느라 바빴다.
그러거나 말거나. 익숙하게 연설을 마친 교장 선생님이 운동장을 한번 빙 둘러보았다.
“…해서, 모두에게 즐거운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체육대회의 시작이었다.
* * *
“빨리! 빨리 보러 가자!”
“으응, 알았어.”
최민지는 어제 농구 경기를 구경하지 못한 게 아쉬웠던지, 한설아를 계속 재촉했다. 축구 경기는 농구 경기가 끝난 후 있었기 때문에 한설아도 별말 없이 친구를 따라갔다.
그리고.
“…사, 사람이 왜 이리 많아?”
야외 농구장은 구경 온 아이들로 인해 코트를 제외한 모든 구역이 빽빽하게 찬 채였다. 심지어 도현의 이름이 적힌 플랜 카드까지 종종 보여 한설아는 질린 표정이 되었다.
맞아, 쟤 유명한 배우였지….
일 년쯤 같이 있다 보니 가끔 까먹는데, 종종 이런 식으로 되새겨질 때가 있었다. 한설아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코트 위에 선 소년을 보았다.
“실례합니다, 잠시만요! 저 4반이에요. 앞으로 좀 갈게요!”
최민지는 포기할 생각이 없는지 부득불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며 전진했다. 한쪽 팔로 한설아와 팔짱을 낀 채였기 때문에, 그녀도 자연히 이리저리 치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아, 씨….”
“야야. 2학년 선배야.”
그 과정에서 실수로 어깨를 친 아이가 짜증을 냈다. 한설아는 미안함과 민망함에 고개를 푹 숙였다.
“끄응, 아! 다 왔다!”
그사이 목표한 지점까지 오는 데 성공한 최민지가 환한 표정을 지었다.
“설아! 여기 앉자!”
“응….”
한설아는 조용히 최민지 옆에 가서 앉았다. 밀려난 1학년에게 미안하긴 해도, 그녀 또한 도현의 경기가 궁금했다.
‘그렇게 녹초가 될 정도로 연습했으니까….’
처음엔 싫은 티를 풀풀 내더니, 나중엔 이유찬이 부르지 않아도 알아서 벌떡 일어나 체육관으로 갔다. 그 변화를 지켜봐 온 한설아는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미안해, 1학년 친구들아.’
마음속으로 심심한 사과를 건넨 한설아가 눈앞의 코트에 집중했다.
결승전에 오른 2학년은 4반과 7반. 각각 흰색과 푸른색의 농구복을 입고 있어서 구분하기는 쉬웠다.
“백팀 이겨라!”
“청팀 파이팅!”
백과 청. 반별 대결인 동시에 백팀과 청팀의 대결이기도 했다. 그리고 한설아가 속한, 도현이 뛰는 팀은 백팀이었다.
다행히 경기 시작 전에 온 건지 점수판은 양측 다 0점이었다.
“선수 인사!”
목에 호루라기를 건 체육 선생님이 크게 외쳤다. 양측이 가볍게 악수를 한 후 물러서자, 심판이 중심에서 공을 위로 던졌고.
“!”
높게 뛰어오른 도현이 공을 먼저 쳐내 백팀으로 가져왔다. 처음부터 활약하는 모습에 ‘갓도현’ 플랜카드를 목에 건 아이들이 비명을 질렀다.
도현은 곧장 이유찬에게 볼을 패스했다. 능숙하게 드리블을 한 이유찬이 중앙까지 파고들었다. 그의 눈에 코트의 빈 곳이 보였다.
좋아, 이대로 저길 파고들면….
그러나 너무 집중했던 탓일까. 뒤쪽 대각선에서 뻗어오는 손길을 방어하지 못한 이유찬은 그대로 허점을 내어주었다.
“가져간다!”
상대 팀의 키가 작은 선수가 빈틈을 파고들어 볼을 빼앗았다. 첫 순서부터 볼을 빼앗긴 이유찬의 얼굴에 낭패 어린 기운이 떠올랐다.
“청팀! 청팀!”
“주성훈!”
그 키 작은 가드의 이름이 주성훈인지,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대로 잽싸게 수비를 뚫고 빠져나간 주성훈이 골 아래에서 패스했고, 볼을 받은 소년이 그대로 뛰어올랐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뻗으면 그대로 득점이다. 청팀의 표정이 밝아질 때였다.
“……!”
“미안. 첫 득점은 우리가 가져가기로 약속해서.”
타앙!
허공에서 볼을 낚아챈 도현이 그대로 바닥에 착지했다.
“…이도혀언!”
관중석에서 비명을 닮은 환호가 터져 나왔다.
까만 눈동자에 코트가 담겼다. 재빨리 코트의 흐름을 파악한 도현이 이유찬에게 볼을 넘겼다. 또다시 상대 팀 선수가 볼을 뺏으려 들었지만, 두 번은 실수하지 않았다.
능숙하게 다리 사이로 볼을 넣어 빼돌린 이유찬이 코트 위를 달렸다. 그대로 김병철에게 패스했다가 다시 돌려받은 볼을 튕기던 이유찬은 또다시 가까이 따라붙은 주성훈에 속으로 혀를 찼다.
‘진짜 빠르단 말이지.’
하지만 이쪽에도 에이스가 있었다.
이상하게 드리블은 네 번 하면 한번은 손에서 놓치지만, 코트를 보는 눈과 슛만큼은 무시무시한 비밀 병기가!
이유찬이 어느새 저 앞에 가 있는 도현을 향해 볼을 던졌다. 물 흐르듯 패스를 받은 도현이 자리에서 뛰어오르자, 청팀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2점 라인!
도현이 서 있는 곳은 2점 라인이었다. 거기서 슛에 성공하면 처음부터 2점을 내어주게 된다. 막기 위해 주변에 있던 수비들이 모두 뛰어올랐고.
가볍게 웃은 도현이 그대로 방향을 틀어 김병철에게 패스했다. 패스를 받은 김병철은 아무런 방해도 없이 손을 뻗었고.
“!”
철썩, 그물이 걸리는 소리와 함께 볼이 매끄럽게 골을 통과해서 떨어진다. 백팀, 청팀 할 것 없이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씨익, 크게 웃은 이유찬이 주성훈을 향해 약 올리듯 외쳤다.
“우선 3점 가져간다!”
“저 자식이!”
짝! 김병철과 하이 파이브를 한 도현이 상대 팀 선수를 놀리고 있는 이유찬에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무언가 찾는 게 있는 사람처럼, 코트 밖 관중석을 둘러보았다.
언제 왔는지 모를 한설아와 최민지에게 눈인사를 건네고, 그리고….
‘왜 저렇게 구석에 있어.’
사람들 사이에 짜부되어 일렁이는 개나리 빛에 도현의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무튼 보러 왔으니 된 건가.
희운은 알까. 동생의 기대를 배반하기 싫다는 이유로 몇 날 며칠 지옥의 훈련을 한 걸…. 조금 아련해질 때였다.
“치사하게 속임수나 쓰고.”
“?”
상대 팀 선수가 도현에게 말을 걸어왔다. 몇 번 마주친 적 있는 애였다.
“이번엔 운 좋게 통했지만, 다음부터 그런 행운은 없을 거야.”
도현은 이 친구의 머릿속이 궁금해졌다. 혹시 농구가 뛰면 무조건 슛을 넣는 스포츠인 줄 아는 건가?
아니면….
- 시비 걸면 넘기지 말고 받아쳐!
“왜, 운이었으면 좋겠어?”
방긋, 웃으며 묻는 말에 상대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도현이 받아칠 줄은 몰랐던 기색이었다.
그 반응으로 도현은 반쯤 확신했다.
‘방해하려고 아무 말이나 던졌나 보네.’
그만큼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는 뜻이니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그와 별개로 걸려주진 않을 거지만. 가볍게 웃은 도현이 무릎을 굽혔다.
경기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 * *
“누, 눈 마주쳤지? 나한테 인사한 거 맞지?”
호들갑을 떠는 친구에 한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우리’에게 인사한 거지만….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역시 보러 오길 잘했어!”
희희낙락하는 친구를 보던 한설아의 표정이 조금 묘해졌다. 그 애가 플랜카드를 든 후배들을 보고 은근히 무시하는 기색을 내비칠 때 그건 더욱 심해졌다.
‘안 그러는 게 좋을 텐데….’
어디, 1학년 때는 최민지 같은 착각을 한 친구가 없었겠는가? 한설아가 아는 애만 해도 셋이었다.
그리고 그 셋 모두 차가운 현실을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도현은 이런 데에 눈치가 없는 거 같으면서, 또 선 긋는 건 확실해서….
“어어, 어!”
아까 이상하게 드리블에 실수해 공을 놓치는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더니, 이번엔 제대로 드라이브 인 한 도현이 디펜스를 무너뜨리고 그대로 림에 공을 꽂아 내렸다. 콰앙! 소년의 무게와 중력까지 더한 힘에 림이 크게 흔들렸다.
뒤이어 도현이 꽤 무거운 소리와 함께 코트 위로 떨어졌다.
“미친, 댕 멋있어….”
아무래도, 스타를 향한 호감과 풋사랑이 조금 더 발전해버린 모양이었다. 완전히 넋 나간 친구의 얼굴을 보던 한설아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부디 이번엔 그리 길지 않길 바라며.
“이도현 최고다!”
…물론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한설아는 아까부터 구석에서 붕방거리던 갈색 머리카락에 속절없이 시선을 빼앗겼다. 귀여워….
따가운 시선을 느낀 희운이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의 눈이 맞닿고, 신이 나 응원하던 희운이 조금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머리카락 사이로 슬쩍 붉어진 귓가가 보였다.
“…나도 답이 없다.”
민망해하는 건 희운인데, 괜히 그녀의 뺨이 후끈거렸다. 한설아는 괜히 손가락을 말아 주먹을 쥐다가 생각했다.
- 광고에서 농구할 때 멋있던데…!
운동 잘하는 사람을 좋아하던가.
한설아의 눈동자가 결연한 빛으로 굳게 물들었다.
오전에 반 대항 종목이 있다면, 오후에는 청백전.
그리고 그중에서 한설아가 나가는 종목은 계주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