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547화 (548/582)

제547화. 가족의 의미 (18)

“아.”

코트에 멈춰 선 도현은 점수판을 응시했다. 휘릭, 백팀의 점수가 넘어가며, 동시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우아아!”

이유찬이 그대로 도현에게 달려들었다. 땀범벅인 친구가 안는 건 유쾌한 일이 아니었지만, 도현도 이번만큼은 봐주기로 했다.

“우리가 이겼어!”

후반부에 도현이 집중적으로 마크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현의 드리블과 패스 실력이 불안정하다는 걸 안 상대 쪽이 그걸로 공략해 조금 위험했다.

막판에 도현이 3점 슛을 넣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기세가 꺾인 건 백팀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지금 이긴 건 백팀이었고, 승리의 기쁨을 누리기엔 충분했다.

“잘했어! 네 덕에 이긴 건지 너 때문에 질 뻔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칭찬인지 뭔지 모를 말에도 도현은 항변할 수가 없었다.

달리다가 다리 꼬이기. 드리블하다가 공 놓치기. 슛 던지다가 손 미끄러지기 등등. 누가 보면 청팀 스파이라도 해도 믿을 정도의 빌런 짓을 수차례 저지른 게 바로 도현이었기 때문이었다.

점수로 만회했으니 된 거겠지…?

아리송한 기분으로 한참을 같은 팀원들에게 시달린 도현은 가까스로 빠져나와 청팀에게로 향했다.

“재밌었어.”

도현이 향한 상대는, 시합 중 꾸준히 시비를 걸었던 소년이었다.

“어, 나?”

소년의 눈에 지진이 일었다.

도현은 무슨 문제 있냐는 듯 부러 태연히 말했다.

“응. 복도에서 마주치면 앞으로 인사하자.”

“그, 그래.”

그는 처음엔 당황스러워 보였으나, 곧 그 손을 마주 잡았다. 도현은 그 얼굴에 쌓인 불편함이 녹아내리는 걸 보고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은 게임으로 끝내야지.

이후의 사감까지 이어지는 건 사양이었다. 마지막까지 친절하게 웃어 보인 도현은 손을 놓곤 관중석을 살폈다.

그 과정에서 ‘갓도현’, ‘도현님 보우하사’ 등등…. 주접이 적힌 플랜카드를 보고 조금 삐끗하긴 했지만, 그래도 원하는 사람은 금방 찾아냈다.

“완전 멋있었어!”

큼, 도현은 위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단속했다.

“그래?”

“응! 덩크슛 할 땐 진짜 소름이…!”

희운의 장점은 상대를 순수하게 칭찬할 줄 안다는 거였다. 도현은 저도 모르게 들썩거리려는 어깨를 힘겹게 내리눌렀다.

“이러다 우리 반이 1등 할지도 몰라!”

신이 나 말하는 희운에 도현은 부러 덤덤한 척 말했다.

“다음 축구 결승 아니야? 거기서도 이겨야 1등 하지.”

“아….”

희운의 안색이 조금 희게 질렸다.

“…그러네. 지면 어떡하지?”

놀리려고 한 건 맞았는데 갑자기 풀이 죽어버리니 당황스러웠다.  농담이었다고 하려다가, 그 말이 딱히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머리를 굴릴 때였다.

“져도 괜찮아.”

“어?”

“축구 다음엔 계주인 거 알지?”

“어….”

한설아는 평소 풀고 다니던 머리카락을 높게 묶은 채였다. 까맣고 긴 생머리가 날개뼈 부근까지 내려와 찰랑였다.

한설아가 비장하게 말했다.

“네가 지면 내가 이겨서 만회할게.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설아야.”

도현은 어쩐지, 저 둘 사이에 벚꽃잎이 휘날리는 거 같았다. 뭐지. 눈을 끔뻑이자 보이는 건 평범한 운동장 풍경이었다.

방금 뭐였지?

“도, 도현아! 농구 잘 봤어. 이긴 거 축하해.”

“아, 고마워.”

잘못 봤나 보다.

너무 열심히 뛰니 헛것을 본 모양이었다. 고개를 가볍게 저은 도현이 벤치에 널어 두었던 겉옷을 챙겼다. 방금까지 땀을 흘린 탓에 입기엔 더워 팔에 걸칠 때였다.

“그거 안 입을 거면 나 빌려주면 안 돼?”

“이걸?”

도현이 떨떠름하게 시선을 내리자 최민지가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 좀 추워서!”

“…아. 그래.”

날씨가 좀 쌀쌀하긴 했다. 흙먼지가 묻은 곳을 탈탈 털어서 주니 최민지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받았다.

많이 춥나 보네. 도현의 시선이 조금 안쓰러워졌다.

“난 추위 잘 안 타니까 너 괜찮을 때 줘.”

“응. 고마워…!”

최민지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아래로 늘어진 앞머리 사이로 빨개진 얼굴이 보였다. 부끄러움이 많은 친구인 거 같다고 생각하며 다른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수돗가로 몸을 돌렸다. 가볍게 머리만이라도 씻을 요량이었다.

“같이 가줄까?”

“아니야. 설아랑 벤치에 가 있어.”

아니면 설아가 나를 원망할 거 같거든….

도현이 빙긋 웃으며 한 말에 희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게 최민지는 친구를 바로 따라가지 않고 머뭇거렸다. 도현이 안 가냐고 묻고 나서야 발걸음을 떼서, 도현도 한 박자 늦게 본래 목적인 수돗가로 향했다.

시원한 물줄기를 맞으니 조금 개운해지는 느낌이었다. 물론 목덜미까지 씻는 게 전부라 몸은 여전히 찝찝했지만.

그렇다고 학교에서 샤워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적당히 만족하고 머리카락을 털었다. 앞머리를 대충 쓸어 넘긴 채 고개를 드니 하늘이 새파랬다.

‘애들 기다리고 있겠지.’

저도 모르게 미소를 띤 도현이 아이들이 있을 벤치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 * *

“같이 가.”

“네 다리가 짧은 걸 나보고 어떡하라고.”

“아서는 성격이 나빠.”

“뭐?”

앞서가던 헤레이즈가 멈춰 섰다.

그러자 신시아가 기다렸다는 듯 종종 걸어와 옆에 나란히 섰다. 그러고선 왜 안 가냐는 듯이 쳐다봐서 헤레이즈는 헛숨을 내쉬었다.

이상한 여자애.

첫인상부터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마음에 드는 건 온몸에서 생화 향인지, 풀 향인지 모를 향이 나서 다른 사람들보다 가까이 두기에 편하다는 걸까. 적어도 인공적인 향보다는 훨씬 나았다.

나란히 건물 안을 걷던 두 사람은 한 사무실 앞에 멈춰 섰다. 익숙하게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데이먼! 저 왔어요!”

먼저 들어간 건 신시아였다.

발랄하게 콩콩 뛰자, 신시아의 머리카락이 허공에서 붕붕 흔들렸다.

그에 남자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데이먼 컬렌버그.

의 감독이자, 페어리 픽처스의 프로듀서인 그는 어린 조카를 본 삼촌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신시아, 잘 왔어.”

“안녕하세요, 데이먼.”

“헤레이즈도 오랜만이구나. 자, 둘 다 편하게 앉아. 나는 차를 내올 테니.”

두 사람이 익숙하게 소파에 앉는 사이 차를 따른 데이먼이 테이블에 찻잔을 하나씩 내려놓고, 자신도 맞은편에 앉았다.

“새로운 학교는 어떠니?”

데이먼의 시선이 정면을 향했다.

백금발에 청회안을 가진 수려한 외모의 소년, 그리고 호박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소녀는 짙은 와인색 교복을 입은 채였다.

소년은 흰 와이셔츠에 와인색 넥타이, 그리고 바지를 입었고, 소녀는 치마와 일체형인 베스트와 체크무늬 교복 치마를 입은 상태였다. 그 차이를 제외하면 소년과 동일한 디자인의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데이먼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페어리 픽처스 측은 조금 더 원활한 촬영을 진행하는 동시에 어린 배우들의 학업에 지장을 주지 않을 방법을 강구했고, 그 결과로 나온 게 촬영지와 가까운 위치에 있는 기숙 학교에 배우들을 편입시키는 거였다.

다행히 헤레이즈와 신시아는 별다른 항의 없이 의견을 따라주었다. 그들이 학교를 옮긴 지도 벌써 이 주째였다.

그때, 헤레이즈가 입술을 뗐다.

“괜찮아요.”

“음, 그래. 신시아, 너도?”

여자아이는 빠르게 자란다는 말이 신시아에게까지 해당 사항은 아니었는지, 신시아의 키는 여전히 한 해 전처럼 조그마했다. 그러나 이목구비는 더욱 깊어져 요정 같은 인상이 강해졌다.

“네. 좋아요. 잔디도 많고요. 뒤뜰엔 정원도 있어요.”

“하하, 마음에 든 것 같아 다행이다.”

원래 편입은 조금 더 천천히 진행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저 두 사람이 이왕 옮길 거면 빠르게 옮기고 싶다고 해서 초고속으로 절차를 마치게 된 거였다.

새로운 학교에 적응하기 어렵지 않을까 걱정했건만 다행히 그렇진 않은 모양이었다.

“친구들은 사귀었고?”

그 질문에 헤레이즈가 반사적으로 미간을 좁혔다. 수없이 사무실을 들락날락하면서 데이먼과 친분을 쌓은 소년은 조금 아이답게 투덜거렸다.

“다들 관심이 너무 많아요.”

“그럴 법하지. 너는 아서니까.”

“그건 그렇죠.”

이미 몇 년 사이 의 인기를 절절히 체감한 헤레이즈가 순순히 인정했다. 그때, 얌전히 허브차를 홀짝이던 신시아가 입을 열었다.

“데이먼.”

“응?”

“르옌은요?”

“아.”

그녀의 물음에 데이먼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연락해 보려고 했어.”

“걔도 이 학교로 오는 거예요?”

“너희처럼 완전 편입은 아니더라도 교환학생 형식으로 오지 않을까 싶구나. 아직 말은 안 꺼내 봤지만. 아, 둘 중에 말한 사람 있니?”

“전 안 했어요.”

“저도요.”

멀뚱멀뚱, 그 말간 시선에 데이먼은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너희 사이 안 좋은 거 아니지?”

“전 원래 연락을 잘 안 하는 편이에요. 걔가 싫어서 그런 건 아니니 오해하지 마세요.”

감독인 자신 앞에서는 티를 안 내려 하는 것 같긴 했지만, 그가 이 판에서 구른 세월이 헤레이즈의 나이보다 많았다. 진즉 헤레이즈의 성격은 파악한 데이먼이었다.

그리고 그가 파악한 헤레이즈는 까칠하고 예민한 성미였다. 충분히 그럴 법한 일이라 수긍한 데이먼이 고개를 돌렸다.

“그럼 신시아는?”

“으음. 연락은 안 했지만, 텔레파시는 보냈어요. 르옌이라면 받지 않았을까요?”

“…그래, 그렇구나.”

사이가 나쁜 건 아닌 거 같아 다행이긴 한데….

애들이 너무 개성이 강했다.

“데이먼, 이거 먹어도 돼요?”

신시아의 물음에 데이먼은 떨떠름한 기색을 지운 채 부드러이 미소 지었다.

“물론. 먹고 싶은 만큼 먹으렴. 너희를 위해 준비해 둔 거니까.”

“와! 고마워요, 데이먼.”

꼬박꼬박 인사는 잘하는데, 도통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알 수 없는 신시아를 착잡하게 바라보던 데이먼은 한 소년을 떠올렸다.

밤하늘, 초승달, 그리고 서늘한 새벽녘의 공기.

그러한 심상과 함께 운명처럼 찾아온 동양인 소년.

‘…얼마나 컸으려나.’

이맘때쯤 아이들은 눈을 뗐다 하면 자라 있으니.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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