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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부터 월드스타-548화 (549/582)

제548화. 가족의 의미 (19)

삐익-.

거센 호루라기 소리가 경기의 종료를 알렸다. 속눈썹에 달라붙은 땀방울을 대충 닦아낸 소년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신발 사이로 흔들리는 잔디가 괜히 야속했다.

첫 시작 때처럼 양측 팀이 서로 마주 보자, 그 가운데에 선 심판이 청기를 들어 올렸다.

“청팀, 승!”

“우와아아!”

청색 유니폼을 입은 아이들이 서로 얼싸 안고 기뻐했다. 그에 반해 하얀 유니폼을 입은 아이들은 아쉬움을 삼킬 따름이었다.

툭.

“야, 우리도 잘했어.”

같은 팀으로 활동하면서 친해진 소년 한 명이 희운의 어깨를 쳤다. 희운은 고개를 끄덕이며 속상한 낯을 애써 숨겼다.

패잔병이 된 기분으로 벤치로 돌아오니 김병철이 와락 달려들었다.

“흰둥이! 표정이 왜 구랭!”

희운은 어느 순간부터 친구들에게 흰둥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성격이 너무 순한 데다가, 평소 표정이 모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흰둥이와 닮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희운은 턱을 간질이는 김병철을 밀어냈다.

“아냐….”

“에이, 져서 그래? 괜찮아. 대신에 농구는 이겼잖아.”

“그래도.”

“우리 흰둥이가 기운이 없으니 형님 마음이 아프자너.”

과장되게 리액션하는 모습에 어느새 희운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헛웃음이긴 했지만, 아무튼 아련하고 불쌍한 눈망울에서 벗어나기에는 성공했다.

스윽, 그때 희운의 눈앞에 무언가 내밀어졌다. 희운은 초코콘과 그것을 들고 있는 단정한 손가락을 보다가 시선을 올렸다. 도현이 어서 받으란 듯이 초코콘을 살짝 흔들었다.

“학부모님들이 보내주신 거야. 받아.”

“아.”

애들이 뭔가 하나씩 입에 물고 있다 싶었는데, 아이스크림을 받은 거구나. 희운은 고맙다는 말과 함께 초코콘을 받아 들었다.

껍질을 까서 딱딱한 초코 부분을 베어 무니 단맛이 입 안에 퍼졌다. 속상해하던 낯이 풀리는 것을 본 도현이 슬쩍 웃었다.

“흰둥아, 여기 앉아! 곧 계주 시작하… 아, 저기 반장 왔다.”

희운을 부르던 이유찬이 하는 말에 자연히 시선이 돌아갔다. 그곳엔 같이 계주에 나갈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한설아가 있었다.

한설아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체육복 바지를 입고 그 머리카락을 높이 올려 묶은 채였다. 평소 머리카락을 풀고 다니기 때문에 그게 더 낯설게 느껴졌다. 그때 한설아가 이쪽을 쳐다보더니, 비장하게 주먹을 들어 올렸다.

“…푸흡!”

그녀도 축구의 승패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들었을 거다. 그러니 저건, 이전의 약속을 상기시키는 행위였다.

희운은 주먹을 마주 들어 보였다.

이상하게도 방금까지 그를 속상하게 했던 패배가 아무것도 아닌 거 같았다.

멀리서 한설아와 손짓으로 대화하고 있으려니,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희운이 의아한 낯으로 도현을 보았다.

“왜?”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아닌 것치고 굉장히 뜨뜻미지근한 눈빛인데.

찝찝하였으나 그것을 캐묻진 않았다. 그러기엔 도현은 조금 어려운 존재였다. 도현이 제게 아무리 잘해줘도, 다른 애들처럼 평범하게 굴어도 희운은 그가 묘하게 어색했다.

‘내 탓이지, 뭐….’

홀로 운명이라 착각하고 치댔다가 거부당하고 현실을 깨달았으니. 그 상대를 마주하는 게 어렵고 불편한 게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민망하기도 하고….

그래도 싫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희운은 도현이 자신을 특별히, 그러니까 갓 태어난 새끼 사슴을 기특해하는 어미의 눈빛으로 볼 때마다 부담스럽긴 하지만, 은근히 우쭐했다. 저 애는 나만 이렇게 특별하게 대우해, 그런 유치한 우쭐함이었다.

“…아, 이런.”

그때, 작게 탄식한 도현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모조리 소년에게로 쏠렸다.

비단 4반 아이들뿐만 아니었다.

근처에서 수다를 떨고 있던 다른 반 아이들의 눈동자까지 한곳을 향하는 걸 본 희운은 어깨를 살짝 떨었다. 저 애들이 모두 대화하면서도 어느 쪽으로 신경을 쏟고 있었는지 너무 명확해서.

한편 그런 것들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듯, 오직 희운만을 쳐다본 도현이 눈매 끝을 늘어트렸다.

“받아야 하는 전화가 와서 잠깐 자리 좀 비울게. 돌아오기 전에 경기 시작하면… 음, 내 몫까지 응원해줘.”

“아…! 알았어.”

습관적으로 작게 웃은 도현이 곧 자리를 떴다. 희운은 그 뒷모습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받아야 하는 전화면 소속사에서 온 거려나? 뭘까. 새로운 작품? 아니면 스케줄?

“계주 제자리로!”

그러한 생각들은 곧이어 시작한 계주로 인해 해변가의 모래처럼 밀려났다. 희운의 눈이 소녀를 찾았다. 아, 저깄다.

한설아는 세 번째 순서인지 뒤편에 서서 몸을 풀고 있었다. 체육대회 진행위원들이 선수들이 달릴 루트를 확인하고, 첫 줄에 선 이들에게 배턴을 나누어 주었다.

“오, 시작하나 봐!”

아이들이 저마다 기대 어린 목소리를 내었다. 희운도 주먹을 말아 쥐었다.

신호총을 든 체육 선생님이 팔을 높이 들어 올렸다. 첫 줄에 선 아이들이 저마다 준비 자세를 취하고….

-탕!

“와아아아!”

모래바람과 함께 첫 번째 주자들이 달려 나갔다.

“와, 대박 빨라.”

“두 번째 줄 누구야? 미쳤네.”

두각을 드러내는 건 두 번째 레일에 선 소녀였다. 한설아가 선 줄은 네 번째였기 때문에 희운은 괜히 속이 탔지만, 크게 불안하지는 않았다. 아직 첫 번째일 뿐이니까.

첫 번째 주자는 삼 등으로 들어와 배턴을 넘겼고, 두 번째 주자가 곧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어, 어! 제친다!”

두 번째 주자는 이를 악물고 달리는지, 놀라울 만큼 빨랐다. 이 등을 제치고 일 등의 뒤에 바짝 따라붙자 4반 아이들이 벤치에서 엉덩이를 떼며 열성적으로 응원을 쏟아냈다.

엎치락뒤치락. 손에 땀을 쥐게 했지만, 결국 또다시 일 등을 거머쥔 건 두 번째 줄이었다. 배턴을 넘겨받은 한설아가 고무공처럼 튕겨 나갔다. 두 번째 주자가 이 등을 제칠 때까지만 해도 벤치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던 희운이 벌떡 일어났다.

하얀 다리가 길게 뻗어져 성큼, 앞으로 나아갔다. 이마를 덮고 있어야 할 앞머리는 하염없이 공중을 부양하다 이제는 시원하게 넘어간 상태였다.

“제발!”

그 순간, 턱에 주름이 잡힐 만큼 힘을 준 한설아가 앞으로 달려 나갔다. 어어어, 아이들이 탄식인지 감탄인지 모를 소리를 내었고.

“이, 일 등!”

“미쳤다, 한설아악!”

끝내 한설아가 일 등보다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갔다. 소리를 바락바락 질러대는 아이들과 다르게 희운은 넋을 놓고 서 있었다.

“일 등! 일 등 시발!”

옆에서 거칠게 환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면서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상태였다. 아직 마지막 주자가 남아 있으니까.

네 걸음. 한설아와 마지막 주자 사이에 네 걸음이 남았다. 세 걸음, 두 걸음, 한설아가 손을 멀리 뻗었고….

“!”

마지막 주자는 성공적으로 배턴을 넘겨받고 달려 나갔다. 그러나 희운은 거기에 시선을 둘 수가 없었다.

“설아 어떡해!”

배턴을 넘겨주다가 삐끗한 한설아가 그대로 넘어졌기 때문이었다.

“다쳤나 본데….”

이유찬의 중얼거림이 유독 크게 귀에 박혔다. 한설아는 이유찬의 말처럼 다쳤는지 절뚝거리면서 일어났다. 무릎에 새빨간 피가 몽글몽글 맺히는 게 보였다.

어, 어떡하지? 가서 부축해야 하나?

저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거리던 희운은 한 발짝을 내딛기 전, 최민지가 튀어 나가는 것을 보았다. 최민지는 화다닥 달려 나가 한설아를 부축해 주었다.

입술 사이로 소리가 튀어나왔다.

“아….”

안도인지, 혹은 안타까움인지 모를 탄식이었다.

한설아는 최민지와 무언가 대화를 나누는 듯하더니, 마지막 주자가 일 등으로 도착하는 것을 보고선 자리를 떴다. 주위는 시끌벅적했지만, 희운은 자꾸만 한설아가 사라진 방향이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도현이 돌아온 것도 한 박자 늦게 알았다.

“도현쓰! 왜 이제 와!”

“미안, 전화가 오래 걸려서…. 경기는 어떻게 됐어?”

이유찬이 호들갑을 떨며 도현을 반겼다. 그가 잔뜩 신이 난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 일 등이야!”

“진짜?”

도현의 눈이 조금 동그래졌다가 곧 기분 좋게 휘었다.

“응, 근데 반장이 넘어졌어.”

“뭐? 다쳤어?”

“무릎이 까진 거 같던데. 최민지가 데리고 보건실 갔어.”

“아….”

눈썹을 찌푸린 도현이 시선을 돌려 희운을 찾았다.

“괜찮은지 봤어?”

“어? 나?”

바보 같은 물음에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희운은 얼떨결에 답했다.

“아니.”

“그럼 나랑 같이 보건실 가 볼래?”

“보건실…?”

“응, 네가 부반장이잖아. 나도 설아 걱정되고.”

그래, 도현의 말이 맞았다.

희운은 부반장이었고, 반 아이들의 건강을 확인할 의무가 있었다. 물론 한설아는 반장이었지만…. 아, 몰라. 도현도 걱정된다잖아. 희운이 벤치에서 훌쩍 내려와 운동장에 섰다.

“가자.”

도현은 자신이 제안해 놓고선 묘한 눈으로 희운을 보다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함께 보건실로 향했다.

그사이 희운은 경기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한설아가 어쩌다 넘어졌는지 알려주었다. 다 들은 도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 달리고 넘어진 걸 대단하다 해야 할지….”

그러고 보면 도현과 한설아는 굉장히 친해 보였다. 작년에도 같은 반이었고….

“네가 같이 가 줘서 다행이야.”

“왜?”

“작년에 나랑 설아 사이 의심하는 애들이 많았거든. 근데 우리는 그냥 친구 사이라서.”

곤란한 표정을 지은 도현이 고개를 내저었다.

“또 혼자 보러 갔으면 말 나왔을걸.”

둘이 친구 사이였구나.

은근한 기류라도 있지 않을까, 내심 생각했던 희운은 아니라는 사실에 놀랐다.

“그랬구나….”

끄덕끄덕,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자 도현이 웃었다. 희운은 그 이유를 몰라 눈만 깜빡였다.

“아냐. 아, 그리고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

“음….”

곧장 말을 꺼내지 않고 슬쩍 하늘을 보던 도현이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소년의 얼굴 골격에 따라 음영이 졌다. 다물린 입술이 열리며 예상치 못한 질문이 날아들었다.

“내가 다른 학교에 가면 어떨 거 같아?”

* * *

드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에 보건실 안에 있던 두 소녀의 눈이 문가로 향했다.

먼저 들어온 소년이 두어 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뒤에서 갈색 머리카락이 빼꼼 보였다. 두 쌍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도현에, 정희운까지?

도현은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한설아에게 다가갔다.

“설아야, 다쳤다며.”

“아, 넘어져서…. 넌 왜 온 거야?”

“너 보려고.”

“나?”

“응. 다쳤다니까 걱정되잖아.”

순간 뭉클한 표정을 짓던 한설아는 곧 어색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그녀가 머뭇머뭇 말했다.

“그럼 뒤에….”

“희운이도 네가 걱정된대서 같이 왔어.”

“진짜?”

놀람이 묻어난 목소리에 괜히 억울해진 희운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한설아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둘 다 고마워.”

희운이 별거 아니라 말하기 전에 높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난 또, 너 다친 줄 알고 깜짝 놀랐잖아.”

어느새 한설아의 옆에서 도현의 옆으로 이동한 최민지가 아프지 않게 도현의 팔을 쳤다.

“그랬어?”

“응, 진짜 놀랐어!”

꺄르르, 도현이 별말 하지도 않았는데 최민지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텐션이 확 높아진 채였다.

희운은 그런 최민지를 보다가 커튼을 걷은 보건실에 그림처럼 서 있는 소년을 보았다. 단순히 거기에 있기만 해도 특별하게 느껴지는 무언가가 그에게는 있었다.

- 내가 다른 학교에 가면 어떨 거 같아?

어떨 거 같냐고?

“걷는 데는 문제없어?”

“응. 그냥 쓸린 거뿐이야.”

“그나마 다행이네. 그래도 조심해. 아프면 말하고.”

도현의 말에 한설아가 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휘저었다.

“왜, 업어주게? 아서라. 또 무슨 얘길 들으려고.”

“나 말고 희운이가 업으면 되지.”

“야, 무슨…!”

힐긋, 한설아가 제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음에도 희운은 반응할 수가 없었다.

‘모르겠어.’

그저, 그 말을 들은 순간 어딘가 덜컥 내려앉았단 것밖에는.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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