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9화. 가족의 의미 (20)
“혼자 걸을 수 있어?”
“아, 됐다니까!?”
절뚝이며 복도를 걸어가던 한설아가 질겁했다. 그럴수록 도현은 더욱 싱글생글 웃었다. 은근히 성격이 나빴다.
최민지는 그런 한설아를 부러운 눈초리로 보고 있었다. 놀리는 걸 알면서도, 도현이 친근하게 구는 게 부러운 모양이었다.
건물을 나와 조금 걷자, 운동장이 보였다.
“어, 써라!”
김병철이 멀리서 걸어오는 네 인형에 벌떡 일어났다. 그에 평소 한설아와 친분이 있던 여자아이들이 달려와 한설아의 주변을 둘러쌌다.
“설아야, 괜찮아?”
“피 많이 나던데. 많이 안 다쳤어?”
걱정 어린 목소리에 한설아가 웃으며 일일이 대답했다. 도현은 자연스럽게 그 무리에서 몇 걸음 떨어진 채였다. 희운은 이유찬과 김병철이 있는 쪽으로 가려던 도현을 반사적으로 붙잡았다.
난데없이 옷깃이 당겨진 도현이 뒤를 돌아보았다. 희운은 당황하여 손을 풀었다. 살짝 올라갔던 상의가 스륵 내려갔다.
“왜?”
그 표정이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너무 여상해서 희운은 기분이 이상했다.
“언제.”
“응?”
“언제 가는데?”
도현은 떠난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러면 어떨 것 같냐고 물어본 것뿐이었다. 하지만 희운은 묘한 직감이 들었다.
얘는 갈 거야.
어디서 기인한 직감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어쩌면 너무 동물적인, 본능의 영역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게 무엇이든 희운은 확신했다.
도현이 떠날 생각을 하고 있음을.
“…으음.”
도현은 당황하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화를 듣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한 소년은 희운에게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왔다.
전교생이 모인 운동장이었다. 그리고 일부, 아니, 꽤 많은 시선이 이쪽을 향해 있었다. 희운의 앞에 있는 소년은 늘 관심의 한가운데에 있는 존재였으므로.
그런데도 희운은 도현이 홀로 붕 떠 있다고 느꼈다.
“아마, 중간고사 끝나고.”
“…….”
“확실친 않지만.”
그러니까 내가 처음부터 도깨비불 같다고 했잖아.
어두운 숲속에 제멋대로 나타나서 주변을 맴돌더니 손을 뻗으려니까 휙 하니 사라지는 게.
희운은 조금 가라앉은 기분으로 셈해보았다. 자신이 도현에게 가지 말라고 부탁할 위치가 되는지. 그런 사이인지.
답은 금방 나왔다.
머릿속에 떠오른 선명한 정답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 희운은 애써 사고 회로를 돌렸다. 그리고 가까스로 용건을 생각해냈다.
“나한테 알려 주겠다고 한 건?”
“아, 그거.”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기 전에 주고 갈 수 있을 거 같아.”
“뭐를?”
의아한 물음에도 도현은 웃음으로만 대답을 대신했다. 더 말할 생각이 없는 듯, 가자, 라는 부드럽고도 단호한 말과 함께 벤치로 몸을 돌렸다.
희운은 어쩐지 도현이 그대로 멀어져 버릴 거 같았다.
따라잡지도, 부르지도 못한 채 멀거니 서 있는데 문득 소년이 뒤를 돌아보았다.
“안 와?”
당연하다는 것처럼 묻는 말에 갑자기 속이 탁 풀렸다. 으응, 지금 가. 희운은 탁탁 뛰어서 도현의 옆에 가서 섰다. 도현은 희운이 그 자리에 올 때까지 가만히 서서 기다려 주었다. 희게 웃으면서.
그 옆까지 달리면서 불현듯이 깨달았던 거 같다.
따라잡으려 달리면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게 그 애의 다정함이라는 걸.
한층 찬기가 가신 바람이 귓가를 간지럽히며 지나갔다. 드르륵, 마지막 창문까지 모두 연 희운이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의자를 빼내어 자리에 앉은 희운은 텅 빈 교실을 보다가 뒤를 돌았다. 책상은 아무것도 없이 비어 있었다. 이어폰을 끼고 조용히 책장을 넘기는 소년 또한 없었다.
이틀 전, 도현은 떠났다.
생각처럼 영영 떠난 건 아니었다.
잠깐 촬영을 위해 해외 기숙 학교에 유학을 다녀온다고 했다. 잠깐만 기다리면 되는데, 그 잠깐이 낯설게 다가와 속이 허했다.
“…책이나 읽자.”
고개를 턴 희운은 책상 서랍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언젠가, 도현이 읽는 걸 보고 도서관에 가서 빌렸던 책이었다. 더듬더듬, 서랍 안을 배회하던 손끝에 무언가 걸렸다.
뭐지?
희운은 무의식중에 그것을 꺼내었다. 맨들맨들하고 새카만 상자였다. 어, 내 건 아닌데?
누가 잘못 넣어두었나, 싶었던 희운은 주인을 찾아 주어야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상자 표면을 둘러봐도 이름이 보이지 않아, 희운은 조심스레 상자 뚜껑을 열었다.
달칵, 작은 소리와 함께 보인 건 얇은….
“음반?”
비닐도 뜯지 않은 새 음반이었다.
희운의 낯에 순간적으로 반가움이 떠올랐다. 또래 아이 중에서 음반 모으는 취미를 가진 애는 흔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어쩌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조금 설렘을 담고 음반을 살펴보았다. 재킷에 그려진 개나리.
개나리 맞나? 피다 만 앙상한 노란 꽃이 나뭇가지에 방울방울 달려 있었다. 그 그림이 어쩐지 마음에 든다고 생각하며 연주자의 이름을 찾았다.
음반을 앞뒤로 뒤집어보던 손짓이 뚝 멎었다. 입술 사이로 희미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H?”
* * *
- 잘 고민해 봐, 도현.
이윽고 짓궂은 목소리가 따라온다.
- 하지만 내가 알던, 밤을 새워서 두꺼운 소설책을 모조리 읽어오던 그 소년이라면 어쩐지 답을 알 것 같네.
“…날 너무 잘 알잖아.”
도현은 한탄처럼 말했다.
부정할 수 없었다.
처음 유학 얘기를 꺼냈을 땐 당혹스러웠으나, 그로 인해 촬영 일정이 얼마나 원활히 진행될 수 있는지 듣고 나자 마음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평평하던 저울은 어느새 한쪽만 무거워져, 바닥에 닿을 지경이었다. 그 위에 앉은 도현이 또다시 무거운 숨을 쉬었다.
, 음반, 소속사, 희운, 부모님, 동생…. 닮은 듯, 다른 것들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미국 갔다 온 지 얼마나 됐다고.
음반을 만들고 싶다고 무작정 미국으로 가더니, 이번엔 영화를 찍겠다고 또다시 그곳에 가길 원하고 있다. 스스로 생각해도 답 없는 불도저였다.
도현은 소거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일단 . 그건 가면 해결되는 거니 미뤄두고. 한주애 감독과 찍기로 한 영화도 올 하반기나 내년 초니, 적당히 일정을 조율하면 될 일이다.
‘다음 소속사…는, 아빠한테 맡기면 되고.’
의외의 편리함을 깨우친 도현은 거침없었다.
그리고 음반.
음반의 발매 일정은 슬슬 구체화되고 있었다. 대략 5~6월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얼마 전에 연락한 스테파노스가 음반을 찍는 대로 보내 주겠다고 했다. 발매보다 먼저 받아볼 테니, 떠나기 전에 받게 될 거 같았다.
그럼… 떠나기 전에 희운에게 음반을 건네면 되겠지.
내심 잘됐다는 생각도 있었다.
‘떠나기 전날 건네주고 비행기를 타 버리면 설명할 일도 없을 거 아니야.’
비겁한 걸 알아도, 그걸 희운에게 설명할 생각을 할 때마다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도현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아마도, 음반을 들었을 미래의 희운에게도 필요할 테지.
다 변명이고 핑계란 걸 인지함에도 도현은 외면했다. 그는 희운에 관한 생각을 지우고 이번엔 부모님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금방 바람 빠진 풍선처럼 시들해졌다.
- 동생 때문이었어. 너를 미국에 보내지 않으려고 한 건. 우리가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으니까.
“…어떻게 말해.”
그렇게 강행해서 진의 집에 머물다 왔으면서 이번엔 아예 미국에 있는 학교에 가겠다고. 그것도 기숙 학교를?
‘진짜 미치겠네.’
풀썩, 도현이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새카만 머리카락이 베개 위로 흩어졌다. 그 상태로 멍하니 이마를 비비던 도현은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흠칫했다.
…왔다.
생각은 온통 꼬였으면서 발은 착실히 현관으로 향하고 있었다. 부모님이 퇴근할 때마다 맞이하던 습관이 만들어낸 현상이었다.
“오늘 체육대회라며. 벌써 왔어?”
“뒤풀이가 일찍 끝나서요.”
집중이 안 돼서 먼저 나온 거지만.
“그래? 저녁 먹기 전에 올지 안 올지 몰라서 네가 좋아하는 걸로 사 왔는데 다행이네.”
서헤나가 한 손에 든 피자를 흔들었다.
“피자 사 왔어. 네가 좋아하는 하와이안 토핑 얹어서.”
“저 주세요. 거실에 둘게요.”
“고마워.”
두 사람이 안방에 들어가는 것을 본 도현은 거실 테이블에 피자를 펼쳐두고, 주방에서 앞접시와 식기를 가져왔다. 자신이 마실 콜라와 부모님이 마실 캔 맥주 또한 테이블 위에 두었다.
그사이 씻고 나온 서혜나가 완벽히 차려진 상을 보고 고맙다며 도현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그날 이후로, 이런 스킨십이 는 서혜나였다.
도현은 아직도 어색하였으나 피하진 않았다. 가끔은 서로의 체온이 맞물려 만들어지는 온도가 안정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었다. 아주 가끔이지만.
“자, 도현이 거.”
갓 사 온 피자의 치즈가 주욱 늘어났다. 그러고선 쳐다보는 게, 체육대회가 어땠는지 이야기를 풀어주길 기대하는 거 같았다.
도현은 앞접시에 담긴 피자를 포크로 쿡쿡 찔러보다가, 툭 말했다.
“오늘 데이먼 감독님한테 연락이 왔어요.”
“데이먼 씨?”
기대했던 것과 다른 얘기에 의아하면서도 이장혁은 무슨 용건이었냐고 물었다. 쿡, 쿡. 피자에 애꿎은 포크 구멍을 내던 도현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유학을 권했어요.”
“…큽!”
도현이 따로 꺼내 온 무알콜 맥주를 마시던 서혜나가 콜록거리며 휴지를 찾았다. 이장혁이 급히 휴지를 건네주었다. 겨우 수습한 서혜나가 조금 붉어진 눈으로 도현을 보았다.
“유학이라고 한 거 맞아?”
“네. 헤레이즈랑 신시아는 이미 편입했대요. 저는 부담스러우면 그럴 필요까진 없고, 교환학생 형식으로 처리해 주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절차는 걱정할 필요 없댔어요. 몸만 오면 된다고.”
“…그, 근데 왜?”
“어린 배우들이 많다 보니까 학업적인 부분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나 봐요. 마침 촬영장 근처에 기숙 학교가 있어서…. 촬영 중엔 그 학교에 다니면 좋지 않겠냐고 말씀하셨어요.”
“아….”
피자 냄새가 가득한 거실에 정적이 차올랐다. 다 먹고 말할 걸 그랬나. 캔 맥주를 타고 흐르는 물방울이 괜히 처연해 보였다.
“…음, 이미 결정한 거니?”
“아니요. 저도 오늘 낮에 막 들었는걸요.”
그 대답에 두 사람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도현은 그 반응에 덩달아 놀라 눈을 굴리다, 문득 제 대화 방식이 늘 통보에 가까웠다는 걸 깨달았다.
“그럼 어떻게 하고 싶은데?”
“전….”
주저하던 도현이 입술을 열었다.
“제 마음은, 가고 싶어요.”
부모님은 별로 놀란 것 같지도 않았다.
데이먼처럼, 도현의 선택을 당연히 아는 듯이.
도현은 그에 힘입어 솔직히 말했다.
“다른 문제는 잘 모르겠어요. 근데 저는 제가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음반은 저로서, 이도현으로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면, 이번엔 그 영화의 배우로서요.”
“그래, 그렇구나….”
태연한 척하지만 두 사람 얼굴에 떠오르는 시름이 보였다. 걱정하는 거겠지. 기숙 학교에서 홀로 지낼 자신을, 그리고 떨어져 있을 우리 가족을.
이젠 알겠다. 부모님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도현은 생각에 잠긴 두 사람을 보다가, 천천히 서혜나의 배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건 충동이었다.
“…만약 가게 되더라도.”
어쩌면, 마음속 깊이 품었던 결론이었을지도 모르고.
“거기서 동생 이름 같이 고민할게요.”
그것이 뭐든, 입 밖에 나온 순간 언어는 느슨한 속박이 된다. 도현은 그 덫 안에 스스로 발을 들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