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0화. The bower lake school (1)
어깨 사이에 핸드폰을 끼운 도현이 우편물을 뜯었다. 책자를 포장한 흰색의 비닐까지 제거하고 나자 전면에 학교 이름이 박힌 팸플릿이 보였다.
“네, 받았어요.”
- 잘 도착했나 보네. 천천히 확인해 보렴. 아, 5월에 가게 되면 7학년으로 들어가게 될 거야.
“몇 학년부터 있는데요?”
- 7학년부터 12학년까지 다녀. 참고론 신시아는 너랑 같은 학년이고 헤레이즈는 8학년이야.
도현은 그의 설명을 들으며 눈으로 팸플릿을 훑었다. The bower lake school. 그 이름대로 팸플릿 표지의 사진에는 배경으로 커다란 호수가 자리해 있었다.
“학교가 굉장히 넓어 보이네요.”
- 외곽이라서 캠퍼스 부지가 200에이커인가, 그랬을 거야. 지내기에 나쁘지 않지.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닌데요, 그건.”
한국에 있는 대학교 캠퍼스의 크기가 보통 100에이커 정도인 걸 생각하면 역시 땅이 넓긴 넓구나 싶었다. 감탄 어린 목소리에 데이먼이 낮게 웃었다.
- 우리 영화의 주역들인데 당연히 좋은 학교에 다녀야지.
그는 곧 다정한 어조로 말했다.
-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거 안단다. 이쪽에 오기를 선택해줘서 고맙구나.
“…복잡한 일은 데이먼이 모두 처리해 줬는걸요. 저는 그냥 몸만 이동하는 건데요.”
- 그래도 사는 곳을 옮기기란 쉽지 않지. 특히 친구들이 중요한 나이 때엔 말이다.
발레 공연장에서 처음 만났던 남성은 상당히 예민하고 피로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피로해 보이는 건 여전하지만, 도현은 이제 그의 예민함이 섬세한 다정함이라는 걸 알았다.
- 하지만 너는 여기서도 잘 지낼 거란다. 내가 장담하지.
“그걸 데이먼이 어떻게 알아요?”
조금 웃으며 묻자, 데이먼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 넌 르옌 누바라잖니.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된 말이었다. 도현은 다시금 웃음을 터트렸다. 그들은 조금 더 대화를 나눈 후 통화를 마무리했다.
핸드폰을 테이블에 내려둔 도현은 팸플릿을 펼쳤다.
The bower lake school은 L.A. 근교 작은 마을에 있는 기숙 학교였다. 첫 장을 펼치자마자 보이는 커다란 캠퍼스 지도에 도현은 작게 감탄했다.
그 넓은 부지만큼 학교의 시설은 다양했다.
과학실, 실내 체육관, 테니스코트, 운동장, 기숙사 같은 일반적인 시설부터 연극과 뮤지컬, 혹은 오케스트라를 올리는 전용 극장과 온실, 개인 음악 연습실, 녹음 스튜디오, 승마장….
“…천문대?”
학교에 천문대가 왜 있지.
조금 놀라웠다.
한 장, 한 장, 팸플릿을 넘기자 기숙사 사진이 나왔다. 기숙사는 네 개의 동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 동마다 이름이 있었다. 그리고 방은 2인 1실이었다.
“2인 1실….”
도현은 그 단어를 꽤 낯설게 읽어 내렸다.
지금껏 방을 혼자 쓰는 게 당연했는데…. 물론 방이 넓어서 공간 때문에 불편하진 않을 거 같지만, 누군가와 같이 산다는 것 자체가 어색했다.
잘 지낼 수 있을까.
복잡한 낯을 하던 도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잘 지내야지. 결정 난 거니까.
이미 가연 예술 중학교와 새로운 기숙 학교 간의 조율은 오가고 있었다. 넌 몸만 오면 된다던 데이먼의 장담대로 도현이 관여해야 할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저 숨만 쉬어도 일은 착착 진행되어 갔다.
그러나 절차 외의 일은 도현의 몫이었다.
예를 들어, 학교 친구들에게 유학 소식을 알리는 것 같은 일들.
도현은 아직 친구들에게 교환학생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한국 소속사 측도 빨리 말하기보단 일주일 정도 전에 밝히길 권했다.
도현의 유학 소식이 단순히 친구들 사이의 파란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기사와 갖가지 이슈로 퍼질 게 너무나 뻔했기 때문이었다.
정말 친한 친구들한테는 먼저 말해도 괜찮아.
매니저 형이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복잡한 낯을 하던 도현은 현관 벨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배달 기사로 보이는 이가 문 앞에 상자를 내려두는 게 인터폰으로 보였다. 그가 가기를 기다린 도현은 인형이 사라지고 난 뒤 현관문을 열었다.
부모님이 시킨 택배일까? 크게 호기심 없이 택배를 들어 올린 도현은 송장에 쓰인 이름에 눈을 크게 떴다.
Stefanos Minaur.
“…스테파노스?”
도현은 아무 생각 없이 품에 안았던 택배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제법 무겁다고 생각했던 무게가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조금 다급한 몸짓으로 방에 들어온 도현은 그것을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칼, 커터 칼. 중얼거리면서 커터 칼을 찾은 도현이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테이프를 잘랐다. 옆 부분까지 꼼꼼히 자른 후 도현은 느린 손길로 상자를 열었다.
이윽고 드러난 내용물에 까만 동공이 확장되었다.
“…와.”
도현은 의미 모를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리고 한참을 그 상태로 가만히 있었다. 도현이 다시 움직인 건 몇십 초가량이 흐른 후였다.
흰 손가락이 금방 부서질 꽃잎을 다루듯이 물건을 조심조심 집었다. 누가 보았더라면 딱딱한 물체가 아니라 갓 태어난 병아리 새끼를 잡는 줄 알 정도로 무척 신중한 손짓이었다.
이내, 완전히 꺼낸 도현은 그것을 제 눈높이만큼 들어 올렸다. 모양 좋은 입술이 작게 달싹였다.
“덜 핀 개나리….”
매끄러운 재질에 그려진 그것은 도현이 익히 아는 것이었다. 당연했다. 도현이 그린 거니까.
도현은 제가 그렸던 것이 기어이 음반의 표지가 되어 나타난 것을 보고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이걸 무슨 기분이라고 해야 하지. 싱숭생숭하고, 아주 이상했다.
그런 와중에도 도현은 해야 할 말을 잊지 않았다.
“개나리 덜 피었어요.”
“…….”
당연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딱히 기대하지도 않았기에 도현은 실망하지 않았다. 대신, 강조하듯 두어 번 더 말했다. 개나리 아직 꽃봉오리 상태예요. 덜 피었어요.
만족스러울 만큼 중얼거리고 나서야 도현은 음반과 함께 바닥에서 일어났다.
팸플릿을 뜯던 손길보다 훨씬 정성 들여 포장지를 제거한 도현은 부모님이 사준 LP 플레이어에 음반을 끼웠다. 톤암을 밀고 버튼을 누르자 레코드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악마의 트릴이 쏟아져 내린다. 그 강렬한 여운이 끝나기도 전에 또다시 몰아치는 크로이처 소나타, 숨이 가빠올 때쯤 달래듯이 흘러나오는 사랑의 슬픔, 멜로디… 그리고 달빛까지.
창문에 비친 소년은 방을 가득 채운 바이올린 소리가 멎을 때까지 턴테이블 앞에 서 있었다. 그대로 박제된 정물처럼 움직이지 않고 고요히.
* * *
“아! 이도현 또 만점이야!”
시험지를 맞춰보던 김병철이 성질을 부렸다. 도현은 익숙하게 그의 인성질을 무시했다.
“저기, 듣고 계세요? 인생 그렇게 혼자 사니까 좋으시냐구요.”
“혼자라니. 사람은 혼자 못 살아.”
정론에 김병철이 얼척 없는 표정을 했다. 도현은 가만히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한차례 체육대회로 들썩였던 가연예중은 곧이어 중간고사 기간을 맞이했다. 체육대회로 인해 시험을 잊고 있던 아이들이 고통을 호소했지만, 그래도 시험 날짜가 바뀌는 일은 없었다.
승리를 가져간 백팀도, 패배한 청팀도 하나같이 서글픈 낯으로 중간고사를 맞이했다. 시간은 그렇게 하루하루 흘러, 어느새 시험 이틀 차가 되어 있었다.
“아, 이제 하루만 더 지나면 끝난다.”
“내 인생은 이미 끝났는데.”
시험지를 붙든 이유찬이 음울하게 말했다. 아이들은 차마 그에게 몇 점이냐고 묻지 못했다.
시끌시끌한 아이들 속에서 도현은 웃다가, 문득 한설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웃었다.
평소라면 즐거웠을 테지만, 이번엔 심경이 복잡했다.
‘내일이 지나면 말해야겠지.’
사실, 한설아와 서일준에게는 미리 말할까 싶었다. 도현이 이 학교에 와서 사귄 제일 친한 친구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시험 기간이 겹친 게 문제였다. 혹시나 이게 아이들에게 충격을 주어 시험 준비에 지장이 생길까 싶어서…. 뭐, 너무 과민한 생각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니 안 그래도 시험으로 힘들어하는 애들에게 문제를 얹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도현은 유학까지 대략 일주일이 남은 시점까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
…아, 희운에게는 했구나.
도현의 시선이 한창 시험지를 채점하고 있는 희운에게 닿았다. 막 한 개를 틀렸는지, 순한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희운이 제 시험지를 들고 뒤를 돌아보았다.
“도현아. 이거, 23번 문제 진짜 4번이야?”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도현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아닌 건 아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희운의 얼굴이 수심에 젖었다.
“몇 개나 틀렸는데?”
“두 개….”
“이 기만자 새끼.”
옆에 있던 이유찬이 치를 떨며 희운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김병철이 워워, 하며 이유찬을 말렸다.
“우리 흰둥이한테 무슨 험한 소리야.”
그러면서 희운을 감싸는 꼴이 웃겼다.
김병철은 의외로 무척이나 희운을 마음에 들어 했다. 흰둥이라는 별명을 붙여준 것도 그였다. 도현은 그런 김병철을 보다가 생각했다.
내가 없어도 잘 지낼 수 있겠네.
도현의 생각대로, 희운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었다. 작년이 이상했던 거지. 이제 그가 없어도 희운은 즐거운 학교생활을 즐길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도현은 이제 다른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음반은 언제 주지.’
음반이 도착한 지 벌써 이 주 넘게 흘렀다. 도현은 그 이 주간 희운에게 음반의 ‘ㅇ’ 자도 꺼내지 못한 상태였다.
내가 이렇게 겁이 많았나, 싶다가도 내가 그럼 그렇지, 라는 생각이 뒤이어 따라왔다. 도현은 가벼이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은 시험 기간이니까.
하루 남은 유예에 속이 탔지만, 도현은 애써 태연함을 가장했다.
아직은 시간이 있었으니.
그러나 다음 날도 비슷했다.
“우오아아아악!”
“도비는 자유예요!”
책상 위에 올라가서 퍼레이드를 벌이는 아이들에 도현은 따라 웃지 못했다. 그런 도현에 아이들이 어깨를 잡고 흔들어댔다.
“피시방 가자, 피시방!”
“노래방도! 떡볶이도!”
…이렇게 기뻐하는데.
여기서 말을 꺼냈다간 분위기를 망쳐버린 주범이 될 거 같았다. 도현은 또다시 말을 삼켰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