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551화 (552/582)

제551화. The bower lake school (2)

“그럼 조례는 여기까지 하고. 시험 끝났다고 풀어지지 말고 오늘 수업 잘 들어라.”

아이들이 불평불만을 쏟아내자 담임 선생님이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너희가 시험이 끝났지, 인생이 끝났냐? 그렇게 핀잔을 주면서도 결국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내저은 그는 교탁을 벗어나기 전 도현을 응시했다.

“도현이는 선생님 따라올래?”

“네.”

단정히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호기심 어린 시선이 여기저기서 날아들었다. 도현은 그것을 못 본 척, 선생님의 뒤를 따라 앞문으로 교실을 빠져나왔다.

도현이 옆에 서자 선생님이 부드럽게 물어왔다.

“중간고사는 잘 본 거 같니?”

“평소랑 비슷해요.”

“다 맞았단 소리구나. 참 신기해. 우리 학교에서 제일 바쁜 애가 성적도 제일 좋으니….”

대답할 말이 없었던 도현은 작게 미소 지었다. 두 사람은 교무실에 들어섰다. 도현이 들어오자 선생님들의 시선이 쏠렸다. 어딜 가나 쳐다보는 건, 학생이나 선생님이나 다를 바 없었다.

“자, 여기 앉아.”

그는 도현에게 자리를 권하곤 자신도 의자에 앉았다. 책상을 조금 뒤적거리던 그는 한 바인더를 꺼내어 서류를 건넸다.

“교환학생 절차는 다 밟았어. 그 학교에서 있는 시간만큼 우리 학교에서도 학업 인정될 거야.”

유학을 떠났다고 무조건 한국에서도 학업 이수가 인정되는 건 아니었다. 학교 간의 조율이 필요한데, 잘 풀린 거 같았다. 도현은 서류를 받아 들었다.

“네가 아직 중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상태라서 7학년으로 가게 될 거 같아. 그 외의 건 그 서류 잘 읽어보고.”

“네, 감사합니다.”

받아든 서류를 잘 갈무리하는데 선생님이 한숨을 내쉬었다. 도현은 반사적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조금 시름 어린 얼굴이었다.

“솔직히 보내고 싶지 않구나. 우리 반 성적 평균 일등 공신인데…. 네가 가면 이제 우리 반 평균은 누가 책임지지.”

“…아.”

도현이 당황한 눈초리로 보자, 한숨을 푹푹 내쉬던 선생님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장난이란다. 내 학생이 꿈을 펼치러 간다는데 응원해 줘야지. 뭐, 그래도 보내고 싶지 않다는 말은 진심이야. 너는 내 반 학생이니까.”

그곳에서도 잘 지냈으면 좋겠구나. 따뜻한 격려의 말에 침묵하던 도현은 입을 열었다.

“그럴게요. 감사합니다.”

“아니야. 아, 그러고 보니 반 친구들한테는 말했니?”

“아직이요.”

“아직도?”

그 반문에 도현은 변명처럼 말했다.

“시험 기간이었으니까요. 애들이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역시 착하네.”

흐뭇한 눈으로 도현을 보던 선생님이 말했다.

“그래도 오늘은 말하렴. 일주일은 이별을 준비하기에 짧은 시간이니까.”

시선을 아래로 늘어트린 도현은 한 박자 늦게 답했다.

“그렇게 할게요.”

“도현아, 안녕!”

“응, 안녕.”

복도를 지나가자 몇몇 아이들이 인사해왔다. 그 인사를 자연스레 받아주며 도현은 반으로 향했다.

4반이라는 팻말이 오늘따라 무겁게 다가왔다. 그나마 새 학기라 다행이라 생각하며 심호흡을 한 도현은 문을 열었다.

“어! 도현!”

제일 먼저 알은척한 건 이유찬이었다. 자리로 돌아가니 아이들이 선생님이 무슨 일로 부른 거냐며 물어왔다.

모인 시선 속에서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바로 지금이었다.

“…이거, 주시려고 부르셨어.”

“그게 뭔데?”

아이들이 도현의 손에 들린 서류에 관심을 보였다. 도현은 입술을 한 번 다물었다가, 느릿하게 말했다.

“유학 서류.”

“아, 유학….”

태평히 고개를 끄덕이던 이유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유학!?”

유학? 누가 유학 간대? 그 커다란 목소리에 단숨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때 누군가 도현의 팔을 잡아 왔다.

“그게 무슨 소리야?”

눈썹을 찡그린 한설아가 대답을 종용했다. 김병철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도현을 보고 있었다. 도현은 입맛이 썼다.

“유학 가기로 했어. 아예 가는 건 아니고 교환학생으로 잠깐 다녀오는 거야.”

잠깐 말을 멈춘 도현은 한숨처럼 말을 이었다.

“다음 주에 떠나.”

“미친.”

누가 뱉었는지 모를 말이었다. 하지만 다들 비슷한 심정이었다. 특히 김병철은 충격과 배신감이 어린 눈으로 도현을 보다가 대뜸 물었다.

“그걸 왜 이제 말해?”

“시험 기간이기도 했고…. 그리고 말했잖아. 아예 가는 거 아니고 잠깐 갔다 오는 거야.”

“그 잠깐이 얼마나인데?”

“아마 올해 안에 올 거야. 늦어도 내년.”

아이들은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눈치였다. 희운은 조용하게 숨을 죽이고 있었다. 도현은 희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아니, 무슨. 와….”

이유찬이 기가 찬 듯 의미 없는 소리를 뱉어댔다. 도현의 고개가 더 무거워졌다.

“…미안해. 촬영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

한설아는 할 말 많은 눈빛이었지만, 막상 입을 열진 않았다. 다른 아이들도 비슷했다. 모두에게 너무 갑작스러운 소식이었다.

띠리리리-

그런 아이들의 심정과 상관없이 종소리가 울렸다. 첫 교시를 알리는 소리였다. 결국 첫 수업은 상당히 기묘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었다.

“…도현쓰! 내가 이상한 얘기 들었는데, 진짜야?”

다음 쉬는 시간이 되자 서일준이 찾아왔다. 도현은 같은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쉬는 시간마다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었다.

안면만 있는 후배까지 반에 찾아와 선배 정말 전학 가시냐고 물어보고 나서야, 그 폭풍 같았던 혼란은 끝이 났다. 점심시간쯤엔 모든 소식이 쫙 퍼졌으며, 반 아이들도 어느 정도 사실을 받아들였다.

처음엔 조금 화났던 것 같았던 아이들은 이내 도현을 이해해 주었다. 내내 미안한 표정을 짓는 소년의 낯이 퍽 처연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무리 촬영이어도 그렇지.”

물론 이해한 것과 아쉬운 것은 별개였다.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매 쉬는 시간마다 찾아와 껌딱지처럼 붙어 있던 서일준이 몇 번째일지 모를 말을 한탄처럼 뱉었다.

“가서도 나 잊으면 안 돼? 어?”

“아예 가는 거 아니라니까.”

“그래도! 그 학교가 너무 좋아서 나를 잊을 수도 있잖아!”

징징대는 모습이 귀찮지 않았다.

아이들이 화낼 것까지 각오했는데, 화내긴커녕 아쉽다고 우는소리를 내는 게 미안하고 고마웠다.

도현은 익숙하게 그를 어르고 달래며, 그의 친구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함을 느꼈다.

‘여기서 제일 겁쟁인 나였네.’

그런 바보 같은 사실도 함께 말이다.

일주일 중의 하루가 지났다.

다음 날도, 다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평소보다 더 시끄럽고 어지럽긴 했지만, 하루하루는 흘러갔다.

수업에 들어온 교과목 선생님들이 도현을 부르며 떠나는 걸 아쉬워하고, 쉬는 시간마다 친구들이 찾아오고….

“학생, 전학 간다며.”

배식하던 아주머니가 탕수육을 담아주며 말했다. 대체 어디까지 퍼진 거야. 도현은 앓는 소리를 내다 정정했다.

“전학 아니고 교환학생이요.”

“아줌마는 뭐가 다른지 잘 모르겠다. 아휴, 못 본다니 아쉽네. 많이 먹어. 많이.”

“저, 이만큼은 못 먹어요.”

“한창 클 나이에 이만큼은 먹어야지! 우리 아들은 네 나이에 밥 세 공기 먹었어. 자, 어여 가서 먹어.”

탕수육은 반찬 칸을 벗어나 옆자리까지 침범해 버렸다. 도현은 그것을 보다가 비집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 마지막 날에는 반 애들이 깜짝 파티를 열어줘서 놀랐다.

“카톡 씹으면 죽어!”

“알았어.”

“여자 친구 사귀면 꼭 보고하고!”

“…그건 좀.”

“쓰읍!”

“…알았어.”

어이없이 대답한 도현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 쉬었다. 그 반응에 아이들이 꺄르르 웃었다. 그런 파티를 벌이고도 아쉬웠던 아이들은 도현을 끌고 노래방부터 고깃집까지, 하루 내내 놓아주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붙들려 풀코스로 놀아버린 도현은 기진맥진해서 집에 돌아왔다. 짐을 미리 싸 두어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거의 기절하듯이 잠들었다.

그리고.

미국으로 떠나는 날 아침이 밝았다.

* * *

스윽, 텅 빈 주차장에 차 한 대가 들어섰다. 곧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검은 점퍼에 모자를 쓴 소년이 내렸다.

문을 닫기 전, 소년은 운전석과 조수석을 향해 말했다.

“빨리 다녀올게요.”

“천천히 다녀와. 아직 비행기 시간 넉넉하니까 그렇게 안 서둘러도 돼.”

이장혁의 말에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은 차 문을 닫고선 학교 건물로 들어갔다. 텅 빈 건물 내부에 도현의 발소리만이 울렸다.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해서 익숙한 계단을 오르고, 4반이라고 써진 팻말 앞에서 자물쇠를 땄다.

드르륵. 교실 문을 여니 잿빛 새벽이 내려앉은 풍경이 보였다. 평소 등교하던 시간보다 이십 분이나 일러서 그런지 교실은 무척 어두웠다.

습관적으로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려던 도현은 멈칫했다. 아, 나 이제 4반 아니지. 도현의 동선이 부자연스럽게 꺾였다. 그는 창가로 가는 대신, 아까부터 손에 들고 있던 종이가방에서 상자 하나를 꺼냈다.

새카만 상자는 두께가 그리 두껍지 않았다. 뚜껑을 열어 내용물이 잘 있나 확인한 도현은 한 책상 앞에 가서 섰다.

조심조심, 책들이 눌리지 않게 상자를 넣은 도현은 무언가 고민하듯 망설였다.

갈등하는 표정을 짓던 소년은 이내 교탁 서랍에서 종이와 볼펜 하나를 가져왔다.

볼펜 끝이 종이 위를 배회했다.

하아, 살짝 찌푸린 눈으로 종이를 노려보던 소년은 이내 결심한 듯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잠시 후, 소년이 문을 닫고 나간 교실은 꽉 닫힌 창문과 함께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고요한 공기만이 맴돌고 있었다.

그리하여 다음 날.

자리의 주인은 하루 늦게 그 상자의 존재를 확인했다.

* * *

희운은 동요했다.

H의 음반이 왜 내 서랍에…. 아니, 그보다 H가 언제 음반을 냈지?

그려진 것이라곤 덜 핀 꽃송이가 고작. 그리고 연주자의 정보도 알파벳 한 글자뿐. 무척 이상한 음반이었는데, 또 그게 H의 것이라고 하니 묘하게 납득됐다.

희운의 눈이 음반 뒤편, 곡의 리스트가 적힌 곳에 닿았다. 주세페 타르티니, 악마의 트릴….

…첫 곡부터 심상치가 않았다.

어느새 희운의 눈에 흥미가 한가득 들어차 있었다. 남의 것을 이렇게 유심히 보는 게 무례라는 걸 알면서도 자꾸 눈이 갔다.

H라잖아. 그것도 이렇게 의뭉스러운 음반…! 희운이 어깨를 들썩이다가 팔꿈치로 툭, 무언가를 건드렸다. 붙잡을 새도 없이 검은 상자가 바닥을 굴렀다.

“으아, 어떡해.”

낭패감 어린 표정으로 희운이 재빨리 상자를 주웠다. 설마 어디 찍히진 않았겠지….

바닥에 나뒹굴던 상자를 품에 안을 때였다. 그의 시야에 흰 종이가 들어왔다.

상자에 있었던 건가?

종이를 주운 희운은 갈등했다. 상자에 그대로 넣는 게 맞는데.

‘궁금해!’

너무, 너무 궁금했다.

…조금만, 조금만 볼까? 주인 이름이 적혀 있을 수도 있으니까…. 굉장히 못된 짓을 하는 느낌이라 심장이 쾅쾅 뛰었다. 희운은 저도 모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피고선, 숨을 들이마셨다.

부스럭, 종이가 펼쳐지고.

“…….”

아까까지만 해도 반짝거리던 적갈색 눈동자가 떨렸다.

흰 종이에 적힌 단정한 글씨가 눈에 박혔다.

[내 대답이야.]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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