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2화. The bower lake school (3)
“흰둥아! 안 가?”
“아, 어어, 가야지.”
넋을 반쯤 빼놓은 대답에 김병철이 희한하다는 눈으로 희운을 보았다.
“너 오늘 좀 이상하다.”
“어, 많이 이상해?”
볼을 긁적이며 묻자 김병철이 단호히 긍정했다. 응.
“왜, 우릴 두고 떠나가신 임 때문에 그래?”
“…….”
순간 찔렸다. 그럴 리 없건만, 가방 속에 고이 잠들어 있을 검은 상자를 들킨 느낌이었다. 희운이 대답을 못 하자 김병철이 그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아구, 우리 흰둥이 정든 주인님 떠나서 속상했져요.”
“주인님 아니거든?”
“이거 그건가? 입덕부정기?”
“아, 진짜!”
희운이 작게 성질내자 김병철이 낄낄 웃었다. 기어이 희운을 놀린 게 그렇게 즐거운 모양이었다. 희운이 조금 불퉁한 눈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그러자 김병철이 항복이라는 듯이 양손을 들어 보였다.
“아니, 나는. 네가 맨날 걔만 쳐다보고 있으니까 그랬지.”
“내가? 내가 그랬어?”
“몰랐어?”
“진짜 그랬다고?”
“맨날 이도현 주변에만 있었잖아, 너.”
아, 솔직히 서운했다고. 그리 말하며 어깨동무를 해오는 친구에 희운이 혼란스러운 눈빛을 했다. 그 이상한 착각은 다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언제부터?
“…몰랐어.”
“원래 강아지들은 그래. 자기가 그런 줄도 모르고 주인을 따라다니….”
“아니라고!”
퍽퍽, 야무지게 주먹은 쥐었지만, 힘을 빼서 솜방망이 같은 주먹질에 김병철이 몸을 틀어댔다. 그러면서도 실실대는 얼굴이 얄미웠다.
씩씩대던 희운은 의자에서 일어나 가방을 멨다. 하교할 시간이었다.
“오늘 피시방 콜?”
“아니. 오늘은 안 돼.”
“엥…. 왜?”
“소, 소속사 일이야.”
거짓말을 하려니 어색했다.
하지만 이 정도 일이 아니면 김병철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꼬치꼬치 캐물을수록 곤란해지는 건 희운이었다.
희운이 눈을 데굴 굴리자, 쩝, 입맛을 다시던 김병철은 어깨를 으쓱이곤 이번엔 이유찬에게 달라붙었다. 이유찬은 김병철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들은 교문까지 같이 걸어 나오다가, 정문에서 헤어졌다.
“흰둥이 빠염!”
“나 간다.”
친근하게 어깨동무한 두 사람은 주정뱅이처럼 노래를 부르며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아를 버리고 가시는 니임은-. 학교에서 종일 입에 달고 살았던 노래에 피식 웃은 희운은 뒤를 돌았다.
터벅터벅, 걷는 길은 평소와 다름없는데 이상하게 어깨가 무척 무거웠다.
- 내 대답이야.
…대답, 이라고.
희운은 학교에 있던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그는 네이버뿐만 아니라, 혹여나 아직 국내에 정보가 풀리지 않았을 가능성을 상정하여 해외 사이트에도 H의 음반을 검색해 보았다.
그러나 나오는 건 하나도 없었다.
정말 하나도.
‘그럼 가방에 있는 건 대체 뭔데.’
발매되지도 않은, 관련한 기사 한 줄도 없는 H의 음반이 희운의 가방 안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차라리 공포 영화가 덜 무서울 거 같았다.
희운은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보았다.
첫 번째. H가 의 연주자 H가 아닌 도현의 이니셜 약자다. 물론 도현이 그 영화에 출연했고,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있고, 굳이 같은 알파벳을 고른 게 참으로 공교롭지만…. 그래도 아예 말이 안 되진 않았다.
두 번째. 도현이 H로부터 음반을 선물 받아 자신에게 주었다. 제일 정상적인 선택지이긴 한데, 그럼 의문이 남았다. 이게 어떻게 대답이 될 수 있을까? 하고.
그리고 세 번째. 도현이….
“…H다.”
직접 입으로 뱉어 놓고서 떨떠름해진 희운의 발걸음이 느려졌다. 도현이 H…. 그게 가능한가? 그땐 고작 여덟 살이었잖아. 그 연주를 여덟 살에….
상식이 세차게 반항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걸 나한테 왜 말해주겠어?’
만약 도현이 H라고 치자.
그렇다면 도현은 그 사실을 지금까지 꼭꼭 숨겨왔단 소리였다. 고작 알파벳 하나 박힌 음반은 앞으로도 밝힐 생각이 없다는 의지를 뚜렷하게 표명하고 있었다.
그렇게 꼭꼭 숨겨온, 그리고 계속 숨길 비밀을 왜 나한테, 라는 의문이 떠오른 순간 모든 게 엉망으로 엉켜버리는 것이다.
희운은 결국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집에 도착했다. 텅 비어 싸늘한 집이 오늘만큼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엄마가 있었다면 음반을 틀지 못했을 테니까.
곧장 방에 들어간 희운은 조심스레 상자를 꺼냈다. 수업 시간 내내 희운을 신경 쓰이게 했던 검은 상자가 얄밉도록 매끄럽게 빛났다.
검게 염색된 고급스러운 원목은 꼭 누군가를 닮아 있었다. 희운은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삼키며 음반을 꺼냈다. 아침에 보았던 그대로, 덜 핀 꽃송이가 보였다.
희운은 이제 저게 무엇인지 알았다.
“개나리….”
노란 꽃송이는 개나리였다. 덜 핀 개나리. 특별히 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길목에 개나리가 피어 있으면 무심코 시선을 빼앗기곤 했던 희운은 왜인지 속이 울렁거렸다.
음반을 플레이어에 넣은 희운은 고민하다가 헤드폰을 집었다. 혹시라도 재생 도중에 엄마가 집에 오면 곤란하니까. 헤드폰을 낀 희운이 침대에 가서 앉았다.
재생 버튼만 누르면 되는데 이상하게 입 안이 마르고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반응에 옅은 숨을 내쉰 희운이 음반을 재생시켰다.
첫 곡이 악마의 트릴이라고 했지.
많이 들어보지 않은 곡이었다. 형은 연주한 적이 없기도 했고…. 희운은 그런 생각을 하며 시작되는 선율에 귀를 기울였다.
“…….”
헤드폰에서 퍼져 나온 선율이 세상을 가득 채운다. 음반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희운의 표정이 멍해졌다.
불안정하게 떨리는 음색은 꼭 안개 속에서 비틀거리며 걷는 사람 같다. 그러다가도 악장이 넘어가자 분위기가 뒤집혔다. 쏟아지는 유혹과 정열에, 욕망을 헤집는 선율에 온 정신이 흐트러진다.
이윽고 악마의 트릴이 등장했다.
날카롭게 튀는 스타카토, 그리고 환청처럼 들리는 악마의 웃음소리, 악마의 손끝에서 현란하게 펼쳐지는 음악…. 환각 같은 이미지 속에서 악마의 형체가 점점 뚜렷해졌다.
악마는 뿔이 달린 험악한 낯이 아닌, 단정한 소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하고도 강렬한 직감이었다. 비상식에 가까운 생각이었다. 그런데도 희운은 확신했다.
너구나.
쿵쿵쿵쿵.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세게 뛰었다. 심장의 거친 박동과 서늘한 카덴차가 묘한 박자를 맞추며 머릿속을 먹먹하게 흔든다. 마지막 아다지오가 여운을 남기고 흩어질 때까지 희운은 숨도 내뱉지 못했다.
크로이처, 사랑의 슬픔, 멜로디가 남아 있었지만, 희운은 악마의 트릴이 끝난 순간 트랙을 넘겼다. 쿵쿵쿵, 심장은 계속해서 뛰었다. 이윽고.
“…….”
드뷔시의 달빛이 펼쳐진다.
방금까지 강렬하게 몰아쳐 사람을 진흙 속에 던져놓았던 악마의 트릴과 달리 달빛은 처음부터 다정한 음으로 시작했다. 그 첫 음이 시작된 순간 희운은 입술을 아득 깨물었다.
지상을 비추는 태양처럼 환하진 않지만, 은은하게 내리쬐는 달빛이 상냥하게 마음속에 스며든다.
뜨겁지 않았다. 그저 한없이 다정했다.
두 손을 맞잡으면 미지근하게 식어가는 온도처럼, 그렇게 부드러운 온도가 희운을 감싸 안았다. 지독히도 아름다웠다. 희운은 어느새 눈을 감고 그 선율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트랙이 끝이 났을 때.
희운은 다시금 음반을 맨 처음으로 돌렸다. 이번엔 트랙을 넘기지 않고 차근차근히, 그 안에 든 모든 이야기를 듣고. 마지막 음이 숨결처럼 토해졌을 때 다시 맨 앞으로 돌렸다. 다시, 또 한 번 다시, 그리고 또….
마치 풀 수 없는 난제를 직면한 수학자가 몇 번이고 문제를 읽고 수식을 풀어내려는 것처럼. 소설책을 읽고 그 문장과 문장 사이의 의미를 읽어내려는 독자처럼. 희운은 끝없이 음반을 반복해서 재생했다.
그렇게 하면 무언가 답을 알아내기라도 할 것처럼.
* * *
검은 차 한 대가 한적한 도로를 달렸다. 처음엔 작은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는데, 조금 더 지나자 곧 나무와 풀만이 사방에 가득해졌다.
그 상태로 십 분 정도 달렸을까.
멀리서 하얀 대문이 보였다. 하얀 철제 문 가운데에는 학교를 상징하는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창문 너머로 시선을 던진 도현은 그것이 철컹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열리는 것을 보았다.
학교 문양이 반으로 갈라지며 차가 지나갈 공간이 생겼다. 그들의 방문 예정이 이미 전달되었는지, 막아서는 사람 없이 차는 부지 내로 수월히 입장했다.
멀리서 한 남자가 다가왔다. 입은 옷을 보아 학교 경비원인 거 같았다. 그는 운전석 창문을 손가락 마디로 가볍게 두드렸다. 지잉, 창문이 내려가며 숲 냄새가 풍겼다.
“안녕하세요, sir. 오늘 방문하기로 한 분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
“The bower lake school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그는 이장혁과 짧게 악수한 후 도현에게도 환영 인사를 건넸다. 그는 닮은 두 사람의 얼굴을 보다가 정중히 물었다.
“주차를 도와드릴까요?”
“괜찮습니다. 위치만 알려주세요.”
고개를 끄덕인 경비원은 손짓으로 주차장을 알려주었다. 이장혁은 그곳으로 운전해, 빈자리에 차를 세웠다.
“자, 내리자.”
“네.”
차에서 내린 도현은 트렁크 앞에 섰다. 그 옆에 선 이장혁이 트렁크를 열어 캐리어를 꺼내자, 그들을 따라온 경비원이 캐리어 하나를 손에 쥐었다. 두 개를 다 쥐려는 걸 이장혁이 말려서 하나는 이장혁이 끌게 되었다.
“학기 중에 오는 학생은 이로써 이번 학기만 셋이로군요.”
경비원은 가볍게 말을 걸었다.
도현은 그가 말한 셋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한 명은 자신이고, 나머지 두 명은 상상하는 그 애들이겠지.
“원래 학기 중에 오는 사람이 적나요?”
“그런 편이죠. 들어오기 쉬운 학교는 아니니까요. 아, 저기가 체육관입니다. 수영장도 저기에 있죠. 혹시 수영을 좋아하면 저 건물에 자주 가게 되겠군요.”
수영을 좋아하는 건 도현의 친구이지 도현이 아니었다. 도현은 애매한 웃음으로 흘려 넘겼다. 경비원은 교장실로 가는 동안 눈에 보이는 건물을 유쾌하게 설명해 주었다.
“여깁니다. 저 안쪽에 교장실이 있어요. 캐리어는 저한테 주시면 기숙사 로비에 가져다 두겠습니다.”
“그래도 될까요?”
“물론이죠.”
도현은 제 캐리어를 끌고 멀어지는 남자를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커다란 문은 고풍스러운 양식으로 되어 있었다. 도현은 눈을 한번 깜빡인 후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