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553화 (554/582)

제553화. The bower lake school (4)

[Marcia principal’s office]

거대한 성, 혹은 성당을 닮은 건물의 안쪽에 그들이 찾던 팻말이 보였다. 아치형 문에는 천장을 받치는 기둥의 문양과 이어진 듯한 문양이 양각되어 있었다.

문 앞에 선 이장혁이 도현을 내려다보았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소리가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본래 길었을 머리카락은 뒤로 틀어 올려 목에 건 진주 목걸이가 눈에 띄었다. 그녀는 진주와 비슷한 색의 원피스와 그보다 짙은 숄을 두르고 있었는데, 그들을 보고 놀란 척 들어 올리는 눈썹까지도 우아한 인상의 여성이었다.

“제가 기다렸던 분들이군요.”

“반갑습니다, 마샤 교장 선생님. 이장혁입니다.”

“반가워요.”

이장혁과 악수한 마샤가 도현을 보았다. 도현은 고민하다가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부드럽게 웃은 마샤는 환영의 의미로 도현을 살짝 껴안았다. 닿을 듯 말 듯, 반쯤 허공에 걸친 포옹이었다. 그녀는 짧고 담백한 환영 인사를 마친 후 옆으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이장혁과 도현은 교장실에 발을 들였다.

유럽의 성당 같았던 복도 풍경과 달리 내부는 현대적이었다. 마샤는 자신의 책상 맞은편 쪽 소파에 자리를 권했다.

“얼마 전에도 그 자리에 도현처럼 멋있는 학생들이 앉았었죠.”

“헤레이즈와 신시아 말씀하시는 건가요?”

“맞아요. 두 학생과 친한가요?”

“네, 그런 편이에요.”

부드럽게 웃은 마샤가 말했다.

“두 학생은 모두 학교에 훌륭하게 적응하고 있어요. 도현도 마찬가지로 잘해낼 거란 생각이 드는군요.”

“감사합니다.”

“도현이 다녔던 학교로부터 기록도 받았어요. 성적이 무척 좋더군요?”

“연기도 즐겁지만, 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재밌거든요.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열심히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크게 민망해하지도, 그렇다고 우쭐거리지도 않는 담담한 반응에 마샤가 흥미로운 눈으로 소년을 보았다. 앞서 왔던 두 소년 소녀가 그러했듯이 이 아이도 꽤 독특한 존재인 거 같았다.

“한 학기에 편입생을 세 명이나 받는 건 이례적인 일이에요. 학교가 소란스러워지니 보통은 그렇게 하지 않죠.”

“소란스러운 걸 싫어하세요?”

“내가 싫어한다기보단, 섬세할 나이이니까요.”

반기지 않는 건가.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헤레이즈, 신시아, 도현. 세 존재 모두 조용한 편은 아니니까. 그들이 수다스럽다는 뜻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가 주변을 시끄럽게 만든다는 의미에 가까웠다.

어쩌면 마샤는 원해서 그들을 받은 게 아니라, 페어리 픽처스라는 거대한 기업의 압박을 받은 건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이 자리가 조심스러워졌다.

“저….”

“그래서 요즘 즐겁군요.”

“…네?”

“학교가 조금 소란스럽고, 시끄러워야 학교답죠. 여긴 산골짜기라 그런가 너무 조용하고 평화로운 감이 있어요.”

급작스러운 전환에 도현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마샤는 재밌다는 미소를 한가득 달고 있었는데, 도현은 그녀가 생각했던 것만큼 조용하고 부드러운 성정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샤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뒤편에 있는 유리창 너머로 드는 햇빛이 그녀의 금발을 화사하게 비추었다.

“편하게 지내요. The bower lake school은 도현을 환영해요.”

또각또각, 구두 굽 소리가 일정하게 울렸다. 그들은 중앙 건물을 빠져나와 산책로를 걸었다. 도현은 잠깐 야외 테니스장에서 테니스를 치고 있는 아이들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알렉산드로 홀로 가는 길은 이쪽이에요.”

“아, 네.”

“기숙사는 네 개의 홀로 나뉘어 있어요. 두 개는 여학생이 쓰는 곳이고 두 개는 남학생이 쓰는 곳이죠. 그리고 도현이 살게 될 곳은 알렉산드로 홀이에요. 넓고 시설도 좋아서 불편하진 않을 거예요.”

“기숙사는 무슨 기준으로 나뉘는 건가요?”

“7학년부터 9학년까지는 알렉산드로 홀을 쓰고 10학년부터 12학년까지 레클리스 홀을 써요. 여학생도 같은 기준으로 기숙사를 나누죠. 그리고… 아.”

무언가 생각난 듯, 마샤가 도현을 보았다.

“여학생 기숙사에 남학생은 들어갈 수 없어요. 마찬가지로 남학생 기숙사에 여학생을 들여서도 안 되고요.”

걸리면 크게 혼나니까 조심하란 말에 도현은 별 생각 없이 물었다.

“어떻게 혼나는데요?”

“도현아…?”

이장혁이 충격받은 낯으로 도현을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한 모습에 도현의 표정이 차게 식었다.

“생각하시는 거 아니에요.”

아니, 날 뭘로 보고….

애초에 도현은 진이나 니콜라스와 어울릴 때를 제외하면 하지 말라는 걸 굳이 찾아서 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들의 대화에 작게 웃던 마샤가 말했다.

“힌트는 온실이지만, 도현이 이 처벌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는 날이 없었으면 좋겠군요. 자, 여기가 알렉산드로 홀이에요. 호수와 가깝죠.”

교장실이 있던 건물처럼 기숙사 건물 또한 성채 같았다. 그 뒤편으로는 커다란 호수가 펼쳐져 있어서 학교라기보단 경치 좋은 여행지 같은 느낌이었다.

“사감 선생님은 기숙사마다 한 분씩 상시 상주해 있어요. 무언가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사감실로 가면 돼요. 자리를 비웠을 땐 문에 연락처를 걸어두니 그쪽으로 전화하면 되고요.”

“네.”

“식사는 모든 기숙사 학생들이 한곳에 모여서 먹어요. 거긴 내일 아침에 룸메이트와 함께 가면 될 것 같군요.”

그리 말한 마샤는 사감실 문을 두드렸다. 곧 오십 대 정도로 보이는 남성이 그곳에서 나왔다. 편안한 옷차림으로 보아 그가 이 알렉산드로 홀의 사감 선생님인 거 같았다.

“윌리 선생님, 이쪽은 오늘 새로 온 학생이에요.”

“아, 너구나. 미리 얘기 들었어.”

“기숙사는 처음이라고 하니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럼요, 마샤 교장 선생님. 그게 제 일인데요. 얘야, 네 캐리어는 내가 방 앞에 가져다 두었어.”

“아, 감사합니다.”

“네 방은 308호야. 안내해주마.”

네 사람은 나란히 도현의 방으로 향했다. 방에 올라가는 사이 윌리는 이것저것 설명해 주었다. 방에 올라갈 땐 저쪽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면 된다는 것부터, 10시 이후엔 방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는 것 등등….

가장 유용한 정보는 빨래는 지정된 상자에 넣고 문 앞에 두면 매일 아침 수거해가서 고용인이 세탁해 준다는 사실이었다. 세탁 시 유의사항이 있으면 상자 안에 쪽지를 넣어두면 된다고까지 했다.

그런 것까지 일일이 해준다는 사실에 내심 놀랐던 도현은 다음 순간 학교의 등록금을 떠올리고 수긍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자, 여기가 네 방이란다.”

문 앞에 선 윌리는 도현에게 키를 건네주었다. 카드키를 받은 도현은 홈에 그것을 끼워 넣었다.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카드키를 잃어버리면 내 사무실로 오면 돼.”

“네, 감사합니다.”

성실히 대답하면서도 신경은 반쯤 방에 쏠려 있었다. 도현은 천천히 문을 밀었다.

“…….”

드러난 방은 사진상에서 보았던 것보다 조금 더 좋았다. 가구들은 하나같이 새것처럼 깨끗했고, 양쪽 벽에 자리한 침대의 사이 공간은 누워서 몇 바퀴 굴러도 될 정도로 넓었다.

“휴는 아직 방에 안 들어왔네.”

“휴?”

“네 룸메이트. 휴 모건.”

그러고 보니 문 앞에 Hugh Morgan이라는 글자를 본 것도 같았다. 그게 룸메이트 이름이었구나.

텅 빈 도현의 자리와 달리 생활감 있는 책상과 침대를 쳐다보자 마샤가 말했다.

“휴는 학교생활에 무척 성실한 학생이에요. 도현이 이곳에 적응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테죠.”

“잘 지낼 수 있을까요?”

“오, 물론.”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질문에 마샤가 웃었다.

“둘은 좋은 친구가 될 거랍니다.”

마샤는 자신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교장실 문을 두드리라는 말을 남기곤 기숙사를 떠났다.

“자, 받으렴.”

“이건?”

“기숙사 책자야. 구조도 모두 나와 있고, 또 기숙사 규칙도 적혀 있지. 오십 가지나 되지만 다 지키리라곤 기대하지 않는다.”

윌리가 눈을 찡긋했다.

“여학생을 데려오는 일만 아니면 눈감아 주는 편이니까, 어길 거면 티 나지 않게 어기렴. 들키면 나도 벌점을 줄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야.”

아까부터 학교가 자꾸 첫인상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우아할 거 같던 마샤는 생각보다 장난기가 있었고, 엄격할 거 같던 기숙사는 은근히 느슨했다.

“네가 오는 건 휴에게 미리 말해 뒀으니까 아마 늦지 않게 올 거야. 그 전까지 방 정리를 하고 있으면 될 텐데… 혹시 도움이 필요하니?”

“아니요. 제가 할 수 있어요. 아빠도 계시고요.”

“그래. 그럼 난 이만 내려갈게. 혹 궁금한 게 생기면 언제든 찾아와서 물어보렴. 아, 그냥 쿠키가 먹고 싶어서 오는 것도 괜찮아. 사무실에 매번 새 쿠키를 사다 놓거든.”

“찻잎을 가지고 찾아갈게요. 감사합니다.”

“착하기도 하지.”

윌리는 도현이 마음에 든 눈치였는데, 이장혁은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도현은 제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어디서든 사랑받아 마땅할 만큼 멋지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똑똑하고 야무진데 착하고….

“…빠? 아빠?”

“아, 어. 왜?”

“방 정리하려고요. 도와주실 수 있나요?”

“그럼, 당연하지.”

씩씩하게 말한 그는 곧장 캐리어를 풀기 시작했다. 그 동작은 굉장히 비장했다.

‘잘해야지.’

도현을 데리고 해외에 나오는 건 늘 그의 아내였다. 어쩌다 보니 굳혀진 포지션이었는데, 아내의 임신이 초기를 지나가서 비행기에 태우는 게 불안했다. 그래서 이번엔 서혜나가 아닌 이장혁이 도현과 동행하게 되었다.

두 사람이 도착한 건 전날이었다.

그들은 공항 근처의 호텔을 예약해 하룻밤 묵었다.

좋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오랫동안 둘이서만 있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매번 도현이 선을 긋는다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선을 넘지 않는 게 배려라 여겼다. 하지만 그 결과가 삼 일 내내 딱 붙어 있는 게 어색한 부자 사이였다.

어쩌면, 선을 긋는 건 도현뿐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그 안에 들여 주길 바라며 선 밖을 빙빙 돌고만 있는 게 아니라, 먼저 그 선을 넘어갈, 먼저 상대의 영역을 침범할 무례와 용기가 필요했던 게 아닐까.

“이건 여기 두면 돼?”

“아, 네. 그러면 될 거 같아요.”

고개를 끄덕인 도현이 새로운 캐리어를 끌렀다. 그리고 차곡차곡 접힌 교복을 꺼내어 옷장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부산스럽지 않은 정리 시간은 두 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짐을 많이 가져오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마지막으로 바이올린을 책상 위에 내려둔 도현이 책상 앞에 자리한 창문에 시선을 빼앗겼다. 아치형 창문 너머로 넓은 호수가 보였다. 호수 주변은 캠퍼스 부지에 들어오기 전 도로가 그러했듯 나무와 풀로 빽빽했다.

“정말 나무 그늘이 많네.”

어느새 도현의 옆에 다가와서 선 이장혁이 중얼거렸다. bower lake. 나무 그늘 호수. 정말 말 그대로였다.

“어떤 거 같아?”

학교가, 아니면 기숙사가. 그것도 아니면 풍경이? 반사적인 의문이 떠올랐지만, 곧 흐트러졌다. 뭐든 중요할까.

“좋아요.”

도현은 막, 이곳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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