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4화. The bower lake school (5)
두 사람은 짐 정리를 마친 후 호숫가를 걸었다. 서로 말하지 않았음에도 둘의 발걸음은 한 치의 오차 없이 호수로 향했고, 어느덧 해가 저물어가는 하늘을 배경으로 산책로를 거니는 중이었다.
‘반짝반짝하네.’
한낮의 화려함은 졌지만, 호수는 별 가루를 뿌린 은하수처럼 은은하게 물결쳤다. 산책하기 좋은 곳이라 생각하며 걸을 때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제 들어가야지. 네 룸메이트도 왔을 거고.”
“주차장까지 같이 갈게요.”
“아니야. 안 그래도 돼.”
텁, 도현의 정수리 위로 그의 손이 얹어졌다. 커다란 손은 동그란 정수리를 완전히 뒤덮었다.
이장혁은 그 상태로 결 좋은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손바닥 아래, 까만 눈동자가 의문을 담아 쳐다보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주차장까지 멀지도 않고. 아빠는 괜찮아.”
“그래도….”
“대신에 한 번만 안아보자.”
도현이 약간 움찔했다.
그러나 뒤로 물러나거나 안색을 찌푸리진 않았다. 가만히 그가 껴안길 기다리고 있는데, 이상하게 상대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왜 가만히 있냐는 눈으로 쳐다보니 낮게 웃은 이장혁이 팔을 벌렸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안으라고?
“…….”
“싫어?”
그의 얼굴이 금방 시들어갔다. 파릇한 나무와 풀 사이에서, 생명력 넘치는 호숫가에서 오직 남자만이 데친 나물처럼 시들거렸다.
그게 꽤 보기에 거슬렸다.
“…크흡.”
이장혁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틀어막았다. 비장한 표정으로 다가온 도현은 양팔을 뻗었다. 그의 옆구리 양옆으로 뻗어진 팔은 묘하게 거리가 붕 떠 있었다. 아주 미묘하게.
그게 너무 도현다웠다.
“흐하, 하하하!”
“…그만 웃죠?”
도현의 표정이 차가워지자 그가 황급히 변명했다.
“아니, 비웃은 거 아니야. 귀여워서 그랬어.”
꽈악, 이장혁이 미세한 공간을 띄워 놓은 도현의 등을 강하게 껴안았다. 도현은 속절없이 그의 품에 안겼다. 부드러운 스웨터에 얼굴을 박은 채로 눈동자를 굴렸다. 역시 이런 건 어색하다.
“잘 지내. 힘든 일 있으면 연락하고. 즐거운 일이 있어도 연락하고. 심심해도 연락하고.”
도현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매일 연락하란 거죠?”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진의 집에 머물 때도 그랬으니까. 물론 음반에 너무 정신이 팔렸을 땐 잠깐 잊기도 했지만, 정말 잠깐이었다.
도현의 물음에 이장혁은 애매한 소리를 내며 등을 도닥였다.
“음… 그러면 좋긴 하지만.”
“?”
“그렇게 자주 하지는 않아도 돼.”
“네?”
도현의 고개가 퍼뜩 들렸다.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주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듯한….
“기숙학교잖아. 여기 사는 애 중에서 매일 부모한테 전화하는 애는 없을 거 아니야.”
사실 그리 이상한 이야기는 아닌데, 그게 이장혁의 입에서 나오니 몹시 이상하게 들렸다. 도현은 잠깐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나 풍경이 변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이장혁은 생소해하는 아들을 보다가 씁쓸히 웃었다.
언젠가 도현이 제가 가진 비밀을 털어놓은 날, 그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도현이 털어놓은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의심하거나 사실 여부를 판단하려는 건 아니었다. 실은 그건 그다지 중요치도 않았다.
그게 진실이라고 한들 자신이 도현에게 했던 일이 사라지는 건, 도현이 받은 상처와 흉터가 옅어지는 건 아니다. 그러니 사실 자체는 특별할 게 없다.
다만 그가 생각하는 건, 어째서 도현이 그 사실을 지금에서야, 퇴원 후 몇 년이 흐른 지금에 이르러서야 그들에게 말할 수 있었냐는 부분이었다.
어째서 그 조그맣던 아이는 그 오랜 시간을 홀로 삭여야만 했는가?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동안 너를 너무 구속한 게 아니었는가 하는.”
그야, 당연하지.
어린애를 달래는 어른은 아이에게 자신의 고충이나 슬픔을 토로하지 않는다. 우습게도 도현 또한 같은 이유로 그러했을 것이다.
그의 불안을 달래주려고. 그러려면 평온해 보여야 하니까. 잔잔한 호수처럼 아무 문제 없이….
그가 조용해지자 도현이 꿈지럭대며 고개를 들려고 했다. 이장혁은 눈빛을 보이기 싫어 아이의 등을 도닥이는 척 더 깊게 끌어안았다. 이런 한심한 모습은 그만 보여주고 싶었다.
이젠 바로잡을 때도 됐다.
“엄마 아빠 생각해주는 건 너무 좋은데, 너무 많이 생각하진 않아도 돼. 그냥 친구들이랑 어울리고 뛰어놀아. 그러다가 연락하는 것도 가끔은 잊어도 되고.”
평범한 가족 관계를 원하면서 그부터가 그렇지 못했다. 아이에게 바라기만 하는 건 이제 그만해야 하지 않겠는가.
끌어안는 힘이 약해진 틈을 타 도현이 고개를 쏙 들었다. 그 눈빛은 어딘가 얼빠진 구석이 있어서 웃음을 터트린 이장혁이 소년의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었다.
얼빠진 낯을 하던 소년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싫은 표정으로 물러선 도현은 그가 엉망으로 헤집어 놓은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꼭 하악질한 고양이가 제 털을 고르듯 머리카락을 다듬은 도현이 경계의 눈빛을 보냈다. 이장혁은 또 그러지 않겠다는 표시로 양손을 들었다. 그것을 의심스레 보던 도현이 물었다.
“정말 그래도 돼요?”
“응.”
당당하게 답한 이장혁은 일 초 후 정정했다.
“그, 그래도 너무 많이 잊는 건 조금….”
소심하게 덧붙이며 눈치를 보자 기이하게 반짝이던 눈동자가 이내 허탈함을 머금다가, 나중엔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었다.
“네. 너무 자주 까먹진 않을게요.”
“자주가 어느 정도인데?”
“글쎄요….”
“도현아?”
불쌍하게 묻는 남자에 도현이 재밌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다채로운 색이 휘어진 눈동자 속에서 빛났다. 그게 늦은 오후에 물살이 반짝이는 호수 같아서 이장혁은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비행기 타려면 지금 가 봐야 하잖아요.”
“아, 응. 그렇지….”
명백하게 말을 돌린 거였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처음 보는 편안하고 장난스러운 얼굴이 눈에 박혔다.
“주차장까지 같이 가고 싶지만, 원하지 않으시면 여기서 보내 드릴게요.”
아빠도 잘 지내요. 조심히 가시고요. 이장혁의 시야 위로 공항의 풍경이 덧입혀졌다. 그때도 도현은 이별을 입에 담았는데, 어쩐지 그때는 멀리 날아가 버릴 거 같았다면 지금은….
* * *
카드키를 끼워 넣자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현관에 선 도현은 방 안에 누군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존재도 도현을 눈치챈 거 같았다.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털던 소년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아래 짙은 눈썹과 우뚝한 코가 수려했다. 수건을 어깨에 걸친 소년은 눈썹을 들어 올리더니 곧 환하게 웃었다.
“안녕.”
눈동자가 호박색이네.
주위에서 보기 흔치 않은 색이라 시선이 갔다. 조금 전 호수에 내려앉은 하늘과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휴 모건?”
“내 이름 알아? 아, 문패 본 건가.”
소년이 성큼성큼 다가와 불쑥 손을 내밀었다. 또래치고는 큰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현이 그것을 마주 잡자 그가 위아래로 크게 흔들었다.
“반가워, 내 룸메이트.”
“이도현이야.”
손을 뗀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알고 있어. 네가 오기 며칠 전부터 네 이야기가 돌아다녔거든. 물론 나랑 같은 방을 쓰게 될지는 몰랐지만.”
“내 얘기가 돌았다고?”
“응. 소문의 진원지는 따로 있는 거 같긴 한데. 뭐어. 그게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예상했을걸. 아서랑 이그린이 왔으니 다음 타자는 누가 봐도.”
휴가 도현을 빤히 쳐다봤다. 그 시선이 꽤 노골적이라 도현은 반응을 고민해야 했다. 여기서 웃어야 하는 건가. 그러나 생각은 생각으로 그쳤기에 둘은 서로 멀거니 쳐다보는 모양새가 되었다.
이게 뭐 하는 거지.
이상한데 상대가 눈을 안 떼니 도현도 뗄 수 없었다. 그런 혼란스러운 속과 다르게 도현의 겉모습은 한없이 평온했다. 그리고 휴가 난데없이 탄성을 내질렀다.
“아, 눈 감았어!”
“우리 눈싸움 중이었어?”
“아니야? 눈 안 떼길래 그런 줄 알았는데.”
휴가 뻐근한 눈을 비볐다. 부러 깜빡임을 참은 건지 조금 충혈되어 있었다. 도현은 그것을 어이없는 심정으로 보았다.
실없다.
도현은 휴 모건에 대한 첫인상을 정립했다.
“안구건조증 있는데.”
투덜거린 그가 침대로 향했다.
안구건조증 있으면서 눈싸움을 왜 한 거야. 그런 생각으로 쳐다보고 있자니 수건을 의자에 대충 던져둔 휴가 바람막이를 꺼내어 입더니 도현을 쳐다보았다.
“뭐 해?”
그가 문을 고갯짓했다.
“나가자. 학교 구경시켜 줄게.”
“지금?”
“밤에 나가도 되긴 하는데, 그럼 윌리한테 안 들켜야 해. 나야 들켜도 상관없는데 너 첫날부터 그래도 되겠어?”
나가는 건 기정사실인 건가.
“겉옷 챙겨. 나가게. 가는 김에 내가 콜라도 사줄게. 아, 알아? 기숙사 앞에 자판기 있는 거.”
“아니, 몰랐어.”
“괜찮아. 나처럼 친절한 룸메이트를 만났으니까.”
보통 그런 거 자기가 말하던가.
신기하다고 생각하면서 도현은 휴가 말하는 대로 겉옷을 꺼내어 입었다. 검은색 스포츠 점퍼에, 혹시 몰라 모자까지 눌러쓰자 휴가 말을 걸어왔다.
“모자는 왜?”
“누가 알아볼까 봐.”
“오…. 할리우드 배우라 이거야?”
툭, 휴가 도현의 옆구리를 살짝 쳤다. 도현은 한 걸음 물러났을 뿐, 그 말에 부끄러워하거나 반응하진 않았다.
휴는 김샜다는 듯이 혀를 찼다.
“어차피 내일이면 다들 알 텐데.”
“그건 내일이고. 오늘은 오늘이잖아. 난 조용한 게 좋아.”
“너 의외로 아웃사이더 타입이구나.”
도현은 그의 말을 자연스럽게 무시하며 벗은 지 오래되지 않은 신발을 도로 신었다. 그리고선 멀뚱히 선 소년에게 시선을 주었다.
“학교 구경시켜 준다며.”
안 가고 뭐 하냔 눈빛에 휴가 느긋하게 걸어왔다. 건들거리는 걸음걸이에 도현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 오, 물론. 둘은 좋은 친구 사이가 될 거랍니다.
꽤 확신하는 거 같았는데. 어떤 부분 때문이었을까?
“나중엔 밤에 몰래 나가는 법도 알려줄게. 그거 알아? 우리 기숙사 뒤편에 있는 호수가 만남의 장소인 거.”
“만남의 장소?”
“온실도 그런데 온실은 우리 기숙사에서 멀어서. 근데 호수는 밤에 가끔 창문 내다보면 재밌는 광경을 볼 수 있어.”
흠, 짧은 비음을 낸 그가 씩 웃었다. 올라간 입꼬리 사이로 뾰족한 송곳니가 보였다. 눈을 반짝거리며 싱글대는 얼굴에 도현이 미간을 좁혔다.
“말 꺼낸 김에 오늘 밤에 찾아볼래?”
“아니.”
질색하며 답하자 오히려 눈이 더 반짝거린다.
도현은 다시금 의문이 일었다.
대체 어느 부분이?
혹시, 내가 저렇게 실없고 경박해 보였나. 검은 눈동자에 미미한 충격이 스며들었다. 도현의 충격을 알 리 없는 휴는 나중에 마음 바뀌면 말하라는 둥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자, 따라와.”
“응.”
도현은 무신경하게 대답하며 앞서가는, 물기가 덜 마른 머리통을 뚫어지게 보았다.
진짜 모르겠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