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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부터 월드스타-555화 (556/582)

제555화. The bower lake school (6)

덜컹, 자판기에서 난 소리에 휴가 몸을 숙여 음료수를 꺼냈다. 그는 시원한 물기가 맺힌 콜라 두 개 중 하나를 도현에게 던졌다.

도현은 두 손으로 캔을 잡아챘다.

“환영 선물이야.”

콜라를 만지작거리던 도현은 고맙다고 인사한 후 뚜껑을 땄다. 탄산이 빠지는 소리와 함께 단 향이 훅 올라왔다. 부글부글 끓는 탄산을 목구멍에 집어넣는 대신 입술을 뗐다.

“여태 방 혼자 썼잖아.”

“그렇지.”

“불편하지 않겠어?”

도현은 자신이 생각이 많은 편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인지만 할 뿐 자제할 생각은 없었다. 자꾸 생각이 나는 걸 어쩌겠어.

그리고 도현의 수많은 생각 중 한 가지는, 룸메이트가 새로 온 입주자를 반기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정이었다.

호박색 눈에 흥미가 깃들었다.

“만약 그러면 어쩌게. 호숫가에서 풀을 베고 자기라도 하려고? 아니면 윌리한테 룸메이트를 바꿔 달라고 할 거야?”

“그럴 리가.”

“그럼?”

도현은 꽤 진지하게 말했다.

“잘 얘기해 봤을 거야. 서로에게 불편하지 않을 방향으로 합의점을 찾았겠지.”

아까까지만 해도 기대감으로 반짝반짝하던 눈이 단숨에 구겨졌다.

“오, 제발. 기숙사 규칙만으로도 귀찮은데 너까지 그러진 말아줘.”

“싫으면 말고.”

도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도현은 뒤늦게 온 사람이었고, 최대한 원래 있던 룸메이트에게 맞춰 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휴가 원하는 바는 각자 자유롭게 지내는 거 같았다.

근데 그러면 쟨 대체 뭘 기대했던 거야.

“면접 끝났지? 만족했으면 가자. 둘러보려면 시간 좀 걸려.”

“응.”

도현은 남은 콜라를 마시며 휴의 옆에 섰다.

이장혁과 함께 기숙사에 들어왔을 때와 달리 로비는 꽤 북적거렸다. 지금이 활동이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오는 시간인 거 같았다.

로비를 지나가는 내내, 거의 그곳에 있는 모든 아이가 휴에게 알은척을 해왔다. 친구가 많구나. 휴는 심드렁한 낯으로 걸려오는 장난을 흘려 넘겼다.

그중엔 도현에게 흥미를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네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야? 저 음침한 모자는 또 뭐고.”

모자를 푹 눌러써 보이는 건 하관 정도가 전부였다. 매끄러운 턱선과 흰 피부는 이곳에서 보지 못한 낯섦이 있어서 절로 눈길이 갔다.

“무슨 상관이야.”

“있어 봐. 처음 보는 놈 같다니까?”

아까부터 도현에게 관심을 보이던 소년이 기어이 머리 위로 손을 뻗었다. 모자를 벗기려는 의도가 다분한 손길에 검은 눈동자 위로 불쾌감이 스쳐 지나갔다.

“피했어?”

그럼 피하지 안 피하냐.

어이없는 심정과 달리 소년은 헛손질한 것에 약이 오른 거 같았다.

“뭔데 이렇게 숨겨? 혹시 여자애 아니야? 야, 휴. 너 이제 여자애 저렇게 데려오냐?”

‘저렇게’라는 부분에 유독 강세가 들어갔다.

도현은 말랐지만, 그렇다고 체구로 성별을 헷갈릴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예쁘장한 얼굴이 가려진 지금은 누가 봐도 남자처럼 보였으니, 저건 그냥 빈정대는 거였다.

도현은 절로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삼켰다.

‘방에서 나온 지 오 분도 안 지난 거 같은데.’

그러나 가만히 있는다고 저 애가 순순히 포기할 거 같진 않았다. 그냥 벗고 끝내자. 도현이 막 모자의 챙을 잡으려던 때였다.

“그래, 레슬리. 네가 평소에 치마를 입고 여자 기숙사에 들어가는 건 알겠어. 근데 다 너 같은 건 아니거든.”

“뭐?”

“진정해. 나는 네 취미를 존중하니까. 근데 내 앞에선 참아줄래? 내가 비위가 약해서.”

“대체 누가 그딴 취미를 가졌다고!”

레슬리가 휴의 멱살을 잡았다. 힘줄이 잔뜩 돋아난 큼직한 손은 금방이라도 주먹을 휘두를 거 같았는데, 휴는 무섭지도 않은지 실실댔다.

“근데 특별한 취미 생활 즐길 시간이 있어? 네가 나한테 몇 번이나 졌더라?”

“젠장, 그딴 취미 없다고! 그리고 저번엔 실수였거든?”

“아, 그래? 그렇게 생각하면 패배가 좀 덜 쓰려? 괜찮아. 너무 상심하지 마, 레슬리. 하나쯤은 나보다 잘하는 게 있겠지. 물론 아직은 못 찾은 거 같지만.”

“휴 모건!”

와락 일그러지는 얼굴이 그 커다란 덩치와 거친 인상과 어우러져 위협적이었다. 그리고 도현은 정신이 나갈 거 같았다. 대체 갑자기 왜 싸우는 건데?

“휴, 진정하고….”

“…좋아, 난 지금 당장 네 얼굴을 찌그러진 플라스틱 캔으로 만들어줄 수 있지만.”

레슬리가 이를 갈았다.

“네가 그것 때문에 졌다고 징징댈 수 있으니 지금은 참겠어.”

탁, 그가 거칠게 휴의 멱살을 놓았다. 휴는 구겨진 상의를 툭 턴 후,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레슬리는 그런 휴를 노려본 후 씩씩대며 자리를 떴다.

폭풍이 지나간 기분이었다.

얼이 나간 도현과 달리 휴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남은 콜라를 마셨다. 캔은 알루미늄인데. 한심한 낯으로 중얼거린 휴가 캔을 던졌다.

휴가 던진 빈 캔이 포물선을 그리며 쓰레기통에 안착하는 걸 보던 도현은 캔이 어딘가에 부딪히며 난 큰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방금 나 때문이지?”

질문을 던진 도현은 대답도 듣지 않고 스스로 답을 내렸다.

“넌 날 도와주려고 했어.”

“내 룸메가 조용한 게 좋으시다니까. 레슬리는 시끄럽거든.”

“좋은 거지, 꼭 그래야만 하는 건 아니야. 그렇게 멱살까지 잡힐 필요는….”

“말했잖아. 난 친절한 룸메이트라고.”

“아니, 무슨.”

“응, 응. 알아. 나처럼 친절한 룸메이트는 지금껏 만나지 못했겠지.”

도현은 말문이 막혔다.

속이 타는 기분에 콜라를 벌컥벌컥 마셨다. 딱히 효과는 없었다. 빈 캔을 손에 쥔 도현은 쓰레기통 앞까지 걸어가 손아귀 힘을 풀었다.

휴의 것이었을 캔 옆에 도현의 캔이 뒹굴었다. 그것을 보던 도현은 생각했다.

어쩌면 마샤의 말이 그리 틀리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리고, 첫 룸메이트는 생각보다 더 이상한 애 같다고.

다행히도 레슬리를 제외하고선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이런 것에 다행을 느끼고 있는 게 슬펐지만, 아무튼 본래 목적대로 학교를 구경할 수 있었으니 다행이었다.

그 과정에서 도현은 알렉산드로 홀 근처에 음악 연습실이 있다는 것과, 앱을 통해 신청하면 재학생 누구나 연습실 사용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거기서 바이올린 연주하면 되겠네.’

안 그래도 바이올린은 어디서 켜야 할지 고민이었는데, 환영할 만한 이야기였다.

“저긴 극장이야. 오케스트라부가 상주하긴 하는데, 누구나 무대에 올라갈 수 있어. 매주 댄스 경연도 있으니까 심심하면 구경하러 가. 꽤 볼만할걸. 아, 그리고 연극부도 저기에 있어.”

“연극부?”

“뮤지컬부도. 둘이 경쟁하는 사이야. 매년 같은 시기에 무대를 열거든. 어느 쪽이 더 티켓을 잘 팔았는지 경쟁하던데…. 작년에 이긴 건 뮤지컬이었던가?”

휴가 도현을 보았다.

“들어가려고?”

“아니.”

고민 없이 나온 대답에 휴가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그게 네 전공이잖아.”

“이 학교에 온 이유도 촬영 때문인걸. 학교에서는 조금 다른 걸 하고 싶어.”

휴는 납득한 눈치였다. 이번엔 도현이 질문했다.

“너는 무슨 클럽인데?”

“승마, 펜싱.”

도현이 눈을 깜빡였다.

휴는 그 말투나 분위기나 행동 모두 느긋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 느긋함은 주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한 심성에서 비롯된 거 같았다.

그래서 머릿속에 편견 같은 이미지가 각인되어 버렸나. 부잣집 자제 같은 취미가 의외였다.

아니, 부잣집 자제 맞지.

The bower lake school은 명망 있는 사립 학교로, 등록금이 비싼 건 물론이고 이를 낼 수 있다고 해서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도 아니었다. 옛날 졸업생들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그들만의 네트워크가 있는 학교였다.

건들거리며 걷는 휴도, 방금 본 우악스러운 소년도 모두 어디 부유한 명문가의 자제란 소리였다.

“원하면 소개해 줄게. 어차피 너도 클럽 하나는 들어야 하니까.”

“그거 의무 사항이야?”

“싫으면 안 해도 돼. 마샤가 일주일에 한 번씩 너를 불러서 면담하는 게 괜찮다면.”

“의무란 거잖아….”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도현은 문득 떠오른 의문을 꺼내었다.

“그럼 내 친구들은 어디 들었는지 알아?”

“친구…. 아, 그 둘?”

도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휴가 입을 열었다.

“여자애 쪽은 모르겠는데 남자애는 알아.”

“헤레이즈?”

“그래. 그런 이름이었던 거 같아. 며칠 전에도 봤어. 펜싱 클럽 신입이거든.”

“…헤레이즈가?”

대답이 한 박자 늦었다. 도현의 표정에 혼란이 일었다.

헤레이즈가 펜싱을?

아니, 할 수도 있지만….

“표정이 왜 그래?”

“음, 의외라서.”

헤레이즈는 몸 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그는 냄새나고 불쾌한 것을 싫어했고, 몸을 움직이면 땀이 나니까.

“좀 특이한 놈이더라. 난 투구 안에 마스크 쓰는 미친놈은 처음 봤어. 본인도 힘든지 거의 혀 빼물던데.”

“…….”

아무래도 헤레이즈가 맞는 거 같았다. 왜 그런 험한 길을 고른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충고해 주자면, 클럽은 잘 정하는 게 좋아.”

“왜?”

“단순히 취미 클럽이 아니라 파벌이 되기도 하거든. 아까 봤잖아. 레슬리.”

“아.”

도현은 이야기가 나온 김에 묻기로 했다.

“레슬리는 왜 널 싫어하는 거야?”

“전에 같은 클럽이었는데 내가 나왔어. 배신자라는 거지.”

“같은 클럽? 어디?”

“있어. 자칭 왕족들이 모인 사교 클럽. 웩.”

휴가 과장되게 토하는 시늉을 했다. 도현은 그가 어쩌다가 클럽에서 나오게 되었는지 왠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마 너한테도 권유할 수 있겠다.”

“나한테?”

“유명하잖아. 보기 좋고. 너 같은 애 갖다 놓으면 딱 과시하기 좋거든.”

“…….”

난 트로피가 아닌데.

“어쩌면 안 할 수도 있고.”

“그건 또 왜?”

“네가 백인이 아니라서.”

들을수록 가관이다. 도현의 미간이 좁아지자 휴가 양손을 들어 올렸다.

“내가 동양인을 싫어한다는 게 아니야. 걔네가 특권 의식에 전 돌대가리란 소리지. 애초에 난 거기 나왔다고. 나랑 안 맞아.”

“…널 안 좋게 본 건 아니야.”

“다행이네. 하루 만에 룸메가 사라지는 건 사양하고 싶거든. 아직 해야 할 게 얼마나 많은데.”

그거 나한테 거부권은 있는 거냐고 묻고 싶었다. 도현은 결국 기운이 쭉 빠진 채로, 힘없이 말했다.

“…학교나 더 구경시켜 줘. 그래서 카페테리아가 어디라고?”

“음, 좋아. 가자. 안 그래도 주방에서 간식 훔쳐 오는 방법을 알려주려고 했어.”

“…….”

어째 방금 도착했는데 벌써 한 달은 지난 기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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