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6화. The bower lake school (7)
부스스, 밤색 머리카락을 베개에 비빈 소년이 낮게 중얼거렸다. Fucking school. 책상에 앉아 책을 읽던 도현은 생각했다. 아침 인사가 화려하네.
“오늘도 학교가 불타지 않았다니. 믿을 수가 없어.”
온갖 욕설을 뱉던 휴가 무거운 눈을 간신히 떴다. 그는 잠시 몽롱한 눈을 하다가, 느릿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아직 꿈속인가? 어제 처음 만난 내 룸메이트가 책을 읽고 있는 거 같아.”
“내가 봤을 땐 깬 거 같은데.”
“망할, 진짜라고?”
욕설을 내뱉은 그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 아침부터? 진심이야?”
도현은 뭐가 잘못된 건지 몰라 눈만 끔뻑였다. 그러자 완전히 잠에서 깬 휴가 그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그래. 네가 다녔던 학교에서는 아침 일찍 책을 읽는 문학 소년이 통했나 본데, 여기서는 아니야. 특히 나한테는.”
도현은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컨셉이 아니라고? 아니면 널 꼬실 생각은 나도 없었다고? 어느 쪽도 이상했다.
“좋아. 알아들었으면 네 모자 챙겨. 아침 가지러 가게.”
“가지러?”
“난 원래 아침엔 아무것도 안 먹어. 그러니까 지금 나가는 건 오직 너를 위한 거지. 같이 가줄 순 있지만, 네가 다 먹길 기다리고 싶진 않아.”
휴는 첫 만남에 자기 자신을 ‘친절한 룸메이트’라고 소개했다. 처음엔 대체 무슨 헛소린가 했는데, 갈수록 맞는 말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고마워.”
“응. 계속 감동해.”
설렁설렁 대답한 휴가 화장실에 들어갔다. 문을 닫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세수하는 물소리가 다 들렸다. 도현은 휴의 말대로 모자를 챙겼다.
등교까지는 시간이 남았기 때문에 교복을 입진 않았다. 도현과 휴는 편안한 차림으로 기숙사를 나섰다.
카페테리아는 어제 한번 가봐서 길을 헤매는 일은 없었다. 가보기뿐일까. 주방에 몰래 들어가는 법까지 배웠다. 정말 궁금하지 않은 정보였다.
“-셋, 넷!”
카페테리아에 발을 들인 도현은 아침부터 이상한 걸 보았다. 한 곳에 우르르 몰린 아이들은 무언갈 보고 즐거워하고 있었다. 도현의 눈에도 그 광경이 들어왔다.
“다섯!”
고학년인 듯, 도현보다 키가 큰 소년이 시리얼을 던지자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한 소년이 폴짝 뛰어 그걸 입으로 받아먹었다. 하나씩 성공할 때마다 주변을 둘러싼 아이들이 웃어댔다.
“여섯, 일곱…!”
“아!”
시리얼 하나가 눈가를 때렸다. 입이 아니라 관자놀이에 부딪힌 시리얼이 바닥에 톡 떨어졌다. 그에 시리얼을 던지던 소년이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흘리면 어떡해. 기껏 손수 준 건데.”
“미, 미안해.”
“정말 미안해? 그럼 내가 준 걸 버리진 않겠지, 설마?”
깊이 눌러쓴 모자 아래, 그늘진 검은 눈이 찌푸려졌다. 현재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운 탓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검은 눈이 크게 뜨였다.
“으, 저걸 주워 먹었어. 우웩.”
“거지새끼!”
조롱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주워 먹기를 종용한 소년이 그 소년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했어, 포비. 먹을 걸 버리면 안 되지.”
성의 없는 두드림 이후 무리는 우르르 멀어졌다. 홀로 남은 소년은 고개를 푹 숙인 후 재빨리 자리를 떴다. 아까부터 눈매를 구기고 있던 도현은 옆에서 들린 혀 차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침부터 운도 없지.”
휴의 말에는 약간의 안타까움이 깃들어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호박색 눈에 담긴 건 타인을 향한 무심함이었다.
“방금 뭐야?”
“뭐긴 뭐야. 유치한 놀이지.”
“놀이?”
“말했잖아. 자칭 왕족들이라고. 자기들은 왕족이라서 다른 애들을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해. 폭정이지, 폭정.”
심드렁한 말투였다.
도현은 휴가 이 화제에 관심이 없음을 느꼈다. 그래도 계속해서 물었다.
“다른 애들이 가만히 있어?”
“그럼?”
“선생님께 알리거나….”
“아, 선생님.”
휴가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를 알 수가 없어서 도현은 입을 다물었다. 휴는 가벼운 한숨을 내쉰 후 도현을 돌아보았다.
호박색 눈동자가 투명하게 빛났다.
“쟤들이 왜 스스로 왕족이라고 칭할 수 있을 거 같아?”
대답을 요구하는 말은 아니었다.
“똑같은 교복을 걸쳐도 정말 똑같은 건 아니야. 방금 시리얼 던진 놈. 걔는 시몬 맥어보이야. 맥어보이 들어본 적 있어? 클래스 8 이상의 트럭을 주로 만드는 곳인데.”
도현이 고개를 젓자 휴가 어깨를 으쓱였다.
“트럭에 관심 없으면 아무래도 알기 힘들지. 아무튼 그곳이 쟤네 가문에서 운영하는 기업이야. 그리고 네가 불쌍해한 애는 부모님이 그쪽에 부품을 납품해. 이제 알겠어?”
도현은 대답 없이 가만히 눈살만 찌푸렸다.
“네가 도와주려고 해봤자 소용없어. 오히려 더 싫어할걸.”
“…….”
도현이 물끄러미 바라보자 등을 돌린 휴가 뷔페식으로 차려진 부스에서 사과 한 알을 가져와서 던졌다.
도현은 제 품에 날아든 사과를 잡지 못하고, 그것이 명치를 가볍게 때린 후 아래로 추락할 때 간신히 두 손으로 받치기에 성공했다.
“아침은 그거면 되지?”
“…응. 너는?”
“난 패스.”
도현은 기숙사로 돌아가는 내내 싱숭생숭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그것을 보고 혀를 차던 휴는 방에 도착했을 때 말했다.
“네가 그렇게 될 일은 없어.”
“왜? 유명해서?”
“우와. 네 입으로 말하니까 진짜 재수 없다.”
가벼운 말투는 분위기를 풀려는 듯 장난스러웠다. 도현은 그제야 자신이 룸메이트를 눈치 보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오려는 한숨을 삼킨 도현은 매끄러운 사과를 한입 베어 물었다.
“맛있네.”
마음이 얼마나 복잡하든, 사과는 달았다.
휴가 일어나기 전에 한번 씻었지만, 도현은 사과를 다 먹은 후 다시 한번 씻었다. 찬물로 씻으니 기분이 조금 나아진 거 같기도 하고.
샤워를 마친 도현은 옷장에서 교복을 꺼냈다. 와인색 교복 바지에 흰 와이셔츠, 그리고 바지와 같은 색상의 넥타이. 깔끔함이 강조되었던 가연 예술 중학교와 달리 보다 화려한 느낌이었다.
교복을 차례로 걸친 도현은 거울을 보며 넥타이를 바로 매었다. 낯선 교복을 입은 소년이 거울 속에 비쳤다.
“스케줄은?”
“어제 교장 선생님께 받았어. 여기.”
The bower school의 체계는 한국 학교와도, 그리고 델마 아카데미와도 조금 달랐다. 가장 큰 차이는 학급이었다.
이곳은 학급이란 게 없었다.
정해진 시간표대로 각 선생님의 교실을 찾아가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7분 정도 되는 짧은 쉬는 시간 동안 반을 계속해서 이동해야 했다.
“첫 수업이…. 과학이네. 같이 가진 못하겠다.”
“넌 뭔데?”
“스페인어.”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부터 휴가 도와주고 있긴 하지만, 그를 어미 오리처럼 따라다닐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가는 길에 락커는 알려줄게. 어차피 나도 가야 하니까.”
“응, 고마워.”
“책은 다 챙겨. 바인더도 받은 거 있지?”
“응.”
“그것도 챙겨. 어차피 다 락커에 넣어두니까. 아, 스케줄 잊지 말고. 첫날부터 결석하기 싫으면. …왜 그렇게 웃어?”
“아니, 진짜 친절하다 싶어서.”
“뭐?”
놀라길래 처음엔 민망해하는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내가 그렇다고 했잖아.”
그걸 이제 알았냐는 듯이 타박하는 휴의 모습에 웃음이 났다. 아침의 일은 아직도 충격적이었지만, 그래도 이곳에서 만난 새 친구는 좋은 아인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게.”
싱겁다는 표정을 지은 휴가 현관으로 갔다. 도현은 자연스레 모자를 챙기려다 멈칫했다. 맞다, 지금은 아니지.
미련 없이 모자에서 손을 뗀 도현이 이번엔 태양을 가리는 그늘막 없이 나왔다.
탁, 문 닫히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 * *
건물 안에 들어서자, 문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벽에 붙은 사물함이 보였다. 길쭉한 사물함 주변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도현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락커를 찾았다.
“비밀번호는 마샤한테 들었지?”
“응, 30-46-2….”
“아니, 나한테 알려주면 안 되지. 내가 뭐 가져가면 어떡하려고.”
“그럴 거면 방에 있는 걸 가져가겠지.”
“그건 그렇네.”
우스운지 웃음기 담긴 목소리로 답한 휴가 락커 여는 법을 알려주었다.
오른쪽 두 바퀴, 그리고 첫 번째 숫자, 다시 왼쪽 한 바퀴, 두 번째 숫자. 다시 오른쪽 한 바퀴, 세 번째 숫자. 그렇게 돌리자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락커가 열렸다.
“너 스케줄 다시 줘봐.”
“응? 응. 여기.”
도현의 스케줄을 유심히 보던 휴가 말했다.
“과학 다음에 세계사잖아. 두 교실은 가까우니까 세계사 교재까지 미리 챙겨 가.”
“아, 응.”
도현은 그 말대로 과학과 세계사 교재, 그리고 바인더까지 챙겼다. 그러자 휴가 묘한 눈길로 도현을 보았다.
“왜?”
“아니. 개를 키우는 기분이라.”
“…….”
어미 오리란 생각까진 했지만, 그래도 개는 좀…. 도현의 낯이 미묘해지자 휴가 낄낄 웃으며 그의 어깨를 쳤다.
“과학은 거기 적힌 대로 에즈라 선생님 교실이야. 저쪽 복도로 가서 꺾으면 되니까 잘 찾아가.”
고개를 끄덕이자 휴가 휘적휘적 걸어갔다. 휴 모건! 누군가 휴에게 다가가 와락 어깨에 팔을 걸었다. 두 사람은 친한 사이인지 투닥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멀어지는 뒤통수를 보고 있던 도현은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시선이 쏟아졌다.
학교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휴와 대화를 나누는 내내 쏟아졌던 시선이었다.
와인색 교복을 입은 아이들은 가연 예술 중학교에서 그랬듯이 크게 웅성거리거나 도현을 따라다니진 않았지만, 도현이 지나간 자리를 주시했다.
그 중심에 선 소년의 낯은 동요 없이 매끄러웠다. 늘 그렇듯 가벼운 미소를 머금은 도현이 휴가 가르쳐준 방향으로 발을 뻗었다. 언제나 그랬듯, 시선은 익숙하니까.
도현은 복도를 가로질렀다. 휴가 말한 코너를 돌고 나자, Ezra라고 써진 팻말이 보였다.
저기구나, 과학 교실이.
도현은 망설임 없이 반 안에 발을 들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