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557화 (558/582)

제557화. The bower lake school (8)

“어.”

“오.”

애매한 탄성에 담긴 의미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도현은 삼삼오오 무리 짓고 있는 아이들을 훑어보았다.

따로 정해진 자리는 없다고 했지.

적당한 자리를 물색하던 눈이 복도 쪽 두 번째 줄에서 멈췄다. 교탁과 가까워서 그런지 아니면 복도와 가까워서 그런지 유독 교내 인구 밀집도가 낮았다.

스륵, 옆에서 조용히 움직이는 흰 무언가에 자연히 눈길을 빼앗겼다. 소년은 그것이 손이라는 걸 깨달았다. 손이 뭐 저리 예뻐. 당연한 수순으로 시선이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의 눈이 커졌다.

도현이 물었다.

“자리 있는 건 아니지?”

“어? 어….”

“다행이네. 반가워, 이도현이야.”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교실에서 만난 첫 친구에게 나름 살갑게 말을 붙였던 도현은 머쓱해졌다. 음, 아니다. 갑자기 모르는 얼굴이 나타나서 말 걸면 당황스러울 수도 있지.

모르겠다. 그냥 웃자.

눈웃음으로 인사를 무시당한 어색함을 가린 도현은 자연스레 시선을 돌렸다. 마침 핸드폰 화면엔 친구들의 문자가 실시간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진 레이시 : 등교했어? 교실이야?]

[진 레이시 : 교환 학생이라니! 내가 더 떨려. 심지어 기숙 학교라며. 부럽다. 나도 기숙사 살아보고 싶어…. 근데 왜 우리 학교가 아닌 거야? 너는 델마 베이비인데!]

궁금한 건지, 부러운 건지, 화가 난 건지. 정체성이 불분명한 문자에 도현의 입꼬리가 느슨하게 올라갔다.

[니콜라스 가비 : 첫 등교 축하해. 이번엔 만날 수 있는 거겠지?]

아. 도현은 탄식을 삼켰다.

니콜라스는 지난 겨울 방학에 도현을 만나지 못한 걸 무척 분하게 여겼다. 서로 바빴으니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음반 제작 과정을 지켜보지 못한 것에 미련이 남는 모양이었다.

[응. 내가 찾아갈게. 선물도 들고.]

음반을 들고 가서 같이 듣는 거다. 그리고 그걸 연주할 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떤 기분이었는지, 얼마나 즐겁고 황홀했는지 말해주자. 그가 원한다면 몇 곡을 직접 연주해 들려줘도 좋을 것이다.

상상만 해도 즐거워서 입가에 실같이 가는 미소가 스며들었다.

그 후로도 두 사람은 서로 질세라, 화면 잘 날 없을 정도로 문자를 보내 댔다. 정신없이 문자를 주고받던 도현은 어느 순간 이곳이 첫 교실이고, 또 제게 관심이 쏠려 있다는 걸 반쯤 잊어버렸다.

도현이 핸드폰을 끈 건 동근 안경을 쓴 성인 여성이 들어왔을 때였다. 그녀는 물을 떠 온 건지 텀블러를 교탁 위에 내려놓다가 도현을 보고 멈칫했다.

“아, 오늘부터 등교구나.”

“네.”

“반가워. 자리는 잘 앉았네. 앞으로도 그냥 빈자리에 앉으면 돼. 아, 네가 학기 중에 와서 못 받은 유인물들이 있는데… 그건 다음 주 수업 시간에 줄게. 오늘은 못 챙겨서. 괜찮지?”

“네, 감사합니다.”

얌전한 대답에 에즈라가 농담을 건넸다.

“벌써 할리우드 배우가 셋이야. 팬 사인회라도 열어야 하는 거 아닌가 몰라.”

그러나 웃는 사람이 없어서 그녀는 민망한 낯으로 급히 수습했다. 공부할 때 막히는 부분이 있거나, 아니면 학교생활 관련해서 궁금한 게 있어도 언제든 찾아오라는 말에 도현은 수긍했다.

이후론 수업 시간이었다.

‘한국 진도랑 비슷한데 배우는 내용이 좀 다르네.’

봤던 내용도 있고, 아닌 내용도 있고. 비교하며 듣다 보니 나름 재밌었다. 원래 과학은 좋아하는 과목이기도 하고 말이다.

집중하다 보니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오늘 숙제는 없고, 다음 시간에 봐요. 자, 끝.”

세계사가 가까운 곳에 있다고 했지.

교과서를 덮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도현은 따끔거리는 뺨에 고개를 돌렸다.

“다음에 보자.”

또 대답이 없다.

이번엔 별로 어색해하지 않고 시선을 거둔 도현이 책을 품에 안았다. 쉬는 시간은 짧고, 자신은 세계사 교실이 어디 있는지 모르니 굼뜨게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렇게 꽤 바삐 복도로 나온 도현은 뒤늦게 깨달았다.

나, 첫 수업에 친구 아무도 못 사귀었네.

“…….”

순간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도현은 복도에 멀뚱히 서 있다가, 이내 생각을 달리했다.

‘그럴 수도 있지.’

겨우 첫 수업이었잖아.

도현은 자연스레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그래. 친구는 세계사 시간에 사귀면 될 일이다. 그리고 안 되면 천천히 사귀든가…. 아니면 휴랑 잘 지내면 되지.

도현은 이제 저를 좋아해 주는 친구들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 우정이 쉽게 틀어지거나 사라지지 않으리란 것도. 그 확신은 도현의 마음 깊은 곳에 깃들어, 교우관계에 쉬이 불안해하지 않는 느긋함을 선물해 주었다.

그런데 너무 느긋했던 걸까?

도현은 점심시간이 될 때까지 제대로 된 대화를 한 번도 나누지 못했고, 홀로 덩그러니 락커 앞에 서 있는 상황을 맞이했다. 탁, 락커를 닫은 도현은 눈을 굴렸다.

점심시간인데 어쩌지.

잠깐 휴를 찾아가 같이 먹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가 개를 키우는 거 같다고 한 말이 생각나자 그러고 싶은 마음이 팍삭 시들었다.

뭐, 어쩔 수 없지. 혼자 먹는 수밖에.

깔끔하게 결론 내린 도현이 막 몸을 돌릴 때였다. 뒤에서 덮쳐온 무게감에 몸이 휘청였다.

“르옌!”

시냇물처럼 맑지만, 어딘가 몽롱한 목소리. 그런 목소리를 가진 사람은 도현이 아는 사람 중에선 한 명밖에 없었다.

“…신시아?”

“응! 안녕!”

한 박자 늦게 허브향이 코끝을 찔렀다. 신시아가 늘 체향처럼 두르고 다니는 향이었다. 도현은 반가운 미소를 매달고 몸을 돌려 그녀를 마주 안아 주었다.

“신시아. 오랜만이야.”

“난 안 보이나 봐.”

“아.”

도현은 그제야 절 찾아온 게 한 명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이마 위로 연한 금발을 늘어트린 소년은 도현과 같은 와인색의 교복을 입은 채였다. 백금발과 청회안, 그리고 와인색 교복은 하나의 작품처럼 어우러져 그 존재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안 보일 수가 없는 존재감을 가진 소년에 도현의 눈매가 또다시 기쁘게 휘었다.

“308호? 나랑 다른 층이네. 그래서 못 봤나 보다. 나는 501호야.”

그들은 함께 카페테리아로 향하며 대화를 나누었다. 오랜만에 만나도 어색함은 없었다.

“룸메이트는 누구야?”

“없어.”

“없다고?”

톡, 헤레이즈가 자신의 마스크를 살짝 건드렸다. 도현을 처음 볼 땐 벗었던 것을 어느새 다시 착용한 채였다.

“냄새에 예민하다니까 독방을 주더라고. 그거 하난 편하더라.”

그렇게 예민하면서 펜싱 클럽엔 왜 든 걸까. 풀리지 않는 의문에 도현의 고개가 기울었다. 그때 신시아가 불쑥 끼어들었다.

“난 있어. 로즈마리란 친구야. 무척 작고 예뻐. 로즈마리처럼!”

“마음에 들었나 보네.”

“응, 로지는 귀여워.”

객관적으로 신시아는 누군가를 귀여워할 외향이 아니라 귀여움 받을 외향이었다. 지금도 높이 묶어 살랑대는 머리칼에 시선을 빼앗긴 이들이 늘어나고 있었고.

작게 웃은 도현이 말했다.

“너도 귀여워.”

“르옌도 귀여워!”

우욱, 헤레이즈가 속이 불편하다는 듯이 헛구역질을 해댔다. 도현은 은근한 미소를 걸고 물었다.

“너도 해줄까? 귀여….”

“하면 죽인다. 진짜 죽일 거야!”

헤레이즈가 사납게 눈을 치떴다.

“알았어. 안 할게.”

기겁한 모습에 충분히 만족한 도현은 그를 더 괴롭히지 않았다. 파들파들 떨던 헤레이즈는 한숨을 내쉬더니 툭, 말을 뱉었다.

“너, 내가 너 왜 찾아왔는지 알아?”

“보고 싶어서?”

정색한 낯빛에 주춤한 도현이 조심스레 정정했다.

“반가워서?”

“하…. 됐고. 지금 너에 대해 무슨 얘기가 도는지 알…. 아니, 모르겠지. 그래.”

“무슨 얘기가 도는데?”

“너 더럽게 싸가지 없다고.”

“뭐?”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눈이 동그래졌다. 헤레이즈는 그런 도현을 한심한 눈으로 보았다.

“말 섞는 거 싫어해서 입 안 열고, 누가 말 걸어도 눈에 안 차면 대답 안 하고.”

내가 언제?

무시당한 씁쓸한 기억밖에 없는 도현의 눈매가 억울하게 내려갔다.

“무엇보다, 첫날부터 싸웠다며. 그것도 골든 이글이랑.”

“골든 이글? 검독수리? 학교에서 독수리도 키워?”

“무슨 헛소리야. 설마 몰랐…. 후우. 그래, 관심도 없었겠지.”

피로한 낯을 한 헤레이즈가 골치 아프다는 듯이 말했다.

“네가 들이받은 애. 걔가 속한 클럽이야. 골든 이글. 어떻게 하면 첫날부터 그런 사고를 치는 거야?”

딱히 아무것도 안 했는데.

멀뚱하게 헤레이즈를 쳐다보던 도현이 생각에 잠겼다.

그거 말하는 건가?

첫 교시를 마친 도현은 꽤 의욕에 찬 상태였다. 다음 교실에선 제대로 된 대화를 해보자. 그런 생각을 했다.

세계사 교실은 휴의 말대로 과학 교실에서 아주 가까웠다. 바로 옆 교실이었으니까. 덕분에 도현은 여유를 얻었고, 교실을 둘러보다가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또래보다 큰 덩치, 살짝 두꺼운 코와 짧은 머리카락.

레슬리.

그 이름을 떠올린 것과 레슬리가 입을 연 건 동시였다.

- 맞지? 배우.

- 응.

- 반갑다. 레슬리 클락이야.

레슬리는 도현을 알아보지 못한 눈치였다. 선이 굵은 얼굴에는 지우지 못한 호기심과 관심이 진하게 묻어났다.

도현은 그를 보며 물었다.

- 나 모르겠어?

- 뭐?

그는 기가 찬 눈으로 도현을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아서라. 네가 르옌인 건 이미 알아. 굳이 그렇게 자랑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돼. 게다가 넌 세 번째 주자라고. 희귀성을 잃었어.

- 아니, 네가 어제 내 모자를 벗기려고 했잖아.

- 모자? 무슨…. 잠깐.

레슬리는 놀란 눈으로 도현을 보았다.

- 그 여자애가 너였다고?

- 내가 여자로 보여, 레슬리?

- 젠장, 그럼 네 룸메이트가 망할 휴 모건이야?

- ‘그냥’ 휴 모건이야.

부러 ‘그냥’에 악센트를 주었는데 알아차린 눈치는 아니었다.

- 왜 그딴 놈이랑 방을….

헛웃음인지, 탄식인지 모를 것을 뱉던 레슬리는 곧 혀를 찼다.

- 네가 고른 건 아니겠지. 그래, 너는 운이 없어서 그 자식한테 걸린 거야. 불쌍하긴.

도현은 침묵했다.

그게 딱히 동의의 의미는 아니었는데, 레슬리는 자신이 좋을 대로 편하게 해석했다.

- 좋아. 이 레슬리 님이 널 도와주지. 마침 방을 혼자 쓰는 애가 있거든. 거기로 옮기게 해줄게.

레슬리가 비뚜름하게 웃었다.

- 이만하면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겠지?

도현은 멋대로 구는 소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느릿하게 말했다.

- 어젠 여자애로 오해하고 내 모자를 집요하게 노리더니, 오늘은 방을 바꾸라고 하고. 내가 네 취향이야, 레슬리 클락?

세상은 넓고 취향은 다양하니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레슬리는 아닌 모양이었다. 난폭하게 뻗어진 손이 허공을 갈랐다.

레슬리와 도현의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 다 전날의 일을 떠올린 게 분명했다. 레슬리는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헛손질한 것에 아침에 휴가 준 사과처럼 낯빛을 붉게 물들였다.

아, 화난 거 같은데.

- 레슬리, 왜 흥분하는 거야?

도현은 일단 차분히 대화를 시도했다.

- 이, 음침한 동양인 새끼가…! 네가 뭐라도 되는 거 같아? 넌 그냥 고물 앞에서 재롱이나 떠는 광대 놈이야! 주제도 모르고 감히….

물론 딱히 효과는 없었다. 인종차별적 발언에 직업 비하까지 골고루 하는 레슬리에 도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 대답을 안 해서 그래? 그건 거절할게. 방을 옮기고 싶지도 않고, 네가 이렇게 흥분한 이유도 모르겠거든.

- 하, 벌써 그 박쥐한테 빌붙었나 보지?

분노를 토해내던 레슬리는 뺨을 비틀었다.

- 아니, 아니지. 수준이 딱 맞아. 더러운 박쥐랑 음침한 칭챙총. 잘 어울리잖아?

두 눈에 저열한 기대감이 깃들었다. 모욕감에 치를 떨기라도 할 줄 알았나. 그 기대가 무색하게도, 도현은 인종차별적 발언에 꽤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도현은 도리어 안타까이 그를 쳐다보았다.

- 동양에는 중국 말고도 나라가 많아. 설마 아는 나라가 중국뿐인 건 아니지?

레슬리는 새빨개진 낯으로 욕을 쏟아부었다. 뭐라고 경고를 한 거 같기도 했다. 안 들었지만.

깜빡, 생각에서 깨어난 도현이 검은 속눈썹을 팔랑였다.

“별로. 아무것도 안 했어.”

별말 안 했는데 알아서 화내고 욕하는 걸 어떡하는가. 도현의 경험상 그런 사람들은 도현이 뭘 해도 욕하고 싫어했다. 덤덤히 말하던 도현은 문득 코끝을 찡그렸다.

“그래서 다음 시간부터 아무도 나한테 말을 안 걸었나?”

깨달음이 스민 말에 헤레이즈는 심각한 고뇌에 휩싸였다. 지금이라도 얘를 버리고 가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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