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8화. The bower lake school (9)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은 제각기 기숙사나 클럽으로 향했다. 신시아가 수업 끝나고 산책을 제안했지만, 도현은 거절했다. 선약이 있기 때문이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고 기다리자 커다란 문이 열렸다. 마샤가 문 앞에 선 소년을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잘 왔어요. 우리 학교 교복이 아주 잘 어울리네요.”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를 한 도현은 교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마샤의 부름으로 수업이 끝나고 그녀의 공간을 찾아온 참이었다.
“새로운 학교는 어떤지 물어보려고 불렀어요. 오늘 첫 등교를 했잖아요. 어땠어요?”
“좋았어요. 수업도 좋고, 학교도 좋고.”
“친구는요?”
마샤는 예리했다.
도현은 조금 뜸을 들이곤 말했다.
“제 친구들을 만나서 좋았어요. 오랜만에 보는 거거든요.”
“아, 그렇죠. 다른 곳에 있었으니까 오랜만이었겠어요. 그럼 새로운 친구는 사귀었나요?”
빠져나갈 틈을 안 준다. 결국 도현은 진실을 말했다.
“아직은, 아니요.”
“첫날이니까 그럴 수 있죠. 천천히 적응하면 돼요. 클럽도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데 도움이 되죠.”
“클럽은 신중히 들어가려고요.”
“오, 그것도 좋죠. 원하는 클럽이 있다면 방문해봐요. 직접 체험해보는 것만큼 좋은 게 없으니까.”
“참고할게요. 감사해요.”
“아, 그리고 도현을 부른 이유는 더 있어요. 페어리 픽처스에서 도현을 한 달에 한 번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외출을 시켜달라고 하더군요.”
“상담이요?”
혹시 막 캐스팅됐을 때 있었던 일들 때문인가. 도현의 미간이 좁아지는데 마샤가 말했다.
“헤레이즈와 신시아도 함께요. 개인적으로 반가운 얘기더군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건강한 정신이니까요. 그래서 매달 셋째 주 토요일로 할까 하는데, 어떤가요?”
나만 하는 게 아니구나.
생각해보면 당연했다. 종종 영화 제작사나 소속사 측에서는 배우의 정신 건강과 원활한 촬영을 위해 촬영 중 심리 상담을 지원했다.
“두 사람은 어떻게 대답했어요?”
“상관없다고 했어요.”
“그럼 저도 괜찮아요. 그날로 할게요.”
“상담받는 것도 괜찮나요?”
예전에. 그러니까 서혜나가 처음 도현을 메리에게 데려갔을 때, 도현은 큰 거부감을 느꼈다.
누군가가 나를 파헤치고 분석하는 게, 남 앞에 날것의 감정을 드러내는 게 싫었다. 어색하고 이상했다. 꺼림칙했다.
“괜찮아요.”
그러나 지금은 신기하리만치 아무렇지도 않았다.
* * *
“아하하하!”
벌렁, 뒤로 넘어간 휴가 제 침대에 머리를 비벼대며 폭소했다. 어찌나 웃는지, 스스로 고통스러워 붉어진 낯으로 눈물을 찔끔 흘릴 정도였다.
“아, 미치겠다.”
간신히 진정한 숨결이 미세하게 떨렸다. 또다시 터지려는 폭소를 간신히 누른 휴가 걸작을 보는 눈으로 도현을 보았다.
룸메이트 거절하질 않길 잘했지.
소년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두 눈엔 즐거움이 담뿍 묻어난 채였다. 기실 그는 도현에게 하루 사이 일어난 일들을 듣고 무척 행복해하는 중이었다.
“거절도 가능해?”
“응. 방 혼자 쓰는 건 나뿐이 아니니까. 의사를 먼저 물어보고 방을 배정해.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룸메이트를 들인 건 최고의 선택이었어.”
어투가 묘하게 거슬렸다. 눈앞에서 재롱떠는 강아지가 된 기분이었다. 도현의 낯이 떨떠름해졌다.
“그나저나, 걘 의외네.”
“누구?”
휴가 자신의 관자놀이에 대고 손가락을 한 바퀴 돌렸다.
“헤레이즈가 왜?”
“걘 골든 이글에 들어가려는 거 같던데.”
“헤레이즈가?”
“흠, 내가 클럽에서 나와서 배신자 됐다고 했지? 짐작했겠지만, 그 클럽이 골든 이글이야.”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까진 대충 알고 있었다.
휴는 그런 도현을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도현을 마주 보았다.
“너도 알고 있는 게 좋겠지. 레슬리한테 한 방 먹였으니까 엮이기 싫어도 엮이게 될 테고.”
“난 그런 적 없어.”
“그래. 네 그런 점도 재밌어.”
놀리듯 빙글 웃은 휴가 말했다.
“스스로 왕족이라고 칭하는 애들이 모인 클럽이긴 한데, 거기서도 또 진짜 왕족처럼 군림하는 애들은 따로 있어. 일단 한 명은 시몬 맥어보이. 네가 아침에 본 걔야. 기억하지?”
잊을 리가 없었다. 아직도 낄낄대던 목소리가 귓가를 갉작였다. 도현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휴가 혀를 찼다.
“그리고 둘 정도 더 있어. 아이덴 커티스랑 라비니아 로페즈. 커티스는 정계에서 유명해. 걔 할아버지가 우드로 커티스인데….”
“캘리포니아 법무장관?”
“알고 있네? 맞아. 조지 브라운한테 밀려서 주지사는 못 됐지만. 아무튼 시어도어 커티스도 의원 자리 하나 차지하고 있고…. 얼마 전에 시드니 커티스가 윈스턴 로드리고랑 약혼한 걸 보면, 우드로가 주지사 자리를 아직 포기 안 했나 봐.”
도현의 눈매가 좁아졌다. 아침에 못 본 척 지나가던 아이들의 얼굴이 떠오르며 입 안이 썼다. 고작 청소년들인데, 벌써….
“로페즈는 들어봤을걸. 로페즈 호텔은 미국 전역에 뻗어 있으니까.”
“머문 적 있어. 뉴욕에서 라디오 찍을 때.”
“아, 그래? 그럼 이해하기 쉽겠네. 그 로페즈 호텔을 운영하는 로페즈야. 라비니아 로페즈. 거의 뭐, 공주님이지. 걔도 그렇게 생각할걸?”
“그래서 헤레이즈랑은 무슨 상관이야?”
대단하다는 건 알겠다. 솔직히 별로 실감은 안 났다. 도현의 부모님도 한 기업의 CEO라지만, 로페즈에 빗댈 정도는 아니었다. 로페즈와 비교하자면 세계 굴지의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도의 차이였다.
근데 그건 그거고.
그게 헤레이즈랑은 무슨 관련이란 말인가?
“그 공주님이 요즘 제일 관심 있는 게 네 친구거든.”
아, 도현이 탄식했다. 그제야 어떻게 헤레이즈가 엮이게 된 건지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본인도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던데. 아니, 펜싱 클럽에 든 걸 보면 의욕이 넘친다고 봐야 하나.”
“펜싱 클럽은 왜?”
“펜싱 클럽 주장이 아이덴 커티스야.”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보가 쌓여갔다. 마지막으로 떠오른 건 카페테리아 앞에서 망설이던 헤레이즈의 얼굴이었다.
“그런데 네가 첫날부터 레슬리랑 척졌잖아. 걔한테 너만 한 폭탄도 없어.”
부정하기 어려웠다.
헤레이즈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그곳에서 가장 이득이 되어 보이는 사람, 그러니까 루카 하퍼에게 지속적인 호감과 호의를 표했다.
심지어는 유별난 섬세함이 누군가에겐 눈엣가시로 보인다는 걸 알아 촬영장에선 한 번도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그에게 촬영장에 있는 이들은 모두 잘 보여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었다.
정말 참기 힘들 땐 몰래 나가거나 도현의 주변을 맴돌았지만.
“너를 버릴 수도 있어.”
휴의 말에는 아무런 의도도 없었다. 그저 사실을 전하는 듯이 투명한 호박색 시선이 전부였다.
“너는?”
“나 뭐?”
“넌 골든 이글 나왔다며. 근데 펜싱 클럽 주장이 아이덴 커티스고. 너는 괜찮아?”
조심스러운 물음에 눈을 크게 뜬 휴가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나 걱정한 거야?”
두 눈이 아주 초롱초롱, 반짝반짝했다.
도현의 낯이 대번에 식었다.
“누구나 하는 평범한 걱정이니까 주워온 고양이가 무릎에 앉은 표정은 치워주면 좋겠다.”
“와, 너 내 생각도 읽어?”
어이없어서 말이 막혔다.
진짜 고양이같이 생긴 게 누군데. 도현이 떫게 쳐다보자 휴가 장난치던 걸 그만두고 픽 웃었다.
“괜찮아. 레슬리랑 다르게 아이덴은 똑똑하거든. 뭐가 이득이고 아닌지 알아. 그리고 공사를 구분할 줄 아는 머리도 달렸지.”
“그럼 다행인데….”
“내가 펜싱 클럽에서 불쌍하게 얻어맞는 일은 없으니 네 이야기나 좀 해 봐. 네 배우 친구가 널 버리면 어쩔 건데?”
도현은 잠깐 휴를 응시했다.
생기 넘치는 얼굴과 그의 인상에서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호박색 눈동자. 어디 가서 불쌍해질 거 같은 얼굴은 아니었다.
‘오히려 재밌다고 웃으면 모를까.’
그 광경이 어쩐지 그려지는 듯해서 도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럴 거야.”
“음, 둘이 친한가?”
“아니, 그보단….”
헤레이즈와 도현은 서로 버리고 말고 할 사이가 아니었다. 친구라면 친구라 부를 수 있지만, 진과 니콜라스, 혹은 다른 친구들과는 조금 다른 것도 사실이었다.
“나랑 몇 년간은 계약으로 묶인 상황이라서. 가 완결하면 모를까, 그 전에 그러진 않을 거야.”
“아하, 그럴 수 있겠네.”
이해한 기색으로 대답한 휴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도현을 보았다.
“너 이런 건 하나도 모를 줄 알았는데. 아니면 신경 안 쓰거나.”
“왜?”
“신경 쓰는 놈이 첫날부터 눈에 띄는 짓을 할 리가 없잖아.”
멋대로 군 건 레슬리인데 주변인들이 자꾸 자신이 사고 친 것처럼 말하니 기분이 좋진 않았다. 도현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말하지만, 일부러 그런 적 없어. 그리고 헤레이즈는 봐 온 시간이 기니까 그냥 아는 거지. 그리고, 휴.”
“응?”
“너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지?”
휴가 무구한 낯을 했다. 깜빡 속아 넘어갈 법한 연기력이었으나 도현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눈을 떼지 않고 쳐다보자 순진하게 눈을 끔뻑이던 휴가 백기를 들었다.
“오늘일 줄은 몰랐어.”
“예상은 했다는 거네.”
“뭐어….”
휴가 어깨를 으쓱였다.
“레슬리는 나를 끔찍하게 싫어하고 너는 내 룸메이트니까. 부딪힐 일이 있겠다 싶긴 했지. 하지만 생각해봐. 첫날부터 너는 덩치만 큰 머저리한테 사사건건 시비가 걸리고 성가셔질 운명이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
도현이 대답하지 않자 휴가 슬쩍 눈치를 보았다.
“혹시 화났어?”
“아니.”
“그렇지? 그럴 줄 알았어.”
그러면서 씩 웃는 얼굴이 얄밉긴 했지만, 밉진 않았다. 도현은 결국 바람 같은 웃음을 내쉬곤 고개를 저었다.
“됐어. 어차피 너 아니었어도 레슬리랑은 잘 안 맞았을 거 같고.”
“오, 남자다운데.”
“남자는 무슨.”
어이없어하자 휴가 낄낄 웃었다. 도현은 더 말하기도 지쳐 침대에 드러누웠다. 의미 없이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휴가 말을 걸어왔다.
“내일부터 어떡할 거야? 레슬리가 멍청하긴 한데, 집요하거든. 최악의 조합이지.”
“아무 생각 없어.”
“그럼 내가 알려줄까?”
“뭘?”
“레슬리가 너 안 귀찮게 하는 방법 말이야. 나도 약간, 아주 약간의 책임 소재가 있으니까.”
별로 믿음은 안 가지만 한번 들어나 보자 싶었다. 도현이 말해보라고 하니 휴가 씩 웃었다.
“내가 아까 말한 세 명. 걔네랑 친해지면 돼. 레슬리는 멍청하고 집요하지만, 야생 개는 아니거든. 목청만 큰 치와와처럼 주인 믿고 날뛰는 개새끼지.”
“…기억은 해둘게.”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시몬 맥어보이의 첫인상은 완전히 최악이었다. 설령 그가 자신에게 호감을 품는다고 해도, 도현은 그와 친해지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휴. 네가 잊은 게 있어.”
“내가?”
빙글, 몸을 돌린 도현이 휴를 보며 웃었다.
“나 여기 전학 온 거 아니야. 촬영하러 온 거고, 끝나면 돌아갈 거야.”
누가 날 싫어하든, 성가시게 굴든. 잠깐만 지나면 될 일이다.
호박색 눈이 동그래졌다.
그 멍하고, 조금은 바보 같은 얼굴에 도현은 왠지 속이 시원해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