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559화 (560/582)

제559화. The bower lake school (10)

The bower lake school에서 맞이하는 두 번째 아침이 밝았다.

도현은 책을 읽다 말고 아직 어스름한 호수를 구경했다. 이따금 보석처럼 반짝이는 윤슬을 보고 있다 보니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오늘은 혼자 갈 수 있지?”

잠기운이 가득한 웅얼거림이 도현을 상념에서 꺼냈다.

읽던 책을 덮은 도현이 의자를 빙글 돌렸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소년이 보였다.

“그래. 네 룸메이트가 레슬리한테 터진 토마토 같은 꼴이 되어 돌아와도 괜찮다면.”

“…….”

“아침에 마주치지 않길 빌어줘. 어제 보니까 많이 화나 보이던데.”

“…망할.”

휴가 사나운 눈초리로 도현을 노려보았다. 그래봤자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결국 휴는 온갖 욕설을 삼키며 침대에서 나왔다.

미리 말해주지 않은 것에 대한 소소한 복수였다. 원래 도현은 이런 사소한 은원 관계에 연연하지 않는 편이었는데, 앞으로는 조금 해도 될 거 같았다.

‘재밌어.’

휴는 놀리는 재미가 있었다.

“오늘만이다. 어? 내일부턴 혼자 가, 제발.”

“생각해 보고.”

휴가 착잡한 눈으로 도현을 보았다. 뒤늦게 룸메이트를 들인 게 후회되나 보지. 그래봤자 무를 수는 없었다.

도현은 전날 휴가 지었던 무구한 표정을 따라서 했다. 휴는 할 말 많은 눈을 하다가 결국 방을 나섰다.

도현은 키득거리며 휴의 뒤를 따라갔다.

‘이곳에 온 지 이틀밖에 안 됐는데.’

떠날 곳이라는 인식 때문인가, 아니면 제지할 무언가가 없어서 그런가. 뭔가 성격이 이상해져 가는 거 같았다.

오늘 아침은 크루아상 샌드위치였다. 한국에 있을 때 부모님이 매번 아침을 잘 챙겨주신 탓에, 어제 사과 한 알만 먹으니까 배가 고팠다. 야무지게 주스까지 챙긴 도현이 휴의 팔을 쳤다.

“이제 가자.”

서서 졸던 휴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현은 휴와 돌아가면서 곁눈질로 카페테리아 내부를 훑었다. 다행히 오늘은 어제 아침 같은 풍경이 보이지 않았다.

안심하며 고개를 돌리는데 막 카페테리아에 들어오는 무리와 마주쳤다. 가운데에 선 소년을 보고 도현은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시몬 맥어보이.

그 또한 도현의 존재를 눈치챈 듯 시선을 주었다. 위아래로 훑어보는 눈길은 성의 없었고, 또 무심했다. 그는 곧 흥미를 잃었는지 눈을 돌렸다.

“야, 안 가?”

“아니. 가자.”

엮일 일은 없겠지.

도현도 고개를 돌렸다.

* * *

다행히도 도현은 세 번째 교시까지 레슬리를 마주치지 않았다.

물론 그를 마주치지 않았을 뿐, 그 무리로 보이는 아이들 몇은 같은 수업을 들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행동 대장이 없어서 그런지 도현에게 직접적인 시비를 걸거나 행동을 취하진 않았다.

그리고 네 번째 수업에서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르옌!”

와인색 교복을 입은 신시아가 팔랑팔랑 걸어왔다. 오늘은 양 갈래로 땋은 머리카락이 소녀의 움직임에 맞춰 흔들렸다.

“같은 수업 처음 들어!”

“그러게. 너도 프랑스어를 들을 줄은 몰랐어.”

도현은 외국어 수업으로 프랑스어를 골랐다.

큰 이유는 없었다. 문득 니콜라스와 함께 갔던 프랑스 릴이 떠올랐을 뿐이었다. 나중에 마리아처럼 프랑스에 작은 별장을 하나 사 두어도 좋을 거 같고.

“어렸을 때 삼촌이랑 자주 여행을 다녔어. 가장 많이 간 나라는 스페인이었는데, 꽤 오래 머문 적도 있어. 그래서 스페인어는 할 줄 알아.”

“삼촌이랑 친한가 봐.”

“내 제일 친한 친구야.”

“뭐야, 샤샤. 그럼 나는!”

도현은 불쑥 끼어든 소녀를 보았다.

작다.

신시아도 큰 편은 아닌데, 신시아보다 머리 한 개는 작았다. 갈색 머리카락은 몽실몽실하게 어깨 부근에서 물결쳤다. 초록색 눈까지 보고 나자 도현은 이 소녀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안녕, 로즈마리.”

“날 알아?”

“신시아한테 들었어. 만나서 반가워.”

“나도. 뭐라고 부르면 돼? 르옌?”

“아니, 이름으로 불러줘. 이도현이야. 도현이라고 부르면 돼.”

“그래. 반가워, 도현.”

로즈마리가 씩씩하게 손을 마주 잡았다. 그러고선 힘을 주어 위아래로 흔드는데, 꼭 도토리를 품에 안은 다람쥐 같았다.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는 걸 물끄러미 보고 있던 신시아가 말했다.

“로지는 두 번째로 친한 친구야.”

“첫 번째 시켜줘!”

“안 돼. 그건 앨벗 거야.”

여느 때처럼 몽롱한 표정이었지만 말투만큼은 단호했다. 도현은 궁금증이 솟아났다.

“나는 몇 번째야?”

“르옌은 르옌이야.”

“르옌이 몇 번째인데?”

“르옌이야.”

도현은 신시아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신시아는 무엇이 잘못된 건지 모르겠다는 양 멀뚱히 도현을 마주 보았다.

“…그래.”

결국 포기한 건 도현이었다. 그에 로즈마리가 키득거렸다. 웃는 얼굴은 아까보다 한층 더 호의로 차 있었다.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돼. 믿은 적도 없지만!”

“내 성격이 더럽다는 소문?”

“응. 나는 아닐 줄 알았어. 너는 신시아가 좋아하는 애잖아.”

그리 말한 로즈마리는 신시아의 팔을 껴안았다. 아기자기하고 무해한 조합에 도현의 얼굴이 절로 흐뭇해졌다. 신시아가 좋은 친구를 사귄 거 같아 다행이었다.

“무슨 대화를 하는데 그렇게 화기애애해?”

그때, 한 소년이 말을 걸었다. 앞자리에 앉아 이어폰을 꽂고 있던 소년이었다. 앞머리를 넘겨 눌러쓴 비니가 눈에 띄었다.

“안녕, 테오도르 누녜스야. 음, 왜 그렇게 봐?”

“오늘 나한테 먼저 인사한 건 네가 처음이거든. 조금 놀라는 중이었어.”

“아아.”

그는 이해한 눈치였다. 비니를 긁적인 테오도르가 말했다.

“네가 이해해. 이 학교는 시골에 박혀 있어서 외부인한테 배척이 심한 편이거든.”

“교복을 입고 있는데, 외부인은 아니지 않아?”

“여기 있는 애들은 대부분 어릴 때부터 서로 알던 사이야. 같은 학교를 나왔든 사교계에서 만났든 집안끼리 친하든. 너나 쟤 같은 애들은 다 외부인이지. 여기 없는 금발 걔도.”

“샤샤는 괜찮아. 내가 있으니까!”

로즈마리가 어깨를 쫙 폈다.

“샤샤는 나랑 다닐 거라서 아무도 못 건드려!”

“로지는 건드려도 돼.”

“…샤샤!”

로즈마리가 감격했다. 둘만의 세계에 빠진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도현은 픽 웃었다.

신시아는 걱정할 필요 없겠네. 작지만 기세까지 작지는 않은 로즈마리가 옆에서 잘 도와줄 거 같았다.

걱정인 건 헤레이즈였다. 헤레이즈는 방도 혼자 쓴댔으니까. 그 성격에 주위에 사람을 많이 둘 것 같지도 않고.

“헤레이즈도 배척받는 중이야?”

“지금은 아니. 걘 골든 이글이랑 붙어 다니잖아. 곧 들어갈 거 같던데.”

아, 그래서 펜싱 클럽에 든 건가?

헤레이즈가 생각한, 이 학교에 녹아드는 가장 좋은 방법이 골든 이글에 들어가는 것이란 추측이 일었다.

“그래서 다들 요즘 널 주시해. 네가 어떻게 적응할지 궁금해서.”

“별게 다 궁금하네.”

대답은 조금 시니컬하게 나왔다.

테오도르는 무어라 더 말하려는 것 같았지만, 선생님이 교탁을 두드리자 입을 닫았다. 도현에게 자신을 아드리아나라고 소개한 선생님은 드문드문 희게 센 머리카락을 단정히 묶은 채였다.

그녀는 도현에게 몇 가지를 물어보더니 칠판에 알파벳을 적었다.

그 정도는 미리 공부해 왔던 도현이 쉬이 알파벳을 읽었다. 그러자 아드리아나는 조금 수준을 높여서 몇 가지 단어를 썼다. 간단한 단어들이었다.

그것도 프랑스 여행 때 익힌 게 있어서 어렵지 않게 읽었다. 마지막으로 간단한 회화를 적어서 읽고 해석하게 시킨 아드리아나는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수업을 따라오기에 어려움은 없겠네. 미리 예습해 온 거니?”

“네. 프랑스에 여행을 갔을 때 공부한 것도 있고요.”

그 말에 아드리아나가 흥미를 보였다.

선생님이 도현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니 자연히 아이들의 주의도 도현에게 집중되었다.

“여행? 어디로?”

“릴이었어요.”

“릴! 좋은 곳이지. 그곳을 간 이유가 있니?”

“마리아가….”

말을 하려던 도현이 멈칫했다. 그러고선 다시 말했다.

“M. Paul이 그곳에서 자랐다고 말해줘서요. 그녀에게 들은 릴은 너무 아름다운 곳이어서 한 번쯤 가보고 싶었어요.”

외국인이 모국을 칭찬하는데 싫어할 사람은 없다. 덕분에 약간의 감탄과 찬사를 섞어 ‘프랑스 릴 여행기’를 읊은 도현은 아드리아나의 호감을 잔뜩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프랑스어를 고른 거야? 생각보다 프랑스어를 잘 알아서 놀랍구나. 혹시 간단한 문장도 만들 수 있니?”

“어떤 문장이요?”

“아무거나 괜찮아. 릴에서 봤던 풍경을 묘사해도 좋고, 아니면 오늘 아침에 뭘 먹었는지 말해줘도 좋단다.”

생각하는 듯 눈을 한번 깜빡인 도현이 꽤 유창한 프랑스어로 말했다.

“[릴의 하늘은 꼭 수채화로 그려 넣은 그림 같았어요. 마치 아드리아나의 눈동자처럼요.]”

헤레이즈가 회색빛이 도는 청안이라면 아드리아나는 구슬처럼 투명한 푸른색 눈동자였다. 도현은 그 색이 마음에 들었다.

학생의 플러팅을 들은 아드리아나는 잠시 당황하더니, 이내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나이 오십 넘기고선 처음 들어보는 말이라며 좋아했다.

그녀는 도현이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시간이 날 때 찾아오면 프랑스의 좋은 여행지를 추천해 주겠다고 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헛웃음을 짓는 건 아이들뿐이었다.

수업이 끝난 후 테오도르는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도현을 보았다.

“아드리아나를 유혹해서 뭐 하게. 설마 할머니가 네 취향이야? 레슬리한테 취향 가지고 뭐라고 할 게 아니잖아, 너.”

“아드리아나의 눈이 예쁜 푸른색인 건 맞잖아.”

“아니….”

테오도르는 굉장히 떨떠름한지 말을 흐렸다. 그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는 도현을 따라서 다급히 일어났다.

“어디 가?”

“카페테리아. 점심시간이잖아.”

“같이 가자.”

“나랑?”

“어.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를 세 번쯤 돌려봤거든. 영화를 좋아해서.”

그의 호감의 원천이 그것이었나 보다.

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만 괜찮다면.”

자연스럽게 도현, 테오도르, 신시아, 로즈마리 네 사람이 함께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개성이 강한 무리에 지나가던 이들이 한 번쯤 그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침처럼 점심도 뷔페식이었다.

도현은 접시를 들고 자신이 먹을 걸 적당히 덜었다. 음료수까지 챙기니 멀리서 자리를 잡은 로즈마리가 손을 흔들었다.

로즈마리에게로 가던 도현은 우연히 익숙한 금발을 보았다. 세상에 금발은 많지만, 그처럼 연하고 신비로운 색감의 금발은 흔치 않았다.

“헤레이….”

그를 부르던 도현의 입이 멈췄다.

하지만 이미 목소리를 들은 무리는 그를 쳐다보았다.

“아.”

누군지 모를 사람이 도현을 알아보고 소리를 내었다.

도현은 천천히 그들을 눈에 담았다. 오늘 두 번째로 마주치는 얼굴이 오만한 흥미를 품었다. 그 옆에 선 레슬리는 도현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헤레이즈의 청회안이 잘게 흔들렸다.

그리고 또….

“안녕?”

라비니아 로페즈.

“한번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났네.”

반짝이는 눈을 본 도현은 짧게 후회했다.

이래서 함부로 생각하면 안 되는 건데.

(다음 편에서 계속)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