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561화 (562/582)

제561화. The bower lake school (12)

그렇게 결정했지만, 당장 승마장에 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수업을 마친 도현은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 기종은 바뀌었어도 열린 창문 너머로 보이는 선글라스를 낀 남성의 얼굴은 몰라볼 수가 없었다.

“오스카!”

좀처럼 흥분하는 일이 없던 도현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높게 흘러나왔다. 남성이 주저 없이 차에서 내렸다.

교복을 입은 소년을 마주한 오스카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도현! 이게 얼마 만이야!”

반가움에 휩쓸려 양팔을 쫙 펼친 오스카는 아차 했다. 얘가 안아 줄 애가 아닌데. 그가 자연스럽게 손을 내리려던 찰나였다.

“그러게요. 얼마 만이죠? 오스카는 오랜만에 봤는데도 옛날 모습 그대로네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거 같아요.”

바짝 다가온 도현이 그의 품에 안겼다. 덩치 차이 때문에 파고들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짧게 포옹한 도현은 금방 떨어져 나갔지만, 오스카는 그대로 얼빠져 버렸다.

“너는 변한 거 같네.”

“그래요? 키가 조금 컸나?”

“키도 키고, 그냥….”

그는 처음 만났을 땐 옆구리에 간신히 오나 했는데, 이제는 가슴팍을 살짝 넘을 정도로 훌쩍 커버린 소년을 보았다.

당시 또래보다 조그맣던 소년은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창백한 슬픔을 그 야윈 뺨과 눈동자에 담고 있었다. 오스카는 종종 스크린에 그의 새카만 눈동자가 클로즈업될 때마다 찬사가 쏟아지는 이유가 그 탓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두 뺨에 혈색이 올라와 있었다. 건강한 생기는 아이를 소년답게 만들어 주었고, 그건 한철 화려하게 피어나는 꽃을 보는 것처럼 묘한 안타까움과 감동을 자아내었다.

그렇게 피어난 생기 속에서도 눈빛만큼은 변함없었다. 여린 잎에 난 생채기는 꽃이 만개하고 나서도 흐릿하게 남아 있듯이, 눈동자에 담긴 수심 어리고 깊은 빛만큼은 여전했다. 어쩌면 더욱 짙어진 거 같기도 했다.

그 부조화가 마력처럼 사람의 시선을 끌어당겼다. 자꾸만 보게 되었고, 한번 보게 되면 계속 궁금해졌다.

‘무섭게 크네.’

빨리 크는 것에 대한 감탄이면서 동시에 클수록 무섭도록 매력적인 존재가 되어가는 도현에 대한 탄식이었다.

지금도 이런데 스무 살에는, 그 이후엔 어떨까? 상상이 되질 않았다.

“정말 보고 싶었어요.”

그래도 역시, 제일 변한 건 이거지.

솔직하게 감정을 표현할 줄 아는 자신감.

작고 창백했던 아이는 내뱉기보단 삼키는 게 익숙했다. 그 조그만 몸 안에 뭘 그렇게 많이 쌓아두는지, 그럴 만한 공간은 있는 건지 의아할 정도였다.

“미안해요, 오스카. 사실 죄송해야 할 일인데…. 오스카가 저를 계속 맡아 주신다는 말을 듣고 너무 기뻤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도현은 환하게 웃었다. 선글라스 벗었으면 실명할 뻔했군. 실없는 생각을 하며 도현의 정수리를 도닥였다.

이젠 요령 없이 다 삼켜버리는 게 아니라, 적절하게 진심을 꺼낼 줄 알게 되었다.

생각건대, 아마 그건 소년의 큰 무기가 되어줄 것이다. 저렇게 온 진심을 담아 말하는데 흔들리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므로.

“미안하긴. 내가 하겠다고 한 거니까 신경 쓰지 마.”

너를 계속 맡으려고 이직도 안 하고 있는데. 뒷말은 부담스러울까 봐 삼켰다. 도현이 그가 희생하는 줄 알면 곤란했다.

물론 도현을 맡으려고, 이 아이가 정상에 닿을 때까지 직접 지켜보고 싶어서 에이전시에 남은 건 맞긴 하지만, 그게 유일한 이유는 아니기도 했고 말이다. 오스카에게 도현은 이유보다는 동기였다.

“이 학교는 어때? 지낼 만해?”

“좋은 질문이에요, 오스카. 장담하는데 꽤 재밌을 거예요. 일단 차에 타요. 제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게요.”

도현이 학교에 온 지 고작 삼 일이었다.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길래? 선글라스 너머 눈동자가 흥미롭게 빛났다.

“-그래서 승마 클럽으로 결정했다고?”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은 오스카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과 골든 이글, 그리고 오늘 점심에 받은 제안까지 듣고 무척 재밌어했다.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게 가장 좋을 거 같아서요. 동물을 좋아하기도 하고요.”

“승마가 동물을 좋아하는 걸로 충분한 종목은 아닌데. 그 위에서 균형을 잡으려면 얼마나 힘든 줄 알아? 해본 적도 없다며. 동물을 좋아하면 반려동물을 들이는 게 더 낫지 않겠어?”

“글쎄요. 한 영혼을 온전히 책임질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도현의 단어 선택은 가끔 특이했다.

‘보통 생명이라고 하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오스카는 지적하지 않았다. 영혼이라는 단어를 언급할 때 도현의 목소리는 유독 기이한 울림을 품어, 듣기 좋았기 때문이었다.

“룸메이트한테 들었는데, 학교 승마장은 개인 소유의 말을 들일 수 없대요. 더 친한 말, 더 자주 타는 말은 있어도 주인은 없댔어요. 전 그게 마음에 들어요.”

얘는 아무리 까다로운 반려동물도 잘 책임질 거 같은데.

유독 자기 자신에게 평가가 박한 부분만큼은 여전한 모양이었다. 오스카는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차에 탄 지 한 시간이 흐르자 L.A. 도시의 풍경이 보였다. 그들이 탄 차는 그중에서도 우뚝 솟은 페어리 픽처스 본사 건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방문한 페어리 픽처스는 오늘도 시끄럽고, 바빠 보였다. 그러나 그 바쁜 사람들도 도현을 보면 아는 척을 해왔다. 그래서 도현이 목적지까지 다다르는 데 조금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세상에, 이게 누구야!”

데이먼은 얼굴에 한가득 미소를 매달고 도현을 반겼다. 예민한 얼굴에 웃음이 방울방울 맺히자 인상이 누그러져 보였다. 도현을 직접 캐스팅했던 데이먼은 그때나 지금이나 도현을 무척 아꼈다.

그들은 짧은 해후를 나누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각색을 마친 대본이야. 소설은 이미 읽어봤을 테고. 천천히 보면서 무슨 부분이 다른지 확인해 봐. 그리고 무언가 수정하고 싶은 부분이 있으면 다음에 올 때 나한테 말해주렴.”

도현의 대사가 들어간 부분뿐만이 아니라, 시즌 2의 모든 대사와 지문이 포함된 대본은 아주 두툼했다. 배우가 요청하거나, 아니면 그 영화에서 중요한 배역을 맡을 때 이렇게 대본을 전부 주기도 했다.

“헤레이즈랑 신시아는 만났어?”

“네. 같이 점심도 먹었어요.”

“사이가 나쁘진 않나 보네.”

“나쁠 일이 있겠어요?”

의아한 시선에 데이먼이 큼, 헛기침했다.

“음, 그래. 아무튼, 그 학교는 연습실도 잘 되어 있으니까 시간 날 때 같이 연습해도 괜찮을 거다.”

“그럴게요.”

“꼭 그러란 소리는 아니고. 학교는 놀려고 다니는 곳이잖니.”

“공부가 아니라요?”

“공부는 겸사겸사하는 거고.”

하버드 대학을 나와 전 세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영화 제작사 중 하나인 페어리 픽처스에서 감독을 맡은 데이먼의 말은 별로 신뢰가 가지 않았다.

“그거 아니? 나도 그 학교를 나왔어.”

“…데이먼이요?”

“그래. 아니면 내가 왜 그 학교를 추천했겠어? 아마 명예의 전당에 내 사진도 붙어 있을 텐데. 난 마음에 안 든단 말이지. 너무 영정 사진 같아.”

“그럼, 데이먼도 골든 이글이었어요?”

“아, 그래.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네. 맞아. 그랬어.”

그는 도현이 가입 제안을 받았단 사실에 흥미로워했다.

할리우드 측에도 골든 이글 출신의 여러 인사가 있으니 도움 될 거라고 말해 주었는데, 도현이 다른 클럽에 들어가고 싶다고 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꼭 들어갈 필요는 없지. 인맥이 생긴다면 좋지만, 너는 네 힘으로 많은 걸 할 수 있는 애니까. 나도 있고 말이지.”

그 말에 도현의 마음은 더욱 확신에 찼다.

역시 승마 클럽이 좋겠어.

“시즌 2가 개봉하면 많은 게 달라질 거고.”

“그럴까요?”

“첫 번째 시리즈에선 르옌의 지분이 크지 않았지. 솔직히 그 분량에 그 정도 임팩트를 남긴 것도 대단한 일이야.”

갑작스러운 칭찬에 도현이 눈을 깜빡였다.

“그런데 너도 알겠지만, 시즌 2부터는 르옌이 본격적으로 나와. 나는 정말 기대된단다. 네가 어떤 기적 같은 일을 만들지. 물론 네가 주인공이 되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하지만 말이야.”

“실망시키지 않을게요.”

검은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데이먼은 흡족하게 웃었다.

“온 김에 영상 몇 개 좀 찍고 가겠니?”

“좋아요.”

* * *

가볍게 대본을 훑어보고 대사 몇 개를 읊으며 영상을 찍고 나니 저녁이었다. 도현은 데이먼의 제안에 그와 오스카, 셋이서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알맞게 익은 스테이크를 해치우고 그들은 헤어졌다. 데이먼은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라는 말을 남겼다.

“어디 갔다 왔어?”

방에 돌아가자 침대에서 핸드폰을 하던 휴가 고개를 빼꼼 들었다.

“감독님이랑 만나고 왔어.”

“오. 손에 들린 거 대본이야? 나도 봐도 돼?”

“이건 안 돼. 관계자만 볼 수 있어.”

도현은 휴가 더 달라붙을 줄 알았다. 그러나 휴는 의외로 순순히 수긍했다.

“그럼 어쩔 수 없네.”

깔끔하게 미련을 버린 휴는 다시 슈팅 게임을 하다가 머리 위로 드리운 그늘에 눈동자만 스윽 움직였다.

“왜?”

“부탁이 있어.”

“무슨 부탁?”

“승마 클럽에 가보고 싶어.”

“오.”

벌떡, 휴가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앉았다. 그는 양반다리를 한 채 눈을 반짝였다.

“들어오려고?”

“생각 중이야. 일단 한번 가보고 결정하게. …가능성이 크긴 해.”

“그거 라비니아 때문이지?”

휴는 대체 모르는 게 뭘까.

그는 재밌다는 표정을 짓더니 곧 좋다고 했다. 수락은 수락인데 왜인지 모르게 찜찜한 기분이라 도현은 미간을 좁혔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말해줄게. 승마 클럽엔 말에게 미친놈들이 많아서 그 외의 건 별로 신경 안 쓰거든. 좋아, 내일 시간 되지?”

“응, 고마워.”

휴와 약속을 잡은 도현은 책상 의자에 앉아 대본을 펼쳤다. 뒤에서 또 문학 소년이냐며 야유하는 소리가 들려서, 이어폰을 꽂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어폰을 타고 우아한 바흐의 선율이 흘러 들어왔다. 형의 연주를 배경 삼아 도현은 대본에 빠져들었다. 어느새 사락거리는 종이 소리만 방 안에 가득해졌다.

두꺼운 대본을 반쯤 읽었을 때, 도현이 기지개를 켰다. 오랫동안 한 자세로 있었더니 몸이 뻐근했다. 짧게 목을 돌리며 몸을 풀던 도현은 휴가 조용하다는 걸 깨달았다.

잠들었네.

시계를 확인해 보니 벌써 열두 시가 넘었다. 검은 눈동자에 갈등이 일었다. 평소 취침 시간을 훌쩍 넘겼는데….

근데 대본이 남았잖아.

…이것만 다 읽고 잘까?

차마 대본을 두고 떠날 수는 없었던 도현은 이것만 다 읽고 자자며 스스로와 타협했다.

잠깐 쉬었다가 다시 읽자.

글을 읽느라 뻐근해진 두 눈을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고, 바람을 쐴 겸 창문을 열었을 때였다.

도현의 뺨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무슨….”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 나갔다.

한데 엉겨 붙은 두 사람의 인형이 엎치락뒤치락하다가, 나무에 기대어 섰다. 딱 달라붙은 몸이나 기울어진 고개 따위의 각도가 너무 잘 보였다. 도현은 처음으로 제 뛰어난 시력을 원망했다.

조금 허둥지둥대던 도현이 커튼을 닫으려 손을 올렸다. 그러나 그 움직임이 너무 컸던 걸까. 나무 기둥에 기대어 있던 사람 중 한 명이 이쪽을 쳐다보았다.

드르륵! 동시에 도현이 커튼을 격하게 내렸다.

“…….”

커튼을 쥔 손이 힘없이 추락했다.

도현은 단숨에 녹초가 되어 의자로 흘러내렸다. 난감하게 홧홧해진 뺨을 문지르던 도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한동안 밤에 창문을 열진 못할 거 같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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