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562화 (563/582)

제562화. The bower lake school (13)

소년은 카페테리아 앞 벤치에 앉아 있었다. 앞꿈치로 툭 튀어나온 벽돌 모서리를 톡톡 치며, 앞으로 일어날 일을 상상했다.

약간의 문제는, 약속 시간이 이십 분을 넘겼는데도 휴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 정도이려나.

“너 여기서 뭐 해?”

의아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귓가를 스쳤다. 교복이 아니라 편안한 운동복을 걸친 헤레이즈가 도현을 내려다보았다.

“친구를 기다리고 있어.”

“너 친구도 있어?”

도현이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자, 움찔한 헤레이즈가 헛기침을 한 번 했다.

“누군데? 신시아? 아니면 걔 친구 마린가 메린가 하는 애?”

“로즈마리야. 그리고 둘 다 아니야. 내 룸메이트를 기다리고 있어.”

“룸메이트?”

“휴 모건. 알아?”

“…걔가 네 룸메이트라고?”

헤레이즈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그는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입술을 두 번 달싹이더니, 곧 고개를 저었다.

“걔라면 실내 체육관에 있어. 정확히는 거기 있는 펜싱장에.”

“그래?”

“내가 나올 때까진 거기 있었어. 언제 만나기로 했는데?”

“이십사 분 전에.”

“…지났잖아?”

“응.”

태평하게 구는 모습에 헤레이즈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저건 호군가 하는 얼굴이었다. 도현은 발을 몇 번 흔들거리다가, 벤치에서 훌쩍 일어났다.

“어디 가?”

“네가 휴가 있는 곳을 알려줬잖아. 안 오니까 내가 가려고.”

설마 길이 엇갈리진 않겠지? 중얼거리는 말에 그가 대답해 주었다.

“가는 길이 하나뿐이라 엇갈릴 일은 없어.”

“고마워. 그럼 가볼게.”

“잠깐.”

응?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쳐다보니 입술을 달싹이던 헤레이즈가 말을 꺼냈다.

“그건 어떡할 거야?”

“그거?”

“그때, 카페테리아에서….”

“아.”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도현이 말했다.

“거긴 안 들어가려고.”

“왜?”

도현은 고개를 돌려 구름 조각 같은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그때 카페테리아에서 헤레이즈는 시몬, 레슬리와 함께 있었다. 그들은 사이가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지금 룸메이트를 만나러 가는 이유가 클럽 때문이거든. 승마 클럽에 들어가려고. 그래서야.”

“…….”

헤레이즈는 말을 얹지 않았다.

그는 복잡한 낯으로 도현의 옆에서 조용히 걷다가, 이내 중얼거렸다.

“그래. 루카 때처럼 괜히 부딪치는 것보단 아예 멀리 있는 게 나을 수도 있겠네.”

“…….”

굉장히 찔렸다.

어쩌다 보니 자연스럽게 같이 걷게 된 그들은 두런두런 대화를 나눴다. 자연스럽게 나온 화제는 당연히 영화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래서 난 데이먼한테 액션 연기를 배우겠다고 했어.”

“하긴, 아서는 몸 쓰는 일이 많으니까. 시즌 1 때도 그랬잖아.”

“그땐 진짜….”

숲에서 와이어를 연결하고 뛰고, 뛰고, 또 뛰었던 기억을 떠올린 헤레이즈가 조금 해쓱해졌다.

“액션 말고 다른 건?”

“다른 거?”

“데이먼한테 들었는데, 이 학교에는 연습실이 잘 되어 있대. 괜찮다면 같이 연습해도 좋을 거 같아서.”

청회안에 흥미가 스쳤다.

그는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지만, 표정으로 판단해 보건대 긍정의 답이 돌아올 거 같았다.

신시아한테도 물어봐야지.

도현은 머릿속으로 즐겁게 계획을 세우며 발을 옮겼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실내 체육관 앞에 와 있었다.

“펜싱장은 어디에 있어?”

“2층 안쪽에.”

도현은 건물에 들어가기 전, 헤레이즈에게 물었다.

“안에도 같이 들어가 줄 거야?”

“내가 왜?”

체육관까지 같이 와놓고 까칠하게 대답하는 헤레이즈에 도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 데려다줘서 고마워. 조심히 들어가.”

“다 학교 부지인데 조심히는 무슨…. 잠깐, 너 혼자 가려고?”

“그런데?”

헤레이즈는 심각한 눈으로 도현을 뚫어져라 보더니, 이내 성큼성큼 다가왔다. 간다면서?

“됐어. 너 또 누구랑 싸울까 겁나서 못 가겠어. 너랑 나랑 세일 상품처럼 묶여서 성가시다고.”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

“말 잘 꺼냈네.”

헤레이즈가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들어 올려 쫙 폈다. 그가 엄지를 접으면서 말했다.

“을 찍을 땐 루카랑 싸웠고.”

검지가 접혔다.

“ 촬영할 때는 보조 출연자 스토킹하고.”

“스토킹까진 아니었어.”

“맨날 논란에 휩싸이질 않나, 편입 오자마자 싸우질 않나.”

네 손가락이 접혔다.

헤레이즈가 남은 손가락을 보란 듯이 흔들었다.

“너라면 믿음이 가겠어?”

“…알았으니까 중지는 내려.”

“그러지 뭐.”

그가 홀로 쭉 뻗어 있던 중지를 내렸다.

도현은 한숨을 삼키며 펜싱장으로 향했다. 밖에서 기다리려고 했는데 헤레이즈가 문을 열어 버려서 얼떨결에 안에 들어갔다.

챙, 챙!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하얀 펜싱복을 입은 사람들이 저마다 흰 페인트가 칠해진 줄 위에서 경기를 펼치고 있었다.

조금 놀란 눈으로 둘러보던 도현은 유독 눈에 띄는 이들을 쳐다보았다. 문외한인 도현이 보이게도 조심스럽고 어설프던 몸짓과 달리, 그들은 거침없었다. 빈틈이 생기면 곧장 낭창한 칼을 찔러 넣었다.

서로의 칼이 맞닿는 소리가 쉴 틈 없이 울렸다. 도현의 시선이 향한 방향을 본 헤레이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찾았네. 쟤가 네가 찾던 애야.”

“저 사람이 휴라고?”

“에이스거든. 물론 제일 잘하는 건….”

그 순간 칼끝이 상대의 칼을 스르르 비껴가 명치와 심장 사이, 방어가 빈 곳을 정확하게 찔렀다. 잠깐의 침묵 후 한쪽이 먼저 투구를 벗었다.

“졌네요.”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진짜로 휴가 맞았네. 허술하고 능글대던 것만 보다가 진지하게 경기하는 모습을 보니 왠지 의외였다.

휴는 아쉬운 낯을 하다가 도현과 눈이 마주쳤다. 이내 호박색 눈이 둥글게 뜨였다. 그는 곧장 도현에게로 다가왔다.

“지금 몇 시야?”

“여섯 시 좀 넘었어.”

“아, 미안. 벌써 그렇게 됐을 줄은 몰랐어.”

그가 제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정말로 당황한 눈치라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기분 상하지도 않았고.

“그럼 이제 다 끝난 거야?”

“어, 금방 씻고 나올게. 아니다. 늦었는데 그냥 갈까?”

옆에서 헤레이즈가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물러났다. 마치 아주 불결한 것을 본 사람처럼 질색한 낯이었다.

휴가 헛웃음 지었다.

“나 병균 아니거든?”

“오지 마!”

“아니, 땀만 조금 흘렸지 그렇게 더럽진 않다니까?”

“충분히 불결하거든?”

두 사람이 투덕대는 걸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휴의 뒤에 다가와 섰다. 아까 휴와 경기하던 사람이었다. 투구를 써서 얼굴이 보이진 않지만, 도현은 그가 자신을 쳐다본다고 느꼈다.

도현은 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그를 마주 보았다. 그러자 상대가 느릿하게 투구를 벗었다. 단단한 하관에 이어서 잘 조형된 단정한 이목구비가 보였다.

휴처럼 강렬한 인상도, 헤레이즈처럼 누가 봐도 화려하게 잘생긴 소년도 아니었다. 하지만 단아한 이목구비와 차분한 눈빛이 시선을 끌었다.

어디서 본 거 같은데.

도현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낯익은데 누군지 생각이 나지는 않았다. 도현을 빤히 쳐다보던 그가 고개를 돌려 휴를 보았다.

“휴 모건, 친구와 약속이 있었어?”

“깜빡했어.”

한심한 눈으로 휴를 본 그가 도현을 향해 부드러이 말했다.

“내가 실례를 저질렀네. 가려던 그를 붙잡은 게 나거든.”

“…아. 괜찮아요.”

“휴, 너는 얼른 씻으러 가. 네 친구한테 더 폐를 끼치고 싶진 않거든.”

휴는 어깨를 으쓱하고선 사라졌다.

이제 남은 건 셋이었다.

“헤레이즈와 같이 온 건가?”

“네, 제가 펜싱장 위치를 몰라서 도와줬어요. 그러니까, 이름이….”

“아이덴 커티스.”

“커티스군요. 전 이도현….”

자신을 소개하던 도현이 멈칫했다. 아이덴 커티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혹시 펜싱 클럽 주장이세요?”

“휴가 말해줬나? 아니면 헤레이즈? 흠, 뭐든 상관없겠지.”

태연하게 말하는 아이덴은 스쳐 지나가듯 상상했던 모습과는 달랐다. 그는 아주 번듯하고 성실한 모범생처럼 보였다. 두 눈에 어린 총기나 경박하지 않게 올라간 입꼬리는 그에게 신뢰감 있는 이미지를 부여했다.

그때, 아이덴이 물었다.

“우리 구면이지?”

“네?”

스륵, 그의 눈매 끝이 미약하게 휘었다.

“어제 봤잖아. 밤에.”

“언….”

언제, 라고 하려던 말은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유리 파편 같은 풍경이 조각조각 떠올라 뇌리를 스쳤다.

딱 달라붙어 있던 몸, 그리고 커튼을 닫으려는 순간 마주쳤던 검은 눈동자….

그 눈동자와 저를 탐색하는 짙은 갈색 눈동자가 겹쳐졌다.

‘밤이어서 검은색으로 보인 거구나.’

새로운 사실을 알았는데 전혀 기쁘지 않았다.

“말 안 해요.”

“응?”

그가 무슨 소리냐는 듯이 입꼬리를 말았다. 그러나 도현은 속지 않았다. 굳이 의뭉스럽게 굴고, 사람을 샅샅이 관찰했으면서 저렇게 나오는 게 어이없었다.

“타인의 일엔 관심 없어요. 말하고 다닐 만큼 심심하지도 않고요.”

“그렇구나.”

“네.”

두 시선이 얽혔다. 어딘가 미묘한 분위기에 헤레이즈가 의문스러워하는 게 느껴졌다. 그 대치는 아이덴이 웃으면서 끝났다.

“그러고 보니 라비니아가 새로운 사람을 추천했지. 그게 너야?”

“클럽을 말하는 거라면, 아마도요. 카페테리아에서 그런 제안을 받긴 했어요.”

“네 생각은 어떤데?”

“이미 생각해 둔 클럽이 있어서 거절할게요. 혹시 이 말 그분께 전해주실 수 있나요?”

그때 라비니아는 분명 흥미를 보였다.

거절하면 무슨 반응일까?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일 것도 같았고, 어쩌면 기분 상해 할 것도 같았다.

문제는 그 옆에 레슬리가 있다는 거였다. 만약 라비니아가 도현에게 감정이 상했고, 그걸 레슬리가 안다면….

‘엄청 난리겠네.’

기세등등해져서 시비를 걸 모습이 어쩐지 눈에 훤했다.

가능성일 뿐이지만,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듣기로 아이덴은 11학년이었다.

2년만 있으면 성인이니 누군가와 키스한다고 해서 큰 흠이 되진 않는다. 들켜도 벌점 좀 받고 끝나겠지.

그런데 저렇게 간 보듯이 구는 건….

‘들키지 말아야 할 사정이 있다고 소리쳐 주는 거나 마찬가진데.’

도현은 태연히 생각했다. 그 사정이 무엇인지 딱히 궁금하진 않았으나, 그게 이득이 된다면 활용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부탁드려도 될까요? 불필요한 오해가 생기지 않게요.”

조용히 도현을 응시하던 아이덴이 조금 가라앉은 눈을 부드럽게 접으며 웃었다.

“그럼, 물론이지.”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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