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563화 (564/582)

제563화. The bower lake school (14)

승마장은 그 크기 때문인지 기숙사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노을이 아롱지며 금발 위에 색채를 덧입혔다.

“아, 뭔데 진짜!”

“별거 아니라니까.”

“그 별거 아닌 게 뭐냐고.”

그는 체육관을 나온 순간부터 아이덴과 있었던 일을 캐물었다. 물론 도현은 알려주지 않았다.

“너도 들었잖아. 말 안 하기로 한 거.”

쯧, 헤레이즈가 혀를 찼다. 그런 데서만 쓸데없이 성실해서. 조금 불퉁하게 중얼거리기도 했다. 그 불만을 흘려듣던 도현은 갑자기 멈춰 선 소년에 덩달아 멈추었다.

잘만 따라오다가 우뚝 선 모습에 도현이 의아하게 물었다.

“혹시 서운해서 그래?”

“내가 미쳤냐?”

곧장 까칠한 답이 돌아왔다.

아니면 말고. 멀뚱히 쳐다보자 헤레이즈가 눈썹을 구겼다.

“곧 마사잖아. 말은 싫어. 냄새나고.”

잠깐의 침묵 후에 그의 입술이 열렸다. 말해줄 생각 없으면 됐어. 한숨처럼 말한 헤레이즈는 미련 없이 뒤돌았다. 도현은 멀어지는 헤레이즈의 뒤통수를 향해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참 특이해.”

“헤레이즈가 조금 그런 면이 있지?”

“난 너 말한 건데.”

“너한테 듣고 싶은 말은 아니야, 휴.”

도현은 아직도 창고 문을 따고 들어가서 간식을 훔쳐 오던 휴를 잊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잊지 못할 것이다.

두 사람은 함께 마사로 들어갔다.

잘 관리된 곳이라 그런지 냄새는 심하지 않았다. 깨끗한 마사는 말 한 마리 당 방 하나씩 구분되어 있었고, 바닥이며 벽, 천장이 모두 고급스러운 소재로 되어 있어 호화스러웠다.

감탄하던 도중에 낯선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아아, 사랑스러운 레이나! 오늘도 아름답구나.”

그건 소녀였다. 대략 도현보다 두세 살 많아 보이는.

그리고 좀 이상했다.

“이 윤기 나는 털 좀 봐. 예쁘기도 하지, 내 사랑. 너처럼 사랑스러운 존재는 이 세상에 없을 거야. 있어도 없애버릴 거야!”

“또 지랄이네.”

휴가 질린다는 어조로 말했다.

말 앞에 의자를 가져다 둔 소녀는 말의 목을 하염없이 쓰다듬고, 껴안고, 뽀뽀하고, 그러다 황홀하단 표정을 지었다. 두 눈에서 애정이 뚝뚝 흘러내렸다.

“역시 훔쳐 가야….”

잘못 들은 거겠지.

도현은 애써 들었던 것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이상한 사람이 또 추가된다니. 별로 믿고 싶은 현실은 아니었다.

“레이나, 너도 그게 좋지? 우리 집에 가면 너를 위한 들판을 만들어줄게. 그럼 우린 영원히 둘이서 행복해지는 거…. 레, 레이나?”

푸릉! 말이 머리를 흔들어 소녀의 손을 털어냈다. 레이나? 당황한 소녀가 불렀지만, 말은 말굽으로 바닥을 긁어대며 울음소리를 내었다.

그 소리를 필두로 마사가 시끄러워졌다. 이히잉! 얌전히 있던 말들이 갑자기 울어댔다. 휴도 이런 상황은 처음인지 당황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뭐야, 왜 이래?"

그 당혹 섞인 의문에 도현은 눈동자를 도로록 굴렸다. 그러게, 왜 저럴까. 태연하게 말도 해보았지만, 노력이 무색하게도 휴는 반쯤 흘려들었다.

“단체로 미쳤나? 아니면 너 뭐 가져왔어? 주머니에 간식이라도 들어 있는 거야?”

“주머니엔 열쇠밖에 없어.”

휴는 의아해 보였지만, 그렇다고 도현을 더 의심하거나 추궁하지는 않았다. 상식적인 반응이었다.

“레이나! 답답해서 그래? 응? 엄마가 꺼내줄게. 기다려 봐.”

작게 철컥거리는 소리가 울리자 도현이 움찔했다.

왠지 불길한데.

“엄마랑 산책하자. 그럼 답답함도 풀릴 거야. 그래, 그래. 내 스위티. 엄마 품에 안…?”

양팔을 쫙 펼친 소녀를 말이 스쳐 지나갔다. 푸륵, 짧은 콧방귀 소리가 마치 비웃음 같았다. 얼이 나간 소녀를 지나친 말은 도현의 앞에서 멈춰 서서….

비비적.

“!”

근육질의 목덜미가 까맣고 동그란 머리통에 비벼졌다. 동시에 소녀의 입이 떡 벌어졌다. 눈동자는 거친 풍랑처럼 크게 요동쳤다.

…그래. 이럴 줄 알았지.

왜 잊고 있었을까. 바닷가에 갔을 때 그 집요했던 바다사자들을….

부빗부빗.

‘근데 귀여운 거 같기도 하고.’

까만 털에 윤기가 좌르르 흐르고 움직일 때마다 단단한 근육이 물결쳤다. 잘 관리된 갈기는 쓰다듬어 보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켰고, 까만 눈은 동굴 깊은 곳에 있는 광물처럼 맑고 신비했다.

히힝, 말이 기분 좋게 울었다.

그제야 도현은 자신이 말의 목덜미를 쓰다듬어 주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뭐야. 언제부터…. 당황하여 손을 떼자 말이 큰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기분 좋아. 더 쓰다듬어 줘.

“…….”

이건 좀, 불가항력이잖아.

도현은 그 눈빛에 꼼짝없이 붙들려 다시 부드러운 털을 매만져 주었다.

도현이 정신을 차린 건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을 때였다.

“레이나, 왜….”

소녀가 크게 휘청이며 그들을 향해 걸어왔다.

“왜….”

비틀거리며 다가온 소녀는 말 옆에 서서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말의 몸체에 얹었다.

여기 좀 봐 달라고 하는 행동이 애처로울 지경이었지만, 말은 도현의 어깨며 정수리에 머리를 비벼댈 뿐이었다. 도현은 저도 모르게 소녀의 눈치를 보았다.

충격이 아롱진 눈으로 말을 보던 소녀가 시선을 돌린 건 그 순간이었다. 날카로운 두 눈이 표독스럽게 떠졌다.

“누구야, 너?”

“난….”

“내 레이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몰래 당근이라도 줬어? 아니면 우리 레이나가 제일 좋아하는 사탕수수를 준 거야?”

대답을 듣고 싶은 걸까, 아닌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물끄러미 쳐다보니 소녀의 눈이 커졌다.

“그것도 아니면, 설마….”

표독스러운 기운을 흘리던 눈동자에 균열이 일었다.

“토이즈 사과 맛 쿠키…. 그걸 준 거야?”

“…….”

“어, 어떻게?”

레이나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쿠키는 나만 알았는데…! 좌절 어린 목소리가 마사 안에 울려 퍼지자, 휴가 어이없는 눈으로 소녀를 보았다.

“너 얘 쿠키로 꼬신 거였어?”

“아니야! 레이나가 날 얼마나 좋아하는데!”

“쳐다도 안 보는데?”

헉, 소녀가 가슴께를 틀어쥐었다. 울상이 된 얼굴이 조금 불쌍해 보였다. 애달픈 낯으로 울먹거리던 소녀가 말의 등 위에 힘없이 늘어졌다.

“레, 레이나아….”

히히힝! 타이밍 좋게 근처에 있던 다른 말 한 마리가 크게 울었다. 레이나는 도현을 쳐다보고, 소녀는 레이나를 쳐다보고, 휴는 소녀를 쳐다보고.

도현은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한숨을 삼켰다.

“…그러니까, 동물들이 널 좋아한다고?”

“응.”

그들은 레이나의 고삐를 쥐고 초보자용 코스를 도는 중이었다. 굳이 마사 밖에서 대화하는 이유는 도현 때문이었다.

- 히힝, 히이힝!

잠깐 조용해지나 했더니, 한 말의 울음소리를 시작으로 마사 전체가 시끄러워졌다. 쏟아지는 두 쌍의 시선에 도현은 목뒤로 흐르는 식은땀을 느꼈다.

- 설마….

작게 중얼거린 휴가 조용히 옆으로 걸어갔다. 가까이에 있는 문 하나를 열려는 움직임에 도현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 잠깐.

- 왜?

- 나가서, 나가서 이야기하자.

간절한 부탁에 말 등에 뺨을 비비던 소녀가 도도하게 말했다.

- 그래. 나랑 레이나랑 둘이 있을 거니까 불청객은 나가.

도현을 보는 눈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도현은 그를 자극하지 않으려 고개를 끄덕인 후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다각.

- 호오.

주춤, 주춤.

다각다각다각.

멀어진 거리보다 더 가까이 다가온 말이 도현의 팔에 옆구리를 딱 붙인 채 깊은 눈망울로 도현을 보았다. 어디 가? 같이 가.

- ….

- 내 생각엔 같이 나가야 할 거 같은데. 다른 의견 있는 사람?

도현과 소녀는 침묵했다.

그리하여 지금이었다.

옛날부터 동물이 유독 따랐다는 고백에 휴가 픽 웃었다. 비웃음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네가 무슨 백설 공주야?”

“…….”

침묵이 이어지자 호박색 눈동자에 당황이 서렸다.

“…진짜야?”

“옛날에 그런 별명이 있긴 했어. 바닷가에 갔다가 바다사자한테 쫓겨서….”

“…….”

마침내 휴도 조용해졌다.

복잡미묘한 정적 속에서 다각다각, 푸르릉, 히힝, 하는 소리만 불규칙적으로 울렸다. 그들은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다.

꽤 복잡한 눈으로 도현을 보던 휴는 무슨 사고 과정을 거쳤는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식견이 너무 좁았어. 이 세상에 너 같은 사람이 한 명쯤은 있을 수도 있지.”

“나 같은 사람이 뭔데?”

“드루이드?”

“아니거든.”

도현은 헛숨을 내쉬었다.

그는 자신의 팬들이 하는 이야기를 얼추 알고 있었다. 인공 지능에, 요정에, 천사도 모자라서 이제는 드루이드인가? 아, 예능 나갔을 때 그런 기사가 났던 거 같기도 하고.

“…그러니까, 쿠키가 아니라고?”

내내 조용히 있던 소녀가 입을 열자 도현이 불안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또 무슨 반응을 보일지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녀는 예상과 달리 반응했다.

덥석, 도현의 손이 소녀의 손에 잡혔다. 제 자리를 뺏어 간 여우를 보듯 표독스럽던 눈이 맑게 반짝였다. 도현은 거기서 집요한 광기를 읽었다.

“1년 4개월하고도 22일.”

“?”

“내가 레이나와 친해지는 데 걸린 시간이야. 물론 지금은 나를 엄마처럼 따라서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옛날엔 그렇지 않았어.”

“토이즈 사과 맛 쿠키를 따르는 거겠지.”

“닥쳐, 멍청아.”

톡 쏘아붙인 소녀가 도현을 열렬히 보았다. 그렇게 정열적인 시선을 코앞에서 보는 건 낯선 일이라 반사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소녀는 개의치 않았다.

“알고 싶어. 어떻게 한 거야? 왜 레이나가 널 좋아하는 거야?”

도현은 난감해졌다.

“알려주기 어려워.”

“…왜?”

소녀의 눈매가 축 내려갔다.

분명 키도 도현과 비슷한 데다가 성숙하고 날카로운 인상인데, 어쩐지 애를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도현은 저도 모르게 어르듯 부드러이 말했다.

“내가 딱히 뭔갈 한 게 아니라서 그래. 이건 그냥 체질 같은 거야.”

“알려주기 싫은 건 아니란 거지?”

“응.”

빠르게 기운을 차린 소녀가 도도히 말했다.

“그럼 괜찮아. 알려줄 필요 없어. 내가 알아서 널 관찰하면 되니까.”

내용은 전혀 도도하지 않았다.

“너 지금 얘 스토킹하겠다는 거야?”

휴가 골 때린다는 표정으로 소녀를 보았다.

“따라다니면서 귀찮게 할 생각은 없어. 그냥 마사에 왔을 때만 관찰할 거야. 그 정도는 괜찮잖아?”

소녀는 동의를 구하듯 도현을 보았다. 자신감 넘치는 두 눈은 의지와 생기로 일렁였다. 그러나 도현의 침묵이 길어지자 깨지기 쉬운 유리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다.

기세가 한풀 죽은 소녀가 도현의 눈치를 보며 조심히 물었다.

“…괜찮지 않아?”

“음.”

시간을 끌자 애가 타는지 입술을 깨문다. 첫인상은 당황스러웠는데, 이제 보니 조금 귀여운 것도 같았다. 웃음을 삼킨 도현이 말했다.

“대신 조건이 있어.”

“뭐, 뭔데?”

“네 이름 알려줘. 난 이도현이야.”

소녀의 눈이 조금 커졌다가, 이내 원래 크기로 돌아갔다. 다시금 자신만만해진 소녀가 어깨를 쫙 편 채 턱을 조금 치켜들었다.

“에린 로지에타 헤데튼이야.”

“그래. 안녕, 에린.”

역시 좀 웃긴, 아니, 재밌는 애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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