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4화. The bower lake school (15)
점심시간의 카페테리아는 언제나 북적였다. 체육 수업을 마치고 씻느라 평소보다 한 박자 늦게 온 리지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한쪽에서 손이 불쑥 올라왔다.
“리지, 여기!”
“그레이스.”
리지가 그녀의 옆에 털썩 앉으며 투덜댔다.
“달리다가 토할 뻔했어. 망할, 그 높은 언덕을 5km나 쉬지 않고 어떻게 달리라는 거야?”
“와트는 원래 그렇잖아.”
체육 교사인 와트는 전직 군인이었는데, 그 사실이 무척 자랑스러운지 수업할 때면 자신의 무용담을 줄줄이 늘어놓으며 그의 기준을 학생들에게 요구했다.
때문에 와트의 수업을 들은 TBLS-The Bower lake school의 약자- 학생들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뉘었다. 반쯤 죽어서 좀비처럼 다니거나, 살아남아 적응해서 날이 갈수록 튼튼해지거나!
“이것 좀 마셔.”
리지를 불쌍하게 보던 그레이스가 제 몫의 콜라를 양보했다. 리지가 고맙다고 말하며 콜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시원한 탄산에 간신히 기운을 차릴 때였다. 갑자기 주위가 묘하게 술렁였다.
인간은 단체 생활이 기본이었고, 마찬가지로 그런 특성을 가진 리지는 분위기에 떠밀려 술렁임의 근원지를 보았다. 거기엔 학교의 유명 인사들이 있었다.
고개를 쭉 빼 든 남학생들이 라비니아를 훔쳐보았다. 영화배우라는 백금발의 소년과 웃으며 대화하는 모습에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기도 했다.
리지는 어이없었다. 그래봤자 라비니아가 상대도 안 해줄 것들이.
무리의 중심엔 언제나처럼 아이덴 커티스가 있었다. 그 양옆을 지키는 건 시몬과 레슬리였다.
시몬은 그의 팔짱을 낀 크리스틴과 애정 행각을 나누고 있었고, 레슬리는 은근히 턱을 치켜든 채 으스대는 중이었다.
그들은 모두 외모가 준수했다.
라비니아는 말할 것도 없고, 크리스틴도 라비니아에게는 밀리지만 늘 인기 투표에서 2위를 차지하는 미소녀였다. 아이덴은 단정한 정석 미남에 가까웠다. 그런데 이제 키가 186cm에 어깨가 무척 넓고 단단한.
조금 날티가 나긴 해도 잘생긴 시몬과, 거만하고 멍청한 행동이 평판을 깎아 먹는 것과 별개로 커다란 체격과 굵직한 선이 남자다운 레슬리도 겉보기엔 꽤 괜찮았다.
물론 리지는 레슬리가 제게 관심을 보인다면 기겁하며 도망갈 생각이 있었다. 그녀는 멍청한 건 딱 질색이었다.
그들은 모두 입학 때부터 핫했던 이 학교의 셀럽들이었지만, 요즘 급부상하는 건 저 백금발이 예쁜 소년이었다.
헤레이즈 아이데가 처음 학교에 왔을 땐 여학생들이 크게 술렁였다. 아무리 부잣집 자제들을 모아두었다 하나, 결국엔 시각적 요소에 약한 인간인 동시에 호르몬이 한창 왕성한 청소년들이었으니까.
라비니아가 그를 마크하지만 않았더라도 헤레이즈는 데이트 신청을 양 손가락이 넘도록 받았을 터였다. 지금도 그레이스가 그를 정신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리지도 헤레이즈의 외양만큼은 봐줄 만하다고 생각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푸른 눈동자와 마주쳤을 땐 그가 자신에게 데이트를 신청하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잠깐이었지만.
6인방은 그들을 추종하는 이들에게 접시를 가져오게 시키고 그들의 지정석에 가서 앉았다. 그 주위에 자연스럽게 아이들이 몰렸다. 그럴 리 없겠지만, 이 카페테리아에서 그들이 있는 곳만 화려하게 반짝거리는 거 같았다.
그때였다. 골든 이글을 흠모하듯 쳐다보던 아이 중 일부분이 고개를 돌렸다. 무심코 시선을 돌린 리지는 그 이유를 금방 알아챘다. 두 번째로 시선을 집중시킨 무리는 방금 들어온 이들과는 다른 의미로 특별했다.
휴 모건이 카페테리아로 들어오며 장난스레 웃었다. 또래보다 큰 키와 어두운 머리칼, 그리고 어딘가 야생 동물 같은 호박색 눈동자가 가늘게 휘어졌다.
그는 반동분자에 가까운 데다가 변덕도 심해서 여자친구를 틈만 나면 갈아치웠지만, 수려한 얼굴과 유쾌한 성격으로 인기가 많았다. 지금도 그의 새로운 여자친구가 되길 원하는 여학생들이 남몰래 훔쳐보고 있었다.
서로 딱 달라붙어 사이가 좋아 보이는 두 소녀는 신시아 엘더와 로즈마리 비앙카였다.
둘은 남이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작은 체구와 요정 같은 외양이 주는 느낌이 아주 비슷했는데, 신시아 쪽이 더 예쁘긴 했다. 그건 그녀가 배우이니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무어라 조잘대는 로즈마리의 머리를 테오도르가 꾹꾹 눌렀다. 비니로 훤히 드러난 이마와 눈썹이 반듯했다. 그러나 개성이 강한 무리에서 제일 눈에 띄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리지는 반사적으로 숨을 죽였다.
아이덴처럼 무리의 중앙에 선 것도, 헤레이즈처럼 머리카락 색이 특별히 예쁘거나 화려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시선을 집중시켰다.
학교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건 그가 유명한 배우여서도, 오자마자 레슬리와 싸움을 해서도 아니었다. 아니, 그것도 일부분 작용을 했겠지만, 더욱 근원적인 이유는….
“눈에 호숫물을 부은 거 같아.”
“우리 호수는 일급수 아니라서 아플걸.”
“말이 그렇단 거잖아, 그레이스.”
웃기지 않게도, 소년이 등장한 순간 화악-하고 공간이 환하게 바뀐 기분이었다. 흠결 없는 이목구비며 피부는 어딘가 환상적인 구석이 있었다. 그와 대비되는 까만 머리카락은 만지면 잉크라도 묻어날 거 같았다.
얼굴선은 명확하면서도 유려했다. 직선과 곡선이 절묘하게 공존하는 얼굴은 어이없을 정도로 잘생겼는데, 때론 예쁨이나 청초함과 구분이 되질 않았다.
맙소사, 남자애한테 청초함이라니?
땀내 나는 또래 애들한텐 절대로 적용될 수 없는 단어였다. 하지만 우수에 찬 검은 눈이나 음영이 진 눈가를 보면 그런 말도 쏙 들어갔다.
리지 주변의 남자애들은 소년을 게이 같다거나, 여자 같다며 까 내리곤 했지만 리지는 동의하지 않았다. 똑같은 교복을 걸쳤음에도 홀로 모델인 것 같은 비율도 그렇고.
그녀는 축구를 하던 소년이 윗옷을 올려 땀을 닦는 걸 본 적이 있었다. 뒷모습이었지만, 등 근육이 놀랍도록 선명하고 촘촘하게 짜여 있었다.
“가까이 가면 좋은 냄새 날 거 같아.”
멍하니 중얼거리자 그레이스가 눈을 찡그렸다.
“너 변태 같아, 리지.”
리지는 그레이스를 한 번 툭 칠뿐 뭐라고 하진 않았다. 내심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소년이 이쪽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리지는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
나? 나 보고 웃은 거야?
머릿속에서 그에게 데이트 신청을 받아서 호숫가에서 키스하고 학교를 졸업한 후 결혼하는 장면이 펼쳐졌다. 쟤는 검은 턱시도가 아니라 흰 예복을 입혀도 잘 어울릴 거야.
아이는 몇 명이 좋을지 생각하던 그녀는 곧 도현의 시선이 묘하게 그녀를 비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망감과 함께 묘한 납득이 찾아왔다.
그래, 나를 보고 웃을 일이 어디 있겠어.
약간 침울해진 리지는 소년이 웃어준 상대를 보았다. 리지의 옆 테이블에서 홀로 버거를 우걱우걱 먹고 있던 소녀였다.
에린 헤데튼이었나?
리지도 에린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꽤 주목받는 존재였다. 그 예쁘장한 얼굴과 모델 같은 몸매 때문은 아니고, 괴짜 같은 성미와 이상한 말 페티시로.
지금도 이 넓은 카페테리아에서 홀로 버거를 먹고 있지 않나.
무리에서 떨어지는 건 곧 죽음과도 같은 소년 소녀들 사이에서 이는 무척 눈에 띄는 일이었다.
“에린, 여기 자리 있어?”
버거를 한가득 문 소녀가 고개를 저었다. 없다는 뜻이었다. 도현은 웃으며 그 옆에 앉았다. 그에 소년의 무리가 자연스럽게 그 테이블에 우르르 착석했다.
“버거만 먹으면 목 막히지 않아? 내 음료수 줄까?”
“으움, 음.”
“난 안 마셔도 돼. 입 안 댄 거니까 편하게 마셔.”
“으붑.”
“응, 그래.”
대화를 어떻게 하는 건지. 도현은 에린의 웅얼거림을 찰떡같이 알아듣고 대답했다.
부럽다. 리지는 한 번도 저 괴짜 같은 애를 부러워한 적이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부러웠다.
“이것도 먹어. 새우링이야.”
급기야 에린에게 이것저것 주기 시작하는 소년에 리지가 힘없이 말했다.
“사귀는 걸까?”
“내 생각엔 사육하는 거 같은데….”
“너무 다정해 보여.”
“우리 아빠가 애완용 돼지를 기를 때 딱 저런 표정이었어, 리지.”
“겉모습은…. 그래, 인정하긴 싫지만 나름 어울리네.”
“그 돼지 지금 내 키보다 더 커. 미니피그라고 말한 놈을 만나면 돼지를 업고 집을 세 바퀴 돌게 할 거야. 내 방을 제멋대로 차지해서 난 방도 바꿨다고. 리지, 듣고 있어?”
“몰라. 난 지금 실연의 아픔을 겪고 있다고.”
“헛소리 그만하고 정신 차려 봐.”
목소리를 죽인 그레이스가 속삭였다.
“지금 아이덴이 이쪽을 보고 있어.”
그 말대로 이쪽을 주시하던 아이덴이 몸을 일으켰다. 그가 리지의 옆 테이블을 향해 걷자 카페테리아가 무척 조용해졌다. 무슨 일일까? 싸우려는 걸까? 그런 호기심이 퍼져나갔다.
털썩, 아이덴이 도현의 맞은편에 앉았다. 안녕, 인사하는 얼굴이 부드러웠다.
“안녕하세요, 아이덴.”
“그날 이후로 펜싱장에 들르지 않더라.”
그가 친근하게 말을 걸자 주변에 있던 아이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이덴은 시몬이나 레슬리처럼 남을 괴롭히고 즐거워하는 부류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친절하게 굴지도 않았다.
“클럽 부원도 아닌데 마음대로 들락날락할 수는 없으니까요.”
“괜찮으니까 원한다면 언제든 와서 구경해도 돼. 저번처럼 네 친구를 기다려도 되고.”
“친절 감사합니다.”
“그래, 점심 맛있게 먹어.”
아이덴은 좋은 선배처럼 도현의 어깨를 한 번 짚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로 인사만 하려고 왔던 것처럼.
그에 아이들은 혼란스러워졌다.
새 유학생은 골든 이글과 사이가 안 좋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멀리서 앉아 있던 레슬리는 이쪽을 보고 이를 갈긴 했지만, 특별한 제스처를 취하진 않았다. 그는 저를 쳐다보는 시선에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구기고 욕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 광경을 본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상황을 이해했다.
레슬리와 시비가 붙긴 했지만, 골든 이글과 사이가 안 좋지는 않구나!
아이덴이 그 클럽의 중심이나 다름없으니 당연한 생각의 흐름이었다. 이내 그들은 라비니아가 호감을 보이며 가입 제안을 한 것, 그리고 골든 이글 일원 중 한 명이 같은 배우인 헤레이즈인 것까지 떠올리고선 완전히 이를 확신했다.
그레이스가 작게 말했다.
“큰일 났네, 리지. 경쟁자가 잔뜩 생겼어.”
골든 이글의 눈치를 보느라 다가오지 못했던 아이들이 사냥감을 발견한 눈으로 그들의 옆 테이블을 보고 있었다. 리지는 한숨을 내쉬며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힘내. 아니면 너도 앞으로 밥 혼자 먹든가. 그럼 불쌍해서 관심 가져줄지도 모르잖아.”
“정말 도움이 된다, 그레이스.”
리지의 빈정거림에 그레이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본래 친구란 남의 불행에 즐거워하는 존재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