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565화 (566/582)

제565화. The bower lake school (16)

헤레이즈는 자기 객관화에 능한 편이었다.

그는 루카 하퍼나 이 학교에 널린 아이들처럼 좋은 집안을 타고나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운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의 부모님은 잘나가는 사업가는 아니다. 그러나 네 가족이 먹고사는 데 문제없을 만큼의 소득 수준은 유지했으며, 무엇보다 헤레이즈를 무척 아꼈다.

그들은 아이의 특별한 부분, 결벽증과 같은 성미를 알게 되고 나서도 그것을 억지로 교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대로 받아들이고, 포용했다.

덕분에 아이는 자신의 유별남을 알아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숨길 때도 있지만, 그건 일신의 안위와 편안함을 위한 거지 그게 부끄럽다거나 감추고 싶은 건 아니었다.

그가 타고난 건 부모님의 사랑과 그로 인해 형성된 단단한 자아 정체성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기억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사람들은 그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말랑말랑한 뺨이나 커다란 눈망울을 홀린 듯이 들여다보며 감탄사를 뱉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자신이 어떤 외양을 가졌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또한 아이는 천재는 아니더라도 명석했고, 능수능란하지는 않아도 눈치가 빨랐다.

그런 헤레이즈에게 있어서 이 상류층 학교에 적응하고 녹아드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도 훌륭하게 중심 무리에 파고들지 않았던가.

다른 아이들보다 집안이 좋지 않아도 헤레이즈를 무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헤레이즈는 충분히 스스로 그런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걔는 뭐지.’

소년의 수려한 이마에 주름이 졌다.

도현의 행보는 헤레이즈와 완전히 달랐다. 일단 그는 운부터 좋지 않았다. 룸메이트에 그 ‘휴 모건’이 걸렸으니까.

그래도 그 정도는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문제였다. 도현이 레슬리와 정면으로 부딪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본인 말로는 아무것도 안 했다지만, 그걸 믿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헤레이즈가 그러하듯 도현도 타고난 것이 많아서, 도현이 가진 것들은 그에게 다시 한번 기회를 주었다.

라비니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성격이었으니, 클럽에 들어오겠냐는 제안은 분명 진심이었을 터다.

그걸 승낙만 했으면 모든 게 쉬워졌을 텐데.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건지.’

하지만 도현은 또 이를 거절했다.

그러고선 승마 클럽에 들어가, 괴짜로 유명한 여자애랑 친분을 과시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주류에서 벗어난 행동이었다.

그 제멋대로인 행동에 헤레이즈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 학교에서 도현의 입지는 애매했다. 신시아는 그래도 작고 무해한 데다가 어딘가 속세를 초탈한 느낌도 있어서 건들 생각도 안 드는 존재였다. 하지만 도현은 그런 신시아와도 달랐고, 심지어 동양인이었다.

헤레이즈는 도현의 생활이 조금 불편해질 거라고 예상했다.

- 안녕, 도현.

그리고 예상은 보기 좋게 박살 났다.

‘대체 아이덴은 언제 꾄 거야?’

도현은 헤레이즈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상황을 타파했다.

그는 헤레이즈처럼 이 학교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지 않았다. 하고 싶은 걸 굳이 참지도 않았다. ‘어울려야만 하는’ 사람과 어울리지 않고 어울리고 싶은 사람과 함께했다.

아이덴이 그들의 테이블로 돌아왔을 때, 레슬리는 부글부글 끓는 낯으로 으르렁댔다.

- 아이덴! 왜 그런 놈한테 인사를 하는 거야?

- 레슬리. 내가 너한테 인사를 할 사람도 허락받아야 하는지는 몰랐네.

거칠던 기색은 아이덴의 한 마디에 주춤했다. 기세가 줄어든 모습에 아이덴이 느긋하게 웃었다.

- 난 그가 꽤 마음에 들어. 강요는 아니지만, 너도 잘 지내면 좋지 않을까?

권유처럼 말했지만, 정말 권유로 알아들은 사람은 없었다. 레슬리는 턱에 주름이 질 정도로 이를 악물다가, 쿵쿵거리며 카페테리아를 빠져나갔다.

그렇게 제멋대로 구는데도 상황은 당연하다는 듯이 도현에게 호의적으로 흘러간다.

묘한 패배감이 그의 혀끝에 맴돌았다. 입맛이 조금 썼다.

동시에 순순한 수긍이 이어졌다.

그건 헤레이즈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들어 걷다 보니 눈앞에 온실이 있었다. 이 학교에 두 달 넘게 다니면서 한 번도 오지 않은 곳이었다. 헤레이즈는 천천히 온실 문을 열었다.

“아서!”

온실 안쪽에서 신시아가 손을 흔들었다. 그 옆에는 도현과 신시아의 명예 자매인 메리도 있었다.

그들의 앞까지 다가간 헤레이즈가 조금 묘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하자고?”

도현은 헤레이즈와 신시아에게 연기 연습을 제안했다. 두 사람은 수락했고, 처음엔 연습실에서 진행하기로 한 계획은 신시아에 의해서 온실로 바뀌었다.

“아니, 조금 더 안쪽으로 갈 거야.”

“식사모만 올 수 있는 곳인데 특별히 허락해 주는 거야. 감동이지?”

옆에 있던 메리가 으스댔다.

“별로….”

“정말? 그런 장소에 내가 가도 돼?”

떨떠름히 부정하려는데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진심으로 기껍다는 듯 검은 눈동자를 반짝이는 소년의 것이었다.

메리가 흐흥, 콧소리를 내었다.

“넌 내 절친이 아끼는 애니까.”

“고마워. 벌써 기대되네.”

헤레이즈는 묘한 눈으로 도현을 보았다.

이곳에서 제일 상급자는 헤레이즈였고, 신시아나 메리, 도현은 다 동급생이었다. 그런데 도현은 자신의 친구들을 꼭 동생 대하듯이 했다.

너무 쳐다본 걸까. 도현이 의아한 눈길을 보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려는데 도현이 갑자기 탄식했다.

“헤레이즈. 너 괜찮아?”

“갑자기?”

“아니, 여기 꽃이 많잖아. 다른 식물도…. 그래서 향기가 진한데, 괜찮아?”

온실 문을 연 순간부터 진한 풀 내음과 꽃 특유의 단 향이 온몸을 에워쌌다.

그조차 신경 쓰지 않고 있던 문제인데, 도현이 걱정하는 게 이상해서 눈썹을 조금 찡그렸다.

“내가 싫어하는 건 동물의 체취나 불쾌한 냄새야. 이런 식물 냄새는 문제없어.”

“그럼 다행이네.”

…설마 쟤, 나도 동생처럼 보는 건 아니겠지?

합리적인 의심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설마. 그는 부정하면서도 스스로 확신할 수가 없었다. 복잡미묘한 표정을 짓던 헤레이즈는 곧 고개를 털었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말자. 지금은 중요한 건 연기니까.

헤레이즈는 신시아와 사이좋게 대화를 나누는 도현의 옆얼굴을 응시했다.

대략 일 년 하고도 육 개월.

그동안 얼마나 달라졌을까?

* * *

“-흐, 호와아….”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진 로즈마리가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겨울을 위해 비축해 둔 도토리를 빼앗긴 다람쥐처럼 경악한 얼굴이 도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마린가 메린가가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가 다시 도현을 보았다. 그녀는 곧 얼이 나간 목소리로 말했다.

“…원래 연기가 이런 거야?”

그녀의 물음에 헤레이즈가 헛웃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나.

방금까지 오만하고 서늘하던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순하고 다정한 빛이 도현의 얼굴 위로 다시금 차올랐다. 그 거리감이 기이할 정도였다.

“언제부터 연습한 거야?”

“시즌 1 방영이 끝난 날부터 천천히?”

“그땐 대본도 없었잖아?”

“그래도 소설책은 있잖아.”

“그건….”

헤레이즈는 금방 인정했다.

“그래, 내가 바보 같은 질문을 했네.”

때도, 때도 연기력으로는 그 누구도 흠을 잡을 수 없는 도현이었다. 거기서 더 나아갈 수 있나 싶었는데, 더 나아갔다.

가장 큰 변화는 여유였다.

‘연기에 공백이 생겼어.’

이전에 도현의 연기는 꽉꽉 들어찬 보석함과 같았다. 그 안에 온갖 진귀하고 화려하며 희귀한 게 가득해 눈이 돌아가게 하는.

그러나 방금 본 연기는 어딘가 비어 있었다. 공허하다는 뜻이 아니었다. 어딘가 초조하고 조급하던 기색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의미였다.

보석함에서 가장 빛나고 귀한 보석만 내밀어, 그것에 시선이 온통 쏠리도록 만든다. 전보다 더욱 집중하게 되면서도 편안함이 생겨난 연기였다.

“괜찮았어?”

“말이라고 해?”

헤레이즈는 괜히 퉁명스레 말했다.

주인공은 자신인데, 이러다가는 존재감과 휘광을 빼앗길 거 같아서 초조해졌다. 그가 무의식적으로 마른 입술을 핥았다.

“겁먹었어?”

“하?”

검은 시선이 맞닿아 온다.

“자신 없는 표정인데, 아니야?”

도발하려는 것도, 시비 거는 것도 아니었다. 오직 본 것을 읊는다는 듯이 무던한 시선과 목소리였다.

그에 헤레이즈는 울컥했다.

“내가? 언제?”

날카롭게 튀어 나간 말에도 도현은 놀라지 않았다. 아무리 뾰족하고 차가운 창날도 그를 동요시킬 수는 없을 거 같았다.

“나는 이 배역이 마음에 들어, 헤레이즈. 그리고 배역이 완성되는 순간은 혼자 연기할 때가 아니라, 상대역과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갈 때라고 생각해.”

“하려는 말이 뭐야?”

도현이 부드럽게 웃었다.

“내 배역이 완벽해지려면 네 도움이 필요해. 너도, 신시아도, 다른 사람들도.”

격려도 꼭 자기 같은 방식으로 하네. 퉁명스레 생각하면서도 헤레이즈의 안색은 어쩔 수 없이 누그러졌다.

“그래. 나도 열심히….”

“그러니까 겁먹지 말라고.”

“…열심히 너를 짓밟아 볼게, 이 망할 자식아.”

으득, 이를 갈자 도현이 재밌다는 듯이 유쾌하게 웃었다. 그에 헤레이즈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생겨났다.

로즈마리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뭐야, 쟤네 왜 저래? 그런 의아한 물음에 신시아가 덤덤히 말했다. 르옌이랑 아서는 원래 상성이 안 좋아. 일상적인 투가 온실 속에 녹아들었다.

처음엔 어리둥절하던 로즈마리도 날이 갈수록 그들에게 익숙해져 갔다.

매주 월, 수, 금.

식사모의 둥지에 모여서 연기 연습을 진행하는 날이었다. 로즈마리는 그 모임에 매번 참석했다.

본인은 이 공간이 식사모의 것이라서 그들만 놔둘 수 없다고 주장했는데, 세 사람이 연기를 시작할 때마다 반짝반짝해지는 눈동자는 그녀의 주장에 신뢰성을 빼앗았다.

그녀는 어느새 세 사람의 연기에 푹 빠져 있었다. 그 시간을 사랑하는 건 로즈마리뿐만이 아니었다.

신시아는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온실을 둘러보았다.

그녀가 사랑하는 식물, 그녀가 사랑하는 친구, 그녀가 사랑하는 아서와 르옌.

‘좋은 게 한가득.’

신시아는 매일이 특별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오늘은 조금 더 특별했다.

“빨리, 빨리 연주해 줘!”

로즈마리가 기대 가득한 눈으로 도현을 보았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

매번 식사모의 공간을 빌리는 게 미안했던 도현이 신시아에게 무언가 도와줄 게 없는지 물었고, 신시아는 식물이 행복해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 식물한테 감정이 어디 있어?

감수성 따위 내다 던진 헤레이즈와 달리 도현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정말로 방법을 찾아왔다.

- 식물도 음악을 듣는 걸 좋아한대. 그러니까 내가 연주를 해주면 어때?

신시아는 무척 기뻐했다.

그리하여 털깃털이끼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작은 연주회가 열리게 된 것이다.

헤레이즈는 바닥에 앉아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양옆을 차지한 관객이 털깃털이끼와 쥐꼬리이끼였기 때문이었다.

“이끼한테 뭔 연주회를….”

“아서, 쉬잇.”

“아니…. 하, 그래. 마음대로 해라.”

그는 결국 체념한 표정을 지었다.

짝짝짝짝! 도현이 인사하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도현은 옹기종기 모인 인간과 식물에게 미소로 화답한 후, 바이올린을 들었다.

무슨 곡이 좋을까.

‘경쾌하고 사랑스러운 곡이 좋겠어.’

결정하자마자 활을 움직였다.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봄.

베토벤의 가장 유명한 소나타의 1악장이 도현의 손끝에서 흘러나왔다. 동시에 시큰둥하던 헤레이즈의 푸른 눈이 크게 떠졌다.

아름다운 선율은 그들을 한번 휘감고 창문 너머로 두둥실 흘러가, 바람 위에 올라탔다. 산들바람에 올라탄 선율은 옆 건물에서 창문을 열고 차를 마시던 이에게도 흘러 들어갔다.

아드리아나와 티타임을 가지던 마샤가 찻잔을 내려놓고선 가볍게 눈을 감았다.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올라온 채였다.

“아름답네요.”

새로운 편입생이 학교에 온 지 한 달째의 어느 날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