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6화. 명사수 아니면 배우 (1)
“이건 허벅지에 두르고, 이렇게, 꽉 조여서 고정하는 거야. 아, 가만히 있으렴. 허리랑 가슴에도 둘러야 하니까.”
의상 팀의 직원이 가죽 벨트를 옷 위에 고정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 가슴과 어깨를 가리는 갑주와 손등부터 팔꿈치까지 타고 올라오는 철갑 아대, 등에는 녹회색 로브를 둘렀다.
인형처럼 가만히 서 있던 도현이 물었다.
“끝인가요?”
“아니. 로브 고정해야 해.”
그녀는 무언가 끼우고 꿰매며 로브를 고정했다. 그녀 말고도 한 명의 직원이 옷매무새 정돈에 손길을 더했다.
“허리를 더 줄여도 되겠는데.”
유니폼 테스트에 와 있던 토드 감독이 말을 얹었다. 그에 직원이 시침으로 상의의 허리 부분을 집어 놓았다. 그에 토드 감독이 만족스러운 눈을 했다.
“지금이 딱 좋아. 날렵해 보이고, 허약해 보이지도 않고. 딱 르옌 누바라 같아. 촬영까지 이 상태를 유지만 하면 되겠어.”
촬영을 앞둔 배우는 배역에 맞춰 체형을 관리해야 한다. 그리고 도현이 유지하고 있는 체형은 강한 전사면서 명사수지만 동시에 기품 있는 후계자인 르옌과 완벽히 어울렸다.
“이리 와서 앉아.”
도현은 순순히 직원의 손에 이끌려 의자에 앉았다.
도현의 머리카락이 쓱쓱 넘어가고, 그 위로 가발이 얹어졌다. 날개 죽지까지 내려오는 흰 머리칼은 어떻게 한 건지는 몰라도 진짜 머리카락처럼 자연스러웠다.
가발을 단단히 고정한 직원은 빗으로 머리카락을 몇 번 정리하더니, 중간 부분을 느슨하게 땋았다. 머리카락 끝까지 땋는 건 아니고, 머리 끈으로 고정하는 부분만 살짝 땋아 놓은 모양이었다.
고급스러운 천으로 된 끈이 사분하게 늘어졌다. 자연스럽게 옆머리를 빼어내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은색 장신구를 가져왔다. 엘프 귀처럼 뾰족한 모양새의 이어 커프였다.
분장으로 귀 끝을 뾰족하게 만들고 그 위에 이어 커프까지 착용하니 위화감 없이 잘 어울렸다. 머리 위로 스프레이가 몇 번 왔다 갔다 한 후 도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의상 감독이 도현에게 무언갈 내밀었다.
“이건….”
도현은 그에게서 활과 활 통을 받아 들었다.
활과 활 통의 몸통은 윤기가 흐르는 단단한 목재였고, 모서리 부분을 비롯하여 중앙 부분에 광택 없는 금속으로 문양이 장식되어 있었다.
그것을 돌려보던 도현이 말했다.
“옛날이랑 다르네요?”
“네 몸이 컸으니까 크기를 바꾸는 김에 디자인을 조금 손봤지. 어때. 마음에 드니?”
“아주 멋져요.”
계속 구경하고 싶었는데, 다른 사람이 다가와 활 통을 가져갔다. 그리고 몸에 두른 가죽 벨트와 이어서 고정했다.
“무겁진 않고?”
“괜찮아요.”
도현은 그들의 요구를 따라 몸을 한 바퀴 돌아 보았다. 그에 사무실 안에 있던 사람들이 흡족한 낯으로 박수했다.
“어디 불편하거나 안 맞는 곳 있으면 말해줘야 해. 여기저기 움직여 봐. 음, 체조라도 해보던가.”
수많은 시선 속에서 도현은 아무 부담감 없이 이리저리 걸어 다녔다. 몸을 쭉쭉 펴고, 토드가 바라는 대로 체조도 한번 하는 소년을 카메라가 쫓았다.
“문제없네요.”
모든 테스트를 완료한 후, 도현은 두 시간이 넘게 흐르고서야 다시 코스튬을 벗을 수 있었다. 입고 왔던 편안한 청바지와 맨투맨을 걸치는데, 토드가 와서 물었다.
“이전에 찍었던 장면 기억하지?”
“네.”
를 찍을 당시, 그들은 다음 시즌의 앞부분도 미리 찍어두었다. 성장기라 몸이 커버리니, 최대한 시간의 흐름을 영화에 자연스럽게 담아내기 위함이었다.
“내 사무실로 따라오렴. 보여주마.”
“…편집이 다 끝났어요?”
“끝난 건 오래전이지. 찍은 지 꽤 됐으니까.”
심장이 콩닥거렸다.
도현은 상기된 낯으로 토드의 뒤를 따랐다. 오스카 또한 도현의 옆에 함께했다.
“헤레이즈랑 신시아는요? 그 애들도 봤어요?”
“그 애들도 코스튬 테스트 끝내면 보여줄 거야.”
“무슨 이유가 있나요?”
“보상 같고 좋잖아.”
“토드 감독님, 혹시 게임 좋아하세요?”
그가 어떻게 알았느냔 얼굴로 보았다. 도현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 * *
사무실에 도착한 도현은 꽤 경건한 심정으로 스크린을 보았다. 오스카도 기대감과 흥분을 숨기지 못하는 낯으로 숨을 죽였다.
첫 장면은 절벽이었다.
아서가 곰을 만나 도망쳤던 곳이자 길잡이의 힘을 깨우친 곳이며, 동시에 아버지를 잃은 장소. 그 절벽 끝에 앉은 아서는 푸른 눈으로 세상을 내려다보았다.
바람이 가는 금실 같은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상념에 잠긴 소년은 뒤에서 들린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 아서, 돌아가자.
눈을 깜빡인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소년은 숲을 등지고 나왔다.
마을 사람들은 아서를 볼 때마다 반갑게 인사하며 먹을 것을 하나씩 들려주었다. 우더족의 영웅이 집에 도착했을 땐, 바구니 한가득 음식이 쌓인 채였다.
- 아서, 짐은 다 챙긴 거야?
- 몇 번이나 확인했잖아.
안달 내는 롤랑과 달리 마을 사람이 준 빵을 뜯어 먹는 아서는 태평했다.
그 느긋하기까지 한 태도에 롤랑이 한숨을 내쉬었다.
- 모두 널 축하하고 싶어 했는데.
- 난 이 선물이면 충분해.
아서가 바구니를 들어 보였다.
그런 아서를 보는 롤랑의 눈이 모닥불처럼 일렁였다.
내일은, 아서가 신성한 나무에 길잡이 후보로서 들어가는 날이었다.
도현은 아서가 롤랑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스크린에 들어가기라도 할 기세로 집중해서 보았다.
이 장면들은 도현이 보지 못했던 것들이다. 촬영할 때 항상 지켜보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
롤랑의 경고와 함께 마을 내에서의 마지막 밤이 저물었다. 다시금 화면이 밝아졌을 땐, 시즌 1에서 봤던 공터였다.
“오, 너다.”
언제나처럼 누바라족은 화려하고 웅장하게 등장했다. 도현은 지금보다 조금 더 앳된 제 얼굴을 타인의 것처럼 관찰했다.
장면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보름달이 기울며 신성한 나무로 향하는 빛의 길이 열린다. 제 일족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던 길잡이들이 하나둘씩 빛으로 뛰어들었다. 남은 이들은 떠난 이를 위해 기도했다.
그리고.
나무 내부로 들어간 길잡이들의 앞에 정령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 어둠 속의 길을 밝혀주는 별이 되길.
신성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 후로도 영상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윽고 마지막 장면까지 나오자, 도현은 조용한 숨결을 내뱉었다.
토드는 소감을 묻지 않았다.
잠에서 덜 깬 거 같은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촬영을 시작하면 제일 먼저 찍을 장면이 뭔지 알겠지?”
“…네.”
도현은 멈춘 장면을 눈에 담았다.
토드는 도현이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그리고 도현이 시선을 들었을 때, 그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너는 여러 의미로 할리우드에 오래도록 기억될 거란다. 우리가 그렇게 만들 거고, 내가 그렇게 할 거고, 또 네가 해낼 일이지.”
“…….”
“뻔한 흥행작 같은 건 필요 없어. 우리는 그 자체로 시대를 상징하게 될 거니까.”
처음 듣는 포부였다.
도현은 점잖다고 생각했던 토드의 눈에서 야망을 읽었다. 또 그가 이 영화에 얼마나 많은 기대를 걸고 있는지도 깨달았다.
그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말이고 큰 욕심인지 토드가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토드는 솔직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 열기가 도현에게 옮겨붙는 기분이었다.
“주인공은, 그래. 헤레이즈지만.”
토드가 도현을 보았다.
“언젠가 넌 상징이 될 거야.”
그 말이 가슴 깊숙이 박혀 들었다.
“오스카, 잠깐만요.”
“응?”
“더글러스 감독님께 볼 일이 있어요.”
토드의 사무실을 나온 도현은 코스튬 테스트를 할 때 있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들은 도현이 다시 오자 의아한 기색으로 반겨주었다.
“더글러스 감독님.”
“무슨 일이니?”
친절하게 대답해 주는 남성은 미술 감독 겸 의상 감독이었다. 그가 도현과 눈을 맞추자, 도현은 본론을 꺼냈다.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흠? 나한테?”
“네. 저 소품, 제가 가져가도 될까요?”
가는 손가락이 쭉 뻗어진 방향은 활과 활 통이 보관된 곳이었다. 그에 주변에 있던 이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더글라스도 마찬가지였다.
“저게 마음에 든 모양이지? 물론 내가 봐도 잘 뽑혔긴 해. 그런데 중요한 소품이라서 장난감 주듯이 건네줄 수는 없단다. 아주 비싸기도 하고.”
“장난감이 필요한 게 아니에요.”
“얘야.”
“르옌은 활을 품에서 떨어트리지 않겠죠. 어렸을 때부터 한 몸이나 다를 바 없이 지냈을 거예요. 몸을 지킬 수 있는 무기를 떼어 놓는다는 건 무력해진다는 뜻이고, 르옌은 무력한 걸 혐오하니까.”
더글라스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는 도현의 말을 들어볼 생각이 든 거 같았다.
“그래서 저도 활을 한 몸처럼 들고 다니려고요. 익숙해지고 싶어서요.”
도현은 추가로 덧붙였다.
“아, 토드 감독님께선 좋은 생각이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중요하고 비싼 소품은 도현의 손에 떨어졌다.
건물을 나오던 오스카는 도현의 등에 메진 활 통과 그 안에 든 화살, 그리고 전리품처럼 손에 들린 활을 보고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들고 가게?”
그는 이 소품을 제작하는 데 든 비용을 듣고 나서부터 계속 저런 반응이었다.
“오스카는 겁이 많네요.”
“네 배짱이 너무 두둑한 게 아닐까….”
그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얘를 어떻게 말리겠어.
“그래서 그걸 정말 종일 들고 다닐 거야?”
“그것뿐이게요? 잘 때도 옆에 두고 잘 거예요.”
“그러다 부서지면 어떡해?”
“저 잠버릇 없어요. 안심해요, 오스카.”
그리고 만약 부서져도 오스카한테 돈을 빌려달라곤 하진 않을게요. 장난처럼 덧붙이는 말에 오스카가 부르르 떨었다. 말만으로도 불길했다.
말한 것처럼 돈 때문은 아니었다.
돈이 문제가 아니란 건 아니지만, 더 큰 문제는 이게 하나부터 열까지 커스텀한 수제품이라는 사실이었다. 오스카는 페어리 픽처스 측에서 제발 예비용 소품을 구비했기를 바랐다.
“잠버릇은 그렇다 치고. 학교에서 그걸 들고 다닐 수 있겠어? 이상하게 볼 텐데.”
“오스카의 말엔 오류가 있어요.”
“뭔데?”
역시 내내 들고 다니겠다던 말은 과장 같은 거였나? 오스카가 기대를 품을 때였다.
“이상하게 보는 게 아니라 이상한 거죠. 그러니까 제대로 보는 거고요.”
“…너는, 아는 애가 그러냐?”
도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오스카는 앓는 소리를 내었다. 생긴 것만 멀쩡하지, 아주…. 소리가 되지 못한 한탄은 탄식으로 흘러나올 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