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7화. 명사수, 아니면 배우 (2)
너 진짜… 어지간히 떨떠름한지 입술이 몇 번 달싹였다.
복잡한 낯을 하던 소년이 코끝을 찡그렸다.
“답 없는 너드 같아.”
안다.
“서브컬처에 심취해서 현실과 판타지를 구분 못 하는 너드 같다니까?”
다시 말하지만, 알고 있다.
“잠깐, 잠깐만…. 우리 조금만 다시 생각해 보자.”
도현이 밖으로 나가려 하자 휴가 다급히 말려 왔다. 그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동요가 떠올라 있었다.
도현은 그것을 신기하게 응시했다.
항상 여유로운 줄만 알았는데.
“내 룸메이트야. 정말, 그게 최선일까?”
더 생각해 볼 문제도 아니라서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편이 익숙해지는 데 제일 효과적이니까.”
“꼭, 그렇게, 효율적으로 살아야만 할까?”
단어가 강조된 느낌이었다.
도현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아무래도.”
촬영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그리고 촬영 전의 몰입 과정은 도현에겐 익숙한 루틴이었다. 타인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몰라도.
“내가 남의 인권을 걱정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가볍게 이마부터 뺨까지 쓸어내린 휴가 착잡한 눈을 했다. 도현은 할 말 다 했으면 가자는 듯 고갯짓했다.
휴는 미간을 좁히다가 결국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내가 언제부터 남의 시선을 신경 썼다고.”
그는 큰 결심을 한 사람처럼 도현의 옆에 섰다.
알렉산드로 홀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시선은 그리 집중적이지 않았다. 기숙사 내에서 워낙 웃기는 꼴을 하고 돌아다니는 아이들이 많은 탓이었다.
그러나 기숙사를 나와 학교 본관에 들어선 순간, 화살 없는 활 통과 활을 등에 멘 소년은 별종이 되었다.
어느새 여유를 되찾고 껄렁하게 걷던 휴가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혹시 뭐 느껴지지 않아?”
도현이 쳐다보자 그가 씩 웃었다.
“수치심, 부끄러움. 아니면 친절한 룸메이트의 말을 들을 걸 그랬다는 후회라거나?”
“딱히….”
도현은 과거 오랫동안 비주류에 속해 있었다.
이제 와 남들이 별종으로 본다고 해서 신경 쓰일 리가.
뭐야, 쟤. 활 같은데? 활? 관종이야? 작은 목소리들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누구보다 귀가 좋은 도현은 모두 들었음에도 못 들은 척 지나쳤다.
교실에 들어온 도현은 무릎 위에 활 통과 활을 잘 눕혀 놓았다.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이러한 기행에 관심을 보이는 건 학생뿐만이 아니었다.
“그게 뭐죠?”
황당하단 말투에 도현이 단정히 대답했다.
“활입니다, 선생님.”
“네, 활이군요. …아니, 내가 몰라서 물은 게 아니라. 대체 교실에 그건 왜 들고 온 건가요?”
“이게 없으면 불안해서요.”
“네?”
“화살은 없어요. 무기가 될 법한 날카로운 물건은 없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건 다행, 아니. 이게 아니라….”
그는 할 말 많은 눈을 하다가 결국 수업 시간엔 가지고 놀지 말라는 경고를 하고 흐린 눈으로 넘어갔다.
사립 학교라 그런가, 억지로 빼앗아 가려는 선생님은 없었다. 도현의 소유물이 아니라 압수되면 곤란했는데 다행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도현을 이상하게 본 건 아니었다.
“르옌! 활을 받았구나!”
미술 수업 시간에 만난 신시아는 무척 기뻐했다. 그녀는 상기된 낯으로 자신도 단검을 받아 와야겠다고 조잘댔다.
“단검은 어렵지 않을까? 흉기니까.”
“아니야. 소품이라서 날이 안 서 있어.”
“아, 그러게. 깜빡했네. 화살은 진짜 촉이 달려 있어서.”
“정말?”
로즈마리와 테오도르만이 할 말이 많은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곧 도현의 활에 관심을 보였다.
“이게 그 영화에 나오는 활이라고?”
“정확히는 나올 활.”
“나 구경해도 돼?”
의외로 이런 것을 좋아했는지, 테오도르의 눈이 반짝였다. 그는 도현에게 활을 건네받고 연신 탄성을 흘렸다.
마치 스타를 영접한 팬같이 황홀한 낯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도현이 짧게 탄식했다.
맞다, 쟤 를 세 번이나 봤다고 했지.
“퀄리티 좀 봐…. 완전히 미쳤어.”
너드는 내가 아니라 저쪽 같은데.
도현은 속으로 생각하며 긴 속눈썹을 팔랑거렸다. 테오도르가 계속 구경하자 옆에서 로즈마리가 자신도 볼 거라며 불만을 표했다.
“로즈마리, 원한다면 수업 끝나고서 또….”
“어디서 말똥 냄새가 난다 했더니.”
잠깐 끊겼던 도현의 말은 다시 이어졌다.
“또 볼 수 있어. 활은 어디 도망 안 가.”
“활은 어디 도망 안 가-”
조롱 어린 목소리로 따라 말한 레슬리가 혀를 찼다.
“아니, 아니지. 자, 봐.”
“어?”
테오도르의 손에 들려 있던 활이 레슬리의 우악스러운 손에 잡혀 위로 올라갔다. 테오도르는 조금 반항해 보려는 듯했으나, 어느 순간 힘을 풀었다. 그러다 활이 부러질 것 같아서였다.
웁스, 레슬리가 활을 든 제 손을 보며 과장되게 말했다.
“세상에. 도망갔네.”
그 말에 레슬리를 따라온 무리가 웃음을 터트려댔다. 테오도르가 미안한 기색으로 도현의 눈치를 보았다.
“어떡해, 원숭아. 이제 울면서 엄마 원숭이를 찾으러 가야지?”
“엄마 원숭이면, 휴 모건인가?”
경박한 목소리로 낄낄거리는 소년들은 각각 보리스와 딜런으로, 레슬리가 가는 곳에 항상 있는 트리오 같은 존재들이었다.
도현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의자에 앉아 있었고 레슬리는 서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시선이 위쪽을 향했다. 새카만 머리칼이 사륵 흩어지자 무표정한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안 웃겨, 레슬리.”
“오, 아무렴. 우리의 고급스러운 취향을 네가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지!”
후, 짧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흰 얼굴에 떠오른 건 약간의 성가심이 전부였다.
“그거 돌려주면 좋겠는데.”
“가져가고 싶어?”
의도가 다분한 질문에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보란 듯 활을 흔들거린 레슬리가 활을 들지 않은 손으로 도현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그럼 빌어봐, 이 음침한 새끼야. 제발 돌려달라고 말이야. 혹시 알아? 싹싹 빌면서 ‘오, 위대한 레슬리. 내가 다 잘못했어!’라고 말하면 돌려줄지도.”
“…….”
“겁먹어서 얼굴이 썩은 곰팡이처럼 변했잖아!”
“…아,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휴한테 후회할 일은 없을 거라고 그렇게 당당히 말했는데, 이런 상황이 벌어질 줄이야. 도현은 돌아가면 네 말이 일부는 맞았다고 말해주기로 했다.
섬세한 손가락이 옷깃을 틀어쥔 두꺼운 손을 감쌌다. 사람 같지 않은 서늘하고 매끄러운 살갗이, 뱀이 팔을 기는 것 같은 느낌으로 감아와 레슬리가 흠칫할 때였다.
“위대한 레슬리. 내가 다 잘못했어.”
“!”
정말 말할 줄 몰랐던 아이들이 눈을 크게 떴다. 단조롭게 뱉어진 목소리는 상대를 응시하는 시선만큼이나 무감정했다.
경악한 시선 속에서 홀로 태연한 소년이 말했다.
“이제 돌려줄래?”
분명 상대가 굽혔고, 그러니 승리한 걸 텐데도 레슬리는 알 수 없는 패배감을 느꼈다. 그는 부러 더 이죽거렸다.
“꼬리 마는 게 꼭 겁먹은 개새끼 같아. 동양에서 온 음침한 너드 새끼한테 딱 어울려.”
“그렇다 치고.”
본인을 모욕하는 말임에도 도현은 흘려넘겼다.
“약속은 지켜야지, 레슬리? 네가 한 말을 여기 있는 모두가 들었어. 듣기론, 아이덴은 신의 없는 사람을 싫어한다던데.”
근데, 이거 아이덴은 알아? 마지막 말은 레슬리에게만 들릴 만큼 작았다.
뿌득, 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망할….”
거칠게 도현의 멱살을 놓은 레슬리는 도현의 활을 던졌다.
얼굴을 맞히려는 속셈이었던 거 같은데, 그 전에 잡아서 불상사는 없었다.
“장난감 활이나 들고 다니는 게 딱 네 수준이네.”
그러든가 말든가. 활을 돌려받은 도현은 그에게 더 볼 일이 없었다. 깔끔하게 무시당한 레슬리는 씩씩대다가, 이제 수업 시작해야 한다며 귀찮은 낯으로 쫓아내는 선생님에 쿵쿵거리며 교실을 나갔다.
“너 왜 그걸 말해준 거야?”
테오도르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는 조금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었는데, 자신 때문에 활을 빼앗겨 도현이 곤욕을 치렀다고 생각하는 거 같았다.
“몸싸움을 할 수는 없잖아.”
“차라리 그게 낫지. 상대는 레슬리라고. 이제 널 완전히 낮잡아 볼 텐데….”
“그러다 활이 부러지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리고 나는 그렇게 싸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말로 끝낼 수 있다면 그러는 편이 나아.”
그리 말하는 얼굴은 정말로 분함이 한 톨도 담겨 있지 않아서, 테오도르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너는, 자존심 상하지도 않아?”
“왜?”
도현은 도리어 의아해했다.
“비겁한 건 레슬리였잖아. 그가 멋대로 내 활을 가져가서 협박했으니까. 그리고 그건, 그렇게 굴지 않으면 내가 관심을 주지 않을 거란 걸 알아서고. 자존심 상해야 할 건 내가 아니라 레슬리 아니야?”
“…….”
“왜 말이 없어?”
“아니, 너도 제정신은 아니구나 싶어서.”
도현은 싱겁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고선 수업에 집중하는 모습에 테오도르는 착잡한 숨을 내쉬었다. 왜 쟤는 신경도 안 쓰는데 내가 걱정해야 하는 거지. 답 없는 의문은 덤이었다.
맹숭맹숭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한 수업은 잔잔히 흘렀다.
막 수업이 끝났을 때, 선생님은 도현을 불렀다. 도현은 아까 있었던 일 때문인가 추측하며 그녀에게 갔다.
그러나 선생님이 꺼낸 건 다른 이야기였다.
“교장실로 가보렴.”
“교장실이요?”
“그래.”
“무슨 일인지 아세요?”
선생님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말을 전했으니 끝이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가보라는 뜻이었다. 도현이 안 가고 서 있자, 그녀가 눈썹을 찡그렸다.
“왜? 할 말 남았어?”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면, 이 학교의 대부분 선생님이 학생들의 갈등에 끼는 걸 싫어했다. 아마 그 뒤에 있는 배경 때문이겠지.
도현은 알려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한 후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교장실로 향했다.
도현을 반긴 마샤는 그 뒤에 멘 것을 보고 웃었다.
“이게 소문의 주인공이군요.”
도현은 마샤의 용건을 깨달았다.
레슬리가 활을 빼앗고 협박할 때도 미동 없던 표정에 동요가 일었다. 도현은 표정을 다시 가다듬고는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머리를 꽉 채운 의문은 딱 하나였다. 교내 활 반입 금지 규칙이 있었던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