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8화. 명사수, 아니면 배우 (3)
마샤는 도현을 창가 옆 티 테이블로 안내했다. 살짝 열린 창문으로 기분 좋은 바람이 들어왔다. 그녀가 차를 내리는 사이 도현은 창밖을 구경했다.
바로 옆이 온실이라 그런가. 바람이 코끝을 스치자 미약한 풀 내음이 느껴졌다.
“그건 영화 소품인가요?”
찻잔을 내려놓으며 묻는 말에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영화사에서 받았어요.”
“무슨 이유로?”
“배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거 같아서요. 제가 맡은 배역이 뛰어난 궁수라서.”
“연기의 일환이군요. 신기하네요.”
마샤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도현이 물끄러미 찻잔을 내려다보자, 그녀가 물었다.
“홍차 싫어하진 않죠?”
“아뇨, 좋아해요. 감사합니다. 그냥….”
도현은 의아한 시선을 느끼며 천천히 말했다.
“그냥, 혹시 교내 활 반입 금지 규칙이 있었는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오, 그거라면 있어요.”
“네?”
진짜 있다고?
놀란 눈이 보이지 않는지, 그녀는 태연히 홍차를 마셨다. 도현도 우리 학교가 유서 깊은 명문인 건 알고 있죠?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얼을 빼놓기 충분했다.
“골든 이글이 왜 골든 이글이란 이름이 붙었는지 아나요?”
“그냥 상징물로만….”
“그것도 맞죠. 그런데 옛날엔 저 호숫가 근처에서 새 사냥을 많이 했어요. 골든 이글은 사냥을 위해 모인 신사들의 사교 모임이었고.”
“…….”
“아, 물론 검독수리를 사냥했다는 건 아니에요. 사냥감은 보다 흔한 새였죠. 그러다 이곳에 서식하는 새의 개체 수가 줄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모임은 사냥 위주에서 사교 위주로 흘러갔고, 거기서 이어진 게 지금의 골든 이글이에요.”
장난인가 했는데 마샤의 얼굴은 잔잔했다. 도현은 얼굴이 난감함으로 물들었다.
“그러니까, 반입 금지 규칙이 있다고요?”
“네. 활은 물론 사냥에 쓰이는 모든 도구는 건물 안으로 반입할 수 없어요. 사고가 일어난 후 안전을 위해 마련된 규정이라고 해요.”
도현은 말문이 막혔다.
만약 마샤가 다른 이유를 가져온다면 설득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규칙이라니?
“그럼….”
“도현은 규정을 위반한 거죠.”
가볍게 흘러나온 말의 내용은 그다지 가볍지 않았다.
짧은 숨을 내쉰 도현이 물었다.
“징계를 위해 부르신 건가요?”
두 눈에 반쯤 체념이 어렸다.
다른 거라면 어떻게 해볼 텐데, 규칙인 이상 노릴 틈이 없었다. 그 규칙이 반윤리적이거나 비논리적인 것도 아니고. 그가 판단하기에도 지금 제일 이상한 사람은 자신이었다.
“이런, 제 말이 오해를 샀나 보군요.”
깜빡. 검은 눈이 무슨 뜻이냐는 듯 상대를 보았다. 그에 마샤는 달래듯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궁금해하길래 그런 규정도 있다는 걸 알려준 것뿐이에요. 지금 와서 들먹이기엔 너무 오래된 규정이죠.”
“…….”
“학교의 역사 같은 거라, 아는 사람도 거의 없을걸요? 저는 이 학교에 부임한 교장이니까 알고 있는 거지.”
“그 말씀은….”
“눈감아 줄게요. 지금처럼 화살 없이 활과 활 통만 들고 다니는 거라면.”
고마운 일이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해서 마샤가 얻을 이득은 없었다. 검은 눈동자에 의문과 경계심이 떠올랐다.
마샤는 그런 도현을 살살 구슬리듯 말을 꺼냈다.
“승마 클럽에 들어갔다고 했죠?”
“네.”
“승마장은 마을 외곽 숲과 가까운 곳에 있어서 공간이 넓어요. 가 봤으니까 알 테지만.”
그녀의 말대로였다.
승마장은 심지어 수준에 따라 공간이 분리되어 여러 개의 트랙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개중엔 너무 멀어서 잘 쓰이지 않는 곳도 있었다.
“그중에서 한적한 곳도 많죠. 학생들이 자주 들리지 않는, 조용한.”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는 건지 모르겠어요.”
“원한다면, 그곳에 양궁장을 만들어도 돼요. 다만, 다른 학생들도 원한다면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조건으로.”
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발언에 도현의 눈이 커졌다.
“건물 안에 화살을 반입하는 건 안전상 문제로 불가하지만, 양궁장에서라면 허락할게요. 도현이 위험한 행동을 할 것 같진 않으니까.”
“왜 그렇게까지 해 주시는 거예요?”
“호의라고 생각하진 않나요?”
“너무 과분해요.”
그녀는 도현을 그녀의 학생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도현은 중간에 난입한 불청객에 가까웠다. 학생들의 반응도 그러했고.
이렇게까지 호의를 보이다 못해 퍼서 와르르 쏟아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유라. 짧게 말한 마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양궁은 도현이 오기 전에도 새로운 방과 후 활동으로 추가할까 고민하고 있었어요. 학교의 옛 전통을 잇기도 적절하잖아요? 안전상 문제랑 동물 보호 문제로 예전처럼 호숫가를 사냥터로 내어줄 수는 없지만요.”
거짓말 같진 않았다.
다만 호의의 이유론 불충분해 보였다.
말없이 쳐다보자 마샤가 한숨과 함께 찻잔을 내려놓았다.
“사실 부탁할 게 생길 거 같아서 그래요.”
“부탁이요?”
“지금 말하는 건 별로 재미없으니 이 얘기는 나중에 다시 하는 거로 하죠.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거예요. 도현에게 나쁜 일도 아닐 테고요.”
마샤가 입가를 가렸다. 손등 너머의 입꼬리는 애매한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물론 조금, 도현이 곤란해질 수는 있겠지만.”
학교의 교장 선생님이 내게 부탁씩이나 할 일이 뭐가 있을까. 머리를 열심히 굴려봐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결국 직구로 물었다.
“물어보면 알려주실 건가요?”
“아니요. 말했잖아요. 지금 말하는 건 별로 재미가 없다고.”
도현의 표정이 떨떠름해졌다.
보상이니 뭐니 하던 토드 감독도 그렇고, 지금 말하면 재미없으니 나중에 말하겠다는 마샤 교장 선생님도 그렇고….
‘어른이 되면 다 저렇게 실없어지는 건가?’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군요? 재밌네요. 제가 아주 유치하고 괴팍한 어른이 된 기분이에요.”
“죄송합니다.”
“아뇨, 사과할 것까지야.”
작게 웃은 마샤가 티 테이블 가운데 놓인 과자 바구니를 도현 쪽으로 밀어주었다. 초코칩이 콕콕 박힌 쿠키가 도현을 반겼다.
“그래서, 도현은 어떻게 하고 싶어요?”
그녀는 여전히 처음 만난 날 그대로 우아하고 기품 있었다. 도현은 한숨을 삼키며 쿠키 한 개를 집었다.
작은 가루가 부스스 떨어졌다.
“구체적인 장소는, 생각해 두신 곳이 있는 거죠?”
* * *
평범한 교실. 한 곳에 옹기종기 모인 아이들이 무언가를 열심히 쳐다보았다.
“…받았다!”
누군가의 외침에 아이들의 눈이 반짝 빛났다.
영상 통화인 건 몰랐는지 화면에 손가락으로 추정되는 게 이리저리 움직였다. 이윽고 이상함을 깨달은 상대가 카메라를 가린 손을 치웠다.
- 영상 통화였어?
짧은 웃음소리와 휘어진 입가.
어딜 이동하는 중인 건지 너머로 푸른 나무가 스쳐 지나갔다. 막 오후에 접어든 그들과 다르게 소년의 뒤편에 자리한 하늘은 어둑해 보였다.
“거기 몇 시야?”
- 여기? 여덟 시 정도 됐나.
보여 주겠다는 듯 소년이 카메라를 돌려 하늘을 비춰주었다. 핸드폰을 두고 옹기종기 모인 아이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들이 본 건 하늘이 아니라 그 아래 자리한 건물과 넓은 부지였다.
이유찬이 의아하게 물었다.
“어디에 간 거야?”
- 응? 학교인데?
학교라고?
- 아아, 좀 넓지. 외곽에 있어서 그런가, 대학 캠퍼스 크기더라고. 여기 극장이랑 천문대도 있다?
학교에 천문대는 왜 있는 건데.
그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 뒤편에 있는 호수가 정말 예쁜데…. 지금은 갈 곳이 있어서 보여줄 수가 없네. 너희는 점심시간이야? 밥은 먹었어?
“누가 보면 엄만 줄.”
- 좀 그런가?
도현이 키득거렸다.
화면은 어느새 다시 그의 얼굴을 비춘 채였다. 아이들의 눈에 그가 걸친 편안한 복장이 들어왔다. 학교에선 늘 단정히 단추를 잠그고 넥타이를 매고 있던 소년이라서 왜인지 낯설었다.
“잘 지내나 보다, 너.”
괜히 친구를 빼앗긴 기분이 든 이유찬이 불만스레 말했다. 도현은 웃기만 했다. 얄미웠다.
- 그나저나 희운이는?
“넌 형님이 전화 걸었는데 찾는 게 흰둥이밖에 없어?”
- 아니, 그냥 안 보여서….
이유찬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또한 도현의 이상한 편애는 익히 알고 있었다. 사실 정희운은 어딘가 물가에 내놓은 애 같은 면이 있어서 그도 아끼는 편이었고.
“옆에 있어. 자, 바꿔준다, 내가.”
“어? 난 괜찮은데…!”
희운이 손사래를 쳤지만, 이미 핸드폰은 그에게 넘어온 후였다. 결국 침을 꼴깍 삼킨 희운이 화면을 조심스레 응시했다.
“아, 안녕.”
바보 같은 인사를 내뱉은 희운이 혀를 살짝 깨물었다. 나 왜 이렇게 모자라지?
- 안녕.
부드러운 인사말이 돌아왔다.
그리고 폭탄이 떨어졌다.
- 선물은 잘 받았어?
“선물? 너 뭐 받았어?”
옆에서 친구들이 허리를 콕콕 찔러 대는데도 하지 말라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희운이 얼어붙어 눈만 끔뻑거리자 도현이 단정했다.
- 받았나 보네.
“…응.”
다행이다. 덤덤히 내뱉는 말에 희운이 조급히 입을 열었다.
“그게 끝이야?”
- 아직 촬영을 시작하지 않아서 돌아가려면 조금 더 걸릴 거야.
그게 지금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희운이 눈가를 찡그리려던 찰나 도현이 말했다.
- 그러니까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 너도, 나도 조금, 생각을 좀 하고 난 후에.
여기서 생각을 얼마나 더 하라는 거야.
그런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희운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필요한 게 자신이 아니라 도현처럼 보여서였다.
“둘이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너무 둘만 아는 이야기를 했던 건지, 아이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희운을 보았다. 희운은 진땀이 흐르는 기분을 느꼈다. 아니, 얜 왜 지금 이런 말을 꺼내서….
…맞다, 내가 연락을 무시했지.
미국으로 떠나고 얼마 안 있어 도현에게서 잘 지내냐는 연락이 왔다. 희운은 음반을 확인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라 그것을 모른척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내 원망할 구석조차 사라진 희운이 어색한 미소를 걸었다.
“아니, 그냥 별거 아니야. 그, 그나저나 넌 어디 가는 중이었어?”
부자연스러운 화제 전환에 이유찬의 눈이 가늘어졌다. 희운은 땀을 뻘뻘 흘리며 모른 척을 했다. 다행히도 아이들은 금방 새로운 화제에 관심을 보였다.
- 나 승마장.
“승마장?”
예상치 못한 대답에 주위가 술렁였다. 그때, 아까부터 옆에 딱 달라붙어 화면을 뚫어져라 보던 최민지가 흥분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도현아, 너 승마도 할 줄 알아?”
아, 민지구나. 상대를 알아챈 도현이 고개를 저었다.
- 배우는 중이야. 아직 말 등에 타지도 못했어. 말고삐 잡고 트랙만 빙빙 돌고 있거든.
“그, 그래도 멋있다. 승마라니….”
- 그런가?
그녀는 진심이었는데, 도현은 가볍게 흘려 넘겼다. 자연히 며칠째 안읽씹 상태의 카톡이 떠올랐다. 입술을 살짝 깨문 소녀가 무릎 위에 올린 손을 말아쥐었다.
최민지도 알았다.
도현은 누구에나 친절하고 또 누구에게나 무관심하다. 은근히 사람을 가리는 그 아이의 예외에 속하는 존재는 극히 소수였다.
최민지는 한설아 덕에 도현과 한 무리에 속했지만, 그 예외에 들지 못했다. 어쩌면 한설아와 달리 자꾸만 기대를 품는 자신의 속내를 꿰뚫어 본 걸지도 몰랐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데. 떨어져 있는 기간 동안 헛된 마음을 정리하려 노력했지만, 의지를 벗어난 실망감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때, 카랑한 목소리가 정신을 일깨웠다.
- 왜 이렇게 늦게 와!
여자 목소리?
- 친구들이랑 통화하느라…. 기다렸어?
- 아니? 스위티랑 노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는데?
도현은 낯선 목소리와 영어로 무어라 떠들었다. 영어 듣기 평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빠른 속도에 대부분 문장이 귀를 튕겨 나갔다.
한동안 무어라 말하던 도현이 화면을 보고 눈꼬리를 살짝 늘어트렸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누가 저렇게 잘생기래. 최민지의 눈에 원망이 어렸다.
- 미안, 애들아. 나 선약이 있어서 이만 끊어야 할 거 같아.
- 빨리!
- 알았다니까. 아무튼, 통화 즐거웠어. 나중에 다시 연락하자.
곧 화면은 까맣게 물들었다.
그게 꼭, 그녀의 심정 같았다.
‘여자친구인 걸까?’
상상이 되질 않았다. 듣기론 도현이 짝사랑하는 상대가 금발이라던데. 저 목소리의 주인도 금발이었을까? 부질없는 상상이 뻗어져 나가다가 힘없이 흩어졌다.
“와, 나 좀 서운함.”
그나마 다행인 건, 묘한 패배감과 친구를 빼앗긴 거 같은 억울함을 느끼는 아이들이 최민지와 비슷한 표정이란 사실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