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569화 (570/582)

제569화. 명사수, 아니면 배우 (4)

다각, 다각.

말굽이 흙바닥과 마찰하는 소리가 일정하게 울렸다. 도현은 이끄는 대로 얌전히 따라오는 레이나를 기특하게 보았다. 그러다 조금 어색하게 옆을 돌아봤다.

활활 타오르는 눈동자와 딱 마주쳤다.

“…….”

수많은 카메라에 단련된 도현에게도 부담스러운 눈빛이었다.

“그렇게 하면 뭐가 좀 보여?”

“아니. 지금까지 수집한 정보는 레이나가 예쁜 얼굴을 좋아한다는 것뿐이야.”

무도하게 뻗어진 손이 도현의 턱을 쥐고 휙휙 돌렸다. 얼떨결에 제 왼뺨, 오른뺨을 보여주게 된 도현이 당혹스럽게 눈을 깜빡였다.

“저, 에린. 내 얼굴을 꼭 그렇게 잡아야 할까?”

“이게 말이 좋아하는 상인가?”

“에린?”

“가만히 있어!”

박력 있는 외침에 도현은 완전히 얼이 빠졌다. 한 손으로 턱을 쥐어 잡고 열렬하게 쳐다보는 게, 꼭 로맨스 드라마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같았다.

그럼 난 여자 주인공인가?

어이없는 생각에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생김새 문제가 아니라, 체질이라고 했잖아.”

“그럴 순 없어. 얼굴은 고치면 되지만 체질은 다시 태어나야 하잖아. 그건 안 돼. 인정할 수 없단 말이야!”

에린은 장난감 코너 앞에서 떼쓰는 아이 같았다. 말과 이성이 통하지 않을 거 같단 소리였다.

그래, 보려면 봐라.

도현은 몸에 힘을 빼고 체념한 채 눈을 내리깔았다.

다른 사람이 이러면 불쾌했을 텐데, 에린은 속내가 투명하고 나쁜 의도가 없어서 그런가, 약간의 불편함을 제외하면 거북함은 그리 크지 않았다.

“조금 더 다양한 자료가 필요해.”

“…….”

“레이나랑 교감은 충분히, 으득, 충분히 쌓았으니.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가자.”

방금 이를 간 거 같았는데….

“안전 수칙은 외웠지?”

“응.”

“말해봐.”

“말 뒤로 지나가지 말고 앞에서 움직일 것, 말 주변에서 고개를 숙이지 말 것, 말을 타기 전엔 말의 성격과 특성을 먼저 파악할 것, 낙마하더라도 고삐를 놓치지 말 것, 돌발 상황이 일어나도 큰 소리를 내지 말 것, 불안해하지 말 것….”

도현의 입에서 에린이 말했던 주의 사항이 줄줄이 흘러나왔다.

에린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었다.

혹시 똑똑해서 좋아하는 건가? 말은 굉장히 영리한 동물이니까 사람의 지능을 알아보는 걸 수도….

그녀가 이런저런 가설을 세우는 사이 말을 끝낸 도현이 입을 다물었다.

“좋아. 안장과 고삐 채우는 방법도 다 외웠지?”

“응.”

“직접 해봐.”

에린은 아주 깐깐한 선생님이었다.

그녀는 약간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는데, 그건 기수의 안전 때문이 아니라 말의 안전 때문이었다. 에린은 기수가 어리숙하면 말이 힘들어한다며 경고했다.

도현이 안장을 올리고 고삐까지 채우자, 에린이 승마장 옆의 작은 창고에 구비된 헬멧과 장갑, 안전 조끼를 가져왔다. 부츠도 가져왔는데 공용이라 그런지 약간 불편했다.

“불편해도 네 거 도착하기 전까진 참아.”

도현은 에린이 추천한 승마용품 브랜드에 주문 제작을 맡겼다. 수제작이다 보니 시간이 조금 걸려서, 받으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도현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던 에린이 툭 말했다.

“다음부터는 승마복 입고 와.”

“그럴게.”

오늘도 말고삐를 쥐고 트랙을 돌 줄 알았던 도현은 평범한 체육복을 입은 채였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도현에게 기다리라는 말을 한 에린은 마사에 가서 제우스를 데리고 나왔다.

제우스는 덩치가 크고 순한 말이었다. 밖으로 나온 게 좋은지 조금 흥분해서 콧김을 뿜던 제우스는 도현을 보고 당연하다는 듯이 다가와 옆에 섰다.

“또! 또 뺏어가지…!”

질투에 얼룩진 눈이 뜨겁게 타올랐다. 이럴 땐 그냥 입 다물고 조용히 있는 게 나았다. 도현이 살살 눈치를 보고 있자, 씩씩거리던 에린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간신히 진정한 소녀가 말의 몸을 부드럽게 쓸었다.

“제우스, 넌 오늘 내가 탈 거야. 잘 부탁해.”

몇 번 더 제우스를 쓰다듬던 에린이 도현을 보았다. 아까보다 평온해진 낯이었다.

“먼저 올라타는 법을 보여줄게. 잘못 타면 말이 놀라니까, 눈 크게 뜨고 잘 봐.”

도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왼발을 등자쇠에 올린 에린이 휙 하니 몸을 날렸다. 새처럼 가볍게 뛰어오른 몸이 가볍게 안장 위로 안착했다.

일련의 움직임이 왈츠처럼 유려했다. 허리를 반듯이 세운 에린이 아래로 시선을 던졌다.

“할 수 있겠어?”

“해볼게.”

“…자신감 때문인가?”

“…….”

홀로 무어라 중얼거리던 에린이 말 등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리고 도현에게 턱짓했다.

도현은 에린이 알려준 것을 머리로 복기하며 왼손으로 말고삐와 목털을 잡았다.

‘오른손으로는 안장 뒤쪽을.’

가르쳐 준 대로 차근차근히 움직인 도현이 등자쇠에 발을 올렸다. 이제 무게 중심을 오른쪽 발로 바꾸며 스프링처럼 뛰어오르면 되었다.

해보자.

가볍게 심호흡한 도현이 몸을 날렸다.

“잘하네.”

한 번에 성공이었다.

이전에 제주도에서 체험했을 땐 말도 작았고, 또 강사가 하나하나 도와주었다. 스스로 해내니 짜릿한 성취감이 온몸에 퍼졌다.

그때, 날카로운 지적이 파고들었다.

“내가 올라타면 뭐 하라고 했어?”

“아.”

도현은 뒤늦게 고삐 끈의 길이를 확인했다. 그제야 에린의 얼굴이 누그러졌다.

반쯤 정신을 빼놓고 사는 것 같은 소녀는 승마와 관련된 것에선 누구보다 날카롭고 엄격해졌다.

도현은 이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기초의 기초부터 차근차근히 배워나갈 수 있었으니까.

“레이나는 첫 기승으로 그리 좋은 말은 아니야. 몸집도 크고, 보폭도 넓고, 힘이 세서 반동도 큰 편이거든.”

“그럼 왜…?”

얼떨떨하게 묻자 에린의 눈이 뾰족해졌다.

“레이나가 널 이렇게 좋아하는데 다른 말한테 첫 기승을 넘기겠다고?”

“…실언했어.”

“흥.”

코웃음을 친 에린이 탐탁지 않은 표정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런 것보다 중요한 게 말과의 호흡이야. 다른 사람한테는 레이나가 첫 기승 말로 적당하지 않을지 몰라도, 너에게만큼은 제일 좋은 말이야.”

도현은 새삼스럽게 저를 태운 말을 보았다.

신기했다.

레이나와 잘 맞는다는 사실이 신기한 게 아니라, 레이나의 영혼이 도현과 제일 잘 어우러진다는 걸 알아챈 에린이.

도현이야, 자신과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영혼을 눈으로 볼 수 있다지만, 에린은 아닐 테니까.

‘그만큼 관심을 기울인다는 소리인가.’

에린이 레이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얼추 알 것도 같았다.

“무섭진 않지?”

“응.”

“오늘은 평보만 해볼 거야. 출발해봐.”

쯧쯧, 도현은 배운 대로 혀를 찼다. 그러자 짧게 푸릉 소리를 낸 레이나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안 움직이면 왼발로 몸체를 쳐야 했는데, 그럴 필요도 없었다.

도현이 감탄했다.

“정말 순하네.”

“레이나는 순한 말이 아니야.”

“뭐?”

천천히 걷는 레이나의 옆에서 속도를 맞춰 걷던 에린이 조용조용히 말했다.

“원래 레이나는 내가 아니면 말을 잘 듣지 않아. 누굴 태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잘 움직이지도 않고.”

“레이나가?”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 위에 있었으면 겨우 음성 신호로 움직였을 거 같아? 채찍 정도는 휘둘러야 한 발짝 옮겼을걸.”

쉬이 믿기진 않았다.

“이렇게 착한데….”

“그래서 레이나는 다른 곳에 보내질 뻔했어.”

“다른 곳에?”

“여긴 학교고, 학생들이 타는 말이니까. 레이나같이 다루기 힘든 말은 곤란했던 거지.”

“아….”

“그렇게 팔린 말은 대우가 별로 좋지 않아. 적응 못 하고 다른 곳에 보내질수록 말의 가치는 점점 더 떨어져. 그 과정에서 말은 고통받고….”

“사는 곳이 계속 바뀌니까?”

“그것도 맞지만, 이 애들도 알거든. 자기가 버려졌다는 걸.”

에린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불쾌감이 가득 담긴 얼굴은 오히려 그 애정의 깊이를 느끼도록 했다.

“큼, 그래서 약간, 아주 약간은 다행이라고 생각해. 레이나가 마음을 연 사람이 더 생겨서. …뭐야, 너. 왜 웃어?”

“아니, 말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싶어서.”

“당연한 거 아니야? 세상의 모든 말은 사랑받아 마땅해.”

에린의 얼굴은 신념으로 빛이 났다. 도현은 에린이 마음에 든 이유를 자연스레 깨달았다. 저렇게 바로 선 신념과 애정을 가졌으니, 호감이 안 가는 게 더 이상하지.

트랙을 네 바퀴 돈 도현은 자연스럽게 고삐를 당겼다. 레이나는 속도를 점점 줄이다가 완전히 멈춰 섰다.

에린이 한 것처럼 말 위에서 내리니 레이나가 도현의 어깨에 얼굴을 치댔다. 그에 질 새라 제우스도 다가와 등에 대고 제 얼굴을 비볐다.

“부, 부러워….”

질투심을 참지 못한 에린이 소매를 물어뜯을 때였다. 문득 고개를 든 레이나가 에린의 어깨를 주둥이로 툭 쳤다. 금방 도현에게 돌아왔지만, 그것만으로 에린은 크게 감격했다.

“레이나…!”

울먹거리는 목소리에 도현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튼, 모두가 만족한 시간이었다.

레이나와 제우스를 마사에 두고 나오니 하늘이 껌껌해져 있었다. 도현은 기숙사로 가지 않고 승마장 외곽으로 향했다.

인적이 드문 곳으로 들어가니 멀리서 희끄무레한 것이 보였다. 더 가까이 가자 점점 형체가 선명하게 보였다. 네모난 과녁이었다.

과녁 다섯 개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놓여 있었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멈춰 선 도현은 등 뒤로 손을 뻗었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손엔 활과 화살이 들려 있었다.

도현은 잠시 고개를 들고 하늘을 응시했다. 이 학교에 오고 나서 한국과 제일 다르다고 느꼈던 게 바로 저 하늘이었다. 별이 총총하게 박힌 하늘은 화가가 정성 들여 그린 푸른 바다 위에 요정 가루를 뿌려놓은 것만 같았다.

“후우.”

신선한 공기를 잔뜩 들이마신 도현이 과녁을 응시했다. 어슴푸레한 하늘 아래서 검은 눈이 초승달의 파편처럼 예리하게 반짝였다. 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지고.

핑-!

손끝에서 날아간 화살이 푸른 공기를 갈랐다. 선선하게 부는 바람이 기분 좋게 뺨을 훑고 지나감과 동시에 과녁에 빨려 들어가듯 날아간 화살이 중앙을 꿰뚫었다.

붓으로 그린 것처럼 섬세한 눈이 느릿하게 닫혔다가, 천천히 뜨였다. 뺨을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은 밤하늘에 걸린 달처럼 창백한 은색이었다.

하나로 느슨하게 묶은 머리카락이 무성한 나뭇잎이 물결치는 방향을 따라 흔들렸다. 어깨에 고정한 녹회색 로브도 자연스럽게 바람결에 휘날렸다.

쏴아, 나뭇잎이 서로를 스치며 드러난 공간으로 햇빛이 침투했다. 조각난 유리처럼 반짝거리는 빛의 파편이 미약한 짜증이 어린 낯 위로 드리웠다. 화면 한가득 비춘 소년은 풍경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또 너니.”

차가운 물음에 아서가 호기롭게 외쳤다.

“대련해! 이번엔 진짜 안 질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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