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0화. 명사수, 아니면 배우 (5)
신성한 나무에 들어오고 나서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적어도 길잡이 후보들이 이 공간에 적응하고 이것을 새로운 일상으로 받아들일 정도만큼은.
르옌이 아서를 인식한 건, 신성한 나무에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시점이었다. 정령은 그 반투명한 몸체만큼 허망한 소리를 내뱉길 즐겼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 멍청하고 어리석으니까. 그러니까 그들을 억압하고 통제할 수단이 필요한 겁니다. 열등한 종족을 지배할 위대한 존재, 그게 길잡이입니다.
정령은 ‘길잡이 존재 의의’ 따위를 물어보았고, 호르헤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에 반발한 타 종족 후보들이 저마다의 가치관과 정의를 지껄이며 자신이 옳다는 걸 증명받길 원했다.
모든 게 불필요했다. 서늘한 낯에 권태로움이 떠오를 때였다.
- 르옌, 너는? 네 생각은 어때?
호르헤가 던진 한마디에 모든 이목이 그에게 쏠렸다. 본디 대답할 의무가 없었지만, 정령도 그를 응시하고 있었기에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동물 또한 마찬가지다.
그 미물들은 자연스레 서열을 나누고, 무엇을 제 머리 위에 두고 무엇을 제 발밑에 뭉갤지 정한다. 머리 위에 둔 존재는 숭배하고 복종하며 짓밟은 자는 약탈한다.
강하면 복종하고, 약하면 물어뜯는다. 그 정점에 선 자가 길잡이일 뿐이었다.
거기에 생각은 필요치 않….
- 아무것도 모르잖아?
르옌은 감히 제 말에 끼어든 이를 보았다.
- 넌 가장 앞에 선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전혀 모르고 있어. 그렇지? 뒤에 선 사람이 무슨 기분인지도. 깜깜하고 막다른 길에 섰을 때 어떤 심정인지도. 그들이 무슨 마음으로 길잡이를 바라는 건지도 전혀 모르는 거야.
파란 불씨가 타오르는 눈이었다.
건방지고, 호기로운.
- 그걸 모르면 아무도 널 믿지 않을 거야.
믿음. 불쾌한 단어였다.
정령이 내뱉은 실체 없는 말들처럼.
- 믿을 수 없는 길잡이는 길잡이가 아니야.
성가시다.
르옌이 건방진 소년에게 느낀 건 그 정도의 감상이었다.
그 성가신 존재가 사사건건 끼어들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르옌은 드물게도 제가 과거에 했던 선택이 조금 틀렸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손을 써두면, 덜 귀찮아졌을 것을.
- 전투술은 안 져!
- …이번엔 정말 안 져!
- 거, 검술은 내가 이겨!
- 이번엔 팀전이니까 분명히 우리 팀이 승리할….
약하고 비천한 종족이면서도 소년은 지독하게 끈질겼다.
르옌은 피떡이 되어 드러누운 아서를 내려다보았다. 불어 터진 얼굴을 하고선 눈빛만큼은 형형했다. 저렇게 겁 없이 구는 이유는 역시 멍청해서일까.
르옌은 바닥에 널브러진 형체를 보았다. 고통으로부터 배어 나온 희미한 신음이 들려왔다. 그 소리를 배경으로, 르옌은 드물게 충고했다.
- 바깥이었으면 이렇게 살려두지 않았을 거다.
- …나도 후보 시험 중이라서 봐주는 거야.
한동안 찾아오지 못하도록 어깨를 으깼다. 아무리 튼튼한 길잡이 후보더라도 고통스러울 터다. 실제로 식은땀에 전 몰골을 하고선 눈과 입은 살아 있었다.
그래. 그게 유일하게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수없이 비참한 패배를 겪어도 꺾이지 않고 더 독하게 타오르는 푸른 불씨가.
- 다음번엔 이길 거야.
선전 포고인지, 다짐인지 모를 말.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말을 툭 뱉고 그대로 기절해 버린 소년에 르옌은 헛웃음을 흘렸다.
꼭 지금처럼 말이다.
콰득, 르옌은 과녁 정중앙에 박힌 화살을 빼냈다. 과녁판을 넘어서 과녁을 고정해 둔 나무까지 꿰뚫은 화살이 그의 손에 힘없이 딸려 왔다.
과녁과 나무는 화살촉의 모양대로 깊이 파여 있었다.
“이제 주제 파악을 할 때도 됐을 텐데.”
“말했잖아. 이길 거라고.”
르옌은 아서를 보았다.
정말 지긋지긋하고, 흥미로운 상대를.
“컷!”
그리고 그 말이 들린 순간 숨을 토해냈다.
* * *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새로운 클럽에 들고, 교장 선생님과 이상한 거래를 하면서도 도현은 가장 중요한 것을 잊은 적이 없었다.
- 촬영 시작일 확정됐어.
어느 날, 그에게 전화를 건 오스카는 차분히 통보했다.
- 아마 곧 기사도 나갈 거야. 관심도 몰릴 테고. 그래도 네가 신경 쓸 건 촬영밖에 없어.
기다렸던 촬영이다.
조금씩, 때가 되어감을 느꼈으면서 정말로 닥치니 새삼스레 심장이 뛰었다.
- 가끔 며칠 통째로 빠질 때도 있을 건데, 기본적으로 학교에서 촬영장으로 계속 왔다 갔다 하면서 찍을 거야. 내가 데리러 갈 거니까 이건 걱정할 필요 없어.
“네.”
- 학업도 중요한데, 지금 제일 중요한 건 영화니까 만약 너무 피곤하고 힘들면 말하고. 그럼 최대한 수업을 안 들을 수 있는 방향으로 도와줄게.
“그럴게요.”
- 그리고 토드 감독이 묻더라. 너 정말로 활 쏘는 장면에서 스턴트맨이 필요 없는지.
“괜찮다고 전해주세요.”
- 그렇게 전하긴 할 텐데, 그래도 아마 현장에서 네 대역 배우가 대기하긴 할 거야. 활 쏘는 장면 말고도 액션을 소화해야 하는 장면이 더 있으니까.
“그것도 제가 할 순 없을까요?”
- 글쎄….
오스카의 목소리는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았다.
- 위험하지 않은 장면은 괜찮은데…. 부상 위험이 있는 장면은, 흠, 그쪽에서 거절할 거 같다, 도현아.
“오스카도 그렇고요?”
- 난 네 안전이 제일 중요하니까.
“알았어요. 너무 욕심부리진 않을게요.”
- 안 하겠단 소리는 죽어도 안 하네.
“그런 편이죠.”
천연덕스레 내놓은 대답에 오스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조금 더 앞으로의 일정에 관해서 이야길 나누다가 전화를 끊었다.
도현은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참 핸드폰을 쳐다보았다. 누군가에게 연락이 오길 기다리는 건 아니었다. 그저, 바로 움직이기엔 심장이 너무 빨리 뛰었다.
도현은 이 흥분을 누군가와 함께 나누고 싶었다.
‘헤레이즈도 알렉산드로 홀이었지.’
그렇게 행선지가 정해졌다.
같은 기숙사를 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동안 헤레이즈의 방을 찾아간 적은 없었다. 찾아갈 일이 없었단 게 더 정확했다.
“누구….”
그래서 헤레이즈는 문 앞에 서 있는 인형에 크게 당황했다. 청회색 눈동자 한가득 떠오른 놀람에 도현은 작게 웃었다.
“…무슨 일이야?”
“촬영 일정. 너도 들었나 해서.”
“아…. 들었어. 조금 전에.”
“나도.”
간결한 대답에 동그랗게 떠졌던 눈이 제 크기를 되찾았다. 진정한 헤레이즈는 차분히 물었다.
“그것 때문에 온 거야? 모르면 알려주려고?”
“반쯤 맞았어.”
“나머지 반은?”
도현이 손을 들어 올려 살짝 흔들자, 그 손에 들린 책도 따라서 흔들렸다. 헤레이즈는 책에 적힌 제목을 읽었다.
“패스파인더?”
“연습하자.”
“…지금?”
“응. 지금.”
“지금 온실에 가기엔 통금 시간이….”
“아니, 여기서.”
헤레이즈는 잠깐 침묵했다.
“혹시 그 ‘여기’가 내 방이냐?”
“그럼 어디겠어. 나 들어가도 돼?”
“미친, 잠깐.”
헤레이즈가 문고리를 다급히 쥐었다. 힘으로 문을 열고 들어갈 생각은 없었던 도현은 뭐냐는 듯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아니, 이 시간에 연습하자고? 굳이 내 방에서?”
“내 방엔 휴가 있어서. 음, 휴라면 허락해 줄 거 같긴 한데…. 근데 헤레이즈, 네가 휴를 불편해하잖아.”
헤레이즈는 이제 명실상부한 골든 이글이었다. 시몬이나 레슬리와 같은 클럽에 있는 이상, 휴 모건이라는 존재를 가까이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 첫날을 제외하고 헤레이즈가 점심시간에 도현을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그들의 만남은 늘 온실이나, 야외에서 이루어졌다.
“왜 대화가 안 통하지….”
그는 마른세수를 하다가 도현을 보았다.
“왜 지금 하자는 건데? 꼭 지금이어야 해? 내일 신시아랑 같이 보면 되잖아.”
“촬영 소식을 들었어.”
“그건 나도 알아.”
그 대답에 도현이 미간을 좁혔다.
“헤레이즈, 나 지금 이해가 잘 안돼.”
“대체 뭔….”
“촬영일이 잡혔고, 너랑 내가 가까운 곳에 있어. 당장 연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하? 헛숨을 내쉰 헤레이즈의 눈에 도현의 얼굴이 담겼다. 순수한 의문과 의아함이 담긴 얼굴. 그에 헤레이즈는 지금 상황을 완벽하게 깨달았다.
그러니까 지금, 막 생일 선물을 받은 어린애가 신나서 포장지 뜯는 것처럼, 촬영일을 전해 듣고 흥분해서 달려왔다고?
“미친놈.”
“상처야, 헤레이즈.”
전혀 상처받지 않는 낯을 한 소년은 물러날 기색이 없어 보였다. 고집스럽게 빛나는 검은 눈동자를 본 순간, 헤레이즈는 이 싸움의 패자가 누구일지 알 수 있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흘리면 발로 차서 쫓아낼 거야.”
“아, 그럼 주방에서 머리망 빌려 올까?”
“그걸 지금 어떻게 빌려 와?”
“창고 문을 따면….”
“진짜 미친놈.”
헤레이즈는 생각했다.
그때 정말 미친놈 같아서 쫓아낼까 말까 수없이 고민했는데, 결국 안 쫓아낸 게 잘한 선택 같다고.
그날 이후로 도현은 틈만 나면 헤레이즈의 방에 쳐들어왔다.
어느 날 비아냥거리며 ‘그냥 문패 빈자리에 네 이름 쓰지 그래?’라고 하자 진짜로 자신의 이름을 써넣으려고 해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덕분에 헤레이즈는 도현이 연기와 관련된 일이면 눈이 돌아 버린다는 걸 절절히 깨달았다.
그때는 정말 미칠 거 같았는데….
“양궁 배운 지 얼마나 됐다고?”
“일 년 조금 넘었어요.”
“그 정도로 이게 된다고?”
도현의 주위에 몰린 사람들이 저마다 떠들어 댔다. 그들의 화제는 곧 양궁에서 연기로, 그러다가 헤레이즈로 옮겨졌다.
“아서도 정말 대단해. 거기서 전혀 안 밀리더라.”
그래, 다행이었다.
너무 오랜만이라 기억이 조금쯤은 희석되어 버렸다. 온실에서, 그리고 제 방에서 보여준 연기를 도현의 실력으로 치부했다.
그러나 카메라 앞에 선 도현은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찍는 장면인데도, 감정을 몰입할 만한 충분한 시간이 없었을 텐데도, 순간적으로 휘몰아쳤다.
‘그날 그대로 쫓아냈으면.’
그랬다면 어떻게 됐을까.
“…진짜, 불공평하네.”
그가 중얼거린 목소리에 스태프 한 명이 웃었다.
“맞아, 일 년 만에 저런 양궁 실력이라니! 모든 양궁 선수들이 불공평하다고 느낄걸!”
“하하, 네. 그렇죠….”
헤레이즈는 애써 한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