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571화 (572/582)

제571화. 명사수, 아니면 배우 (6)

“…불공평해요.”

툭, 튀어나온 말에 오스카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은발이 어깨 위에 덧댄 갑주 위로 흘러내렸다. 판타지 느낌이 물씬 나는 옷을 차려입은 도현이 눈썹을 찡그렸다.

시선은 한 곳에 고정된 채였다.

“저도 할 수 있는데.”

그 불만 어린 눈이 향한 곳은, 도현과 똑같은 분장을 하고선 아서와 대련을 하는 액션 배우였다.

아서가 칼을 휘두르자 도현의 대역 배우가 춤을 추듯 피한다. 때로는 단검으로 칼을 막기도 했다. 그 일련의 움직임이 하나의 춤처럼 우아했다.

“욕심 안 부린다며?”

“이건 욕심이 아니에요. 헤레이즈는 직접 하잖아요. 저도 시간만 주면….”

“쟨 몇 달 전부터 액션 스쿨 다니면서 연습했다잖아.”

“…….”

도현의 얼굴이 우울해졌다.

맞다.

도현보다 빠르게 이 학교로 온 헤레이즈는 빛의 속도로 적응을 마치고, 도현이 레슬리에게 시비가 걸리는 동안 꾸준히 액션 연기를 배웠다. 듣기론 액션 감독이 직접 알려 주었다던데….

“조금 더, 부지런해질 걸 그랬어요.”

“거기서 더? 아서라.”

도현의 입에서 흘러나온 헛소리에 오스카가 헛웃음 쳤다. 거기서 더 부지런해지면, 뭐 분 단위로 일정을 짜서 움직이겠다는 소리라도 하는 건가.

그는 어떤 의미론 제정신이 아닌 거 같다고 생각하며, 상심 어린 소년을 달랬다.

“다 각자의 역할이 있는 거야. 배우가 다 해버리면, 액션 전문 배우가 왜 있겠어?”

“그건….”

“그리고 그렇게 속상해하기엔, 활도 네가 쐈잖아.”

“그렇지만….”

“무엇보다, 네가 속상해하고 있는 게 말이 돼? 첫 촬영부터 사람들 정신을 다 빼놓은 애가?”

마지막 말에는 진심이 꾹꾹 눌러 담겨 있었다.

는 초대형 프로젝트인 만큼, 사람들의 기대도 남달랐다. 시즌 1이 흥행을 거두고 시즌 2로 넘어가는 지금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 기대 속에서 시작한 첫 촬영이다.

온갖 부담과 높은 기대치를 한가득 떠안고선, 당연하다는 듯이 그걸 뛰어넘어 버렸다. 아직도 몇몇 스태프들은 도현을 흘깃거리고 있었다.

오스카도 그들의 심정을 이해했다.

그 순간 정말 르옌 누바라가 그곳에 서 있는 거 같아서….

“위로 고마워요.”

“아니, 위로가 아니라….”

“컷! OK!”

한 치의 과장 없는 진심이었다고 말하려던 오스카의 말은 컷 소리에 끊겼다. 감독과 무어라 대화를 나누던 액션 배우는 문득 고개를 돌리더니 이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담요를 덮고 앉아 있던 도현이 몸을 일으켰다. 그에 은색 가발을 쓴 남성이 말을 걸었다.

“괜찮았을까?”

그는 라이언 리조로, 일본과 이탈리아의 혼혈이며 동시에 도현의 대역 배우이기도 했다. 언뜻 말라 보이는 체구는 잘 살펴보면 돌처럼 단단했다.

그는 신기하리만치 도현과 체구도, 그리고 골격도 비슷했다. 혼혈 같은 외양까지도 그랬다.

도현은 부모님이 모두 동양인이고, 그는 정말로 섞였다는 차이점이 있지만.

“제가 보기엔 훌륭했어요.”

“그래?”

도현의 대답에도 그는 시선을 물리지 않았다. 도현이 의아해하자, 라이언이 제 목 뒤편을 쓸어내렸다.

“아니, 아까 표정이 별로길래.”

“아….”

검은 눈이 살짝 흔들렸다.

저를 바라보는 걱정스러운 시선에, 도현은 자신이 얼마나 애같이 굴었는지 깨달았다. 라이언은 그 대신에 위험한 장면을 찍어준 사람이었다.

그런데 표정 관리도 못 하고 쳐다봤다니.

“…신경 쓰이게 해서 죄송해요. 그런 게 아니라, 그냥 피곤해서 그랬어요.”

“아, 그런 거야?”

라이언이 안심한 얼굴을 했다.

“난 또, 내가 마음에 안 드는 줄 알고….”

“그럴 리가요.”

“그럼 다행이네. 나는 네 팬이거든. 스타한테 미움받는 팬은 너무 슬프잖아.”

“팬이라고요?”

“우리 엄마가 널 많이 좋아해.”

라이언은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신이 난 채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의 엄마는 일본 사람이고, 이탈리아에서 지내면서 인종 차별로 종종 고초를 겪었다고.

“그래서 네 캐스팅 기사가 떴을 때 너를 굉장히 응원하셨어. 어린아이가 제 능력으로 당당히 해나가는 게 멋지다고.”

생각보다 이런 이유로 도현을 응원하는 사람이 많았다. 자연히 토드 감독이 말했던 상징이 떠올랐다.

그때, 줄줄이 말을 늘어놓던 라이언이 별안간 손을 휘저었다.

“팬이라 말한 게 이 이유 때문은 아니야. 그걸로 관심을 가지게 된 건 맞는데, 그렇게 찾아보면서 정말로 팬이 됐거든.”

“어느 쪽이었어도 고마웠을 거예요. 라이언 씨의 어머니도요.”

“와, 성격도 좋네. 내가 만난 스타들이 다 그렇지는 않던데. 아무튼, 그래서….”

“라이언! 다음 촬영해야 해!”

“앗, 네!”

그는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며 급히 사라졌다.

도현은 옆에서 저를 지그시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도현이 입을 다물고 있자 기다리다 지친 오스카가 먼저 말했다.

“뭐 느끼는 거 없어?”

“…그래도, 다음 시즌엔 제가 직접 할 거예요.”

“고집도 참….”

그는 곧 못 이기겠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도현은 그 한숨을 흘려들으며 다시 촬영에 들어간 라이언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의 사소한 움직임 하나하나 모두 뇌리에 새길 것처럼.

다만, 이번엔 우울함이 가신 반짝이는 눈빛이었다.

* * *

라이언은 친화력이 남달랐다.

그는 짬이 날 때마다 배우의 의견을 묻는다는 명목으로 다가와 수다를 떨었고, 하루 만에 도현은 라이언과 번호까지 교환하게 되었다. 그는 무척이나 수완이 좋은 사람이었다.

제 번호를 넘겨주며 라이언은 눈을 찡긋했다.

“경호 필요할 때 연락해도 좋고.”

그는 액션 배우면서, 동시에 의뢰를 받고 일하는 용병이었다. 실상 용병 쪽이 본업이고 액션 배우는 취미 생활 정도인 거 같았다.

그때, 도현의 옆자리에 누군가 털썩 앉았다.

“죽겠다.”

헤레이즈였다.

그는 반복되는 촬영에 지쳤는지 반쯤 영혼이 나간 기색이었다. 그 옆에 스태프들이 달라붙어 땀을 닦아주었다.

“아, 아서.”

라이언이 그를 아는 척했다.

“액션도 잘하더라. 놀랐어.”

그 칭찬에 헤레이즈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손으로 가리며 헛기침했다. 그러다 따가운 시선에 흠칫했다.

“…왜 그렇게 쳐다봐?”

“아니야.”

“나 뭐 실수했어?”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아닌 게 아닌 얼굴인데.

“헤레이즈! 다 쉬었어?”

“네!”

“방금 찍었던 장면 한 번만 더 찍자!”

헤레이즈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꾸준히 액션 스쿨을 다니고, 또 감독에게 지도받았음에도 단기간에 능숙해지기란 쉽지 않았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면 액션 전문 배우가 따로 존재할 이유가 없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NG만 몇 번째야…. 헤레이즈가 앓는 소리를 냈다. 내가 미쳤다고 직접 하겠다고 했지. 그런 중얼거림도 들려왔다.

헤레이즈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러다 감독의 시선이 향한 순간 어깨를 바짝 폈다. 다 죽어가는 얼굴에도 미소를 매단 채였다.

“저걸 보고 느끼는 거 없어?”

“제가 저기 있어야 했는데.”

“…그래, 물어봐서 미안하다.”

* * *

활 쏘는 장면이 세 번 만에 통과를 받은 것과 달리, 헤레이즈의 액션 연기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사실 헤레이즈가 못 하는 건 아니었는데, 토드 감독의 완벽주의가 자꾸만 ‘다시’를 불렀다. 결국 그날은 액션 장면을 소화하는 것에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했다.

촬영이 끝난 헤레이즈는 도현과 함께 기숙사에 가는 대신, 마사지를 받으러 갔다. 근육통이 생겨 다음 날 촬영에 지장이 생기면 안 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다행히 마사지가 효과가 있었는지, 다음 날 헤레이즈는 멀쩡한 얼굴로 나타났다.

그러나 도현은 헤레이즈에게 말을 걸 새가 없었다.

오늘 촬영할 장면은 수업 시간.

그 말인즉슨, 에서 길잡이 후보 역할을 맡은 모든 아역 배우가 한자리에 모여 있다는 뜻이었다.

“루카, 정말 오랜만이네.”

“그러게. 음? 너 키 컸다.”

“클 때니까.”

주인공과 화려한 미소녀이자 유명한 모델이 대화를 나누자, 아이들의 시선이 슬금슬금 그쪽으로 향했다. 도현은 그 틈을 타 두 사람에게서 티 나지 않게 멀어졌다.

“신시아.”

“르옌.”

멍한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니 마음에 평온이 찾아왔다. 도현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신시아는 도현이 연주를 들려준 이끼들의 근황을 떠들어 댔다.

“곧 촬영 시작합니다! 배우분들은 정해진 자리로 가 주세요!”

스태프의 외침에 아이들이 하나둘씩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

‘학교에서 쉬는 시간 끝난 거 같네.’

각자 책상을 찾아가서 앉는 모습이 딱 그랬다.

다만 이 경우에는 교실이 나무 안에 만들어져 토굴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과 책상도 나무뿌리의 결과 모양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는 점, 현대의 교실처럼 밝지 않고 은은한 불빛이 흐른다는 게 조금 달랐다.

아, 교실 구조가 앞에 교탁이 있고 책상이 가지런히 나열된 모양이 아니라, 가운데에 교탁을 둘러싸고 원처럼 배열되어 있다는 점도 조금 특이한 부분이었다.

기본적인 상식으로는 그렇게 책상을 두면 누군가는 정령의 뒷모습을 봐야 하지만, 여긴 상식이 통하지 않았다. 정령은 한 명인데도 모든 아이가 자신을 쳐다보는 정령을 볼 수 있었다.

정령의 신비한 힘이었다.

때마침 감독이 정령과 눈을 마주치는 것처럼 연기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토드 감독은 직접 움직여 가며 이곳에 있는 아역 배우 한 명 한 명에게 구체적인 지시를 했는데, 도현의 차례가 왔을 땐 자연스럽게 지나쳤다.

“…….”

너무 자연스러워서 못 본 건가 싶을 정도였다.

호르헤 역을 맡은 배우가 키득거렸다.

“부럽다. 신뢰가 두터운가 봐.”

“…그런가요?”

그래도 한 마디 정도는 해주지.

도현은 내심 아쉬움을 삼켰다.

그리고.

“촬영 시작합니다!”

둘째 날 촬영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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