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2화. 명사수, 아니면 배우 (7)
“꼬리 좀 치워봐. 지나갈 수가 없잖아!”
복슬복슬한 꼬리로 바닥을 쓸어대던 소년의 귀가 쫑긋했다. 그는 곧 제 꼬리를 끌어안아 길을 비켜주었다.
“미안, 못 봤어.”
꼬리는 CG로 들어가므로 그가 끌어안은 건 허공이었다. 그러나 머리에 제 몸의 반만 한 바위를 이고 지나가는 작은 사람은 진짜였다.
바위 동굴을 터전으로 삼는, 노움족의 후보가 의자 위에 바위를 올렸다. 그리고 제 몸 또한 그 위로 올렸다. 그러자 다른 후보들과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반대로 몸이 너무 커서 곤욕을 치르는 종족도 있었다. 갈롯족 후보는 어깨와 다리를 옹송그려 간신히 책상 아래에 몸을 구겨 넣었다.
그런가 하면, 무척이나 화려한 종족도 있었다. 매끄러운 푸른 피부 위에 값비싼 장신구가 짤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촬영 시작 전, 몇 시간에 걸쳐 마친 특수 분장이었다.
그 모습을 한 차례 카메라에 담은 후, 스태프가 신호를 보냈다. 웅성대던 소리가 잦아들며 후보들의 시선이 중앙에 고정되었다.
정령 역할을 맡은 배우는 원래부터 그곳에 서 있었지만, 배우들은 그가 갑작스레 허공에서 생겨난 것처럼 반응했다.
이그린도 마찬가지였다.
소녀는 경외와 경계가 섞인 눈으로 정령을 보았다.
본디 종족의 전대 후보가 후대의 후보에게 많은 것을 알려준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그러지 못했다.
전대 후보 대다수가 시험 중에 죽음을 맞이했으며, 살아 나온 자들도 어느 날 하나둘씩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그 누구도 소리 내어 말하진 않지만, 모두가 짐작했다. 그 실종이 부자연스럽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용기 내어 입에 담기엔 적이 너무 강대하니까.
억압의 시대며 지배의 시대였다.
그 시대에 후보가 된 이그린은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이 그렇듯이 전대에게 아무것도 물려받지 못했다. 힘뿐만 아니라 지식까지도.
“좋은 아침이군요.”
그렇기에 정령이 이토록 생명체와 흡사하단 사실도 이곳에 온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는 평범하게 말했고 평범하게 행동했다.
만약 몸이 반투명하지 않고, 목소리가 귀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 울리지만 않았더라면 그 신성한, 모든 종족이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정령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으리라.
“컷! OK!”
오케이 사인을 외친 토드 감독은 턱을 매만졌다.
어제 도현이 보여준 활 솜씨. 그리고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훌륭했던 헤레이즈의 액션 연기. 마지막으로 둘째 날 첫 촬영부터 바로 통과라….
‘이거, 느낌이 좋은데.’
물론 속단하기는 일렀다.
이제야 막 시작한 참이니까.
그래도 예감이 좋은 걸 부정할 필요는 없었다. 토드가 한층 더 유쾌해진 투로 말했다.
“사인 확인하고, 신호 들어간 순간 각자 지정된 위치를 보고 놀란 척해야 해.”
“네!”
빳빳하게 각이 잡힌 배우들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토드는 개인적으로 촬영 초반의, 칼같이 각 잡힌 분위기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의 얼굴에 만족스러움이 떠올랐다.
“두 번째 씬 갑시다!”
그의 외침과 함께 촬영이 곧바로 이어졌다.
“아!”
사방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나직한 탄식을 흘린 건 이그린도 마찬가지였다.
“이 구슬 안에는 길잡이의 몸에 흐르는 것과 같은 힘이 담겨 있습니다.”
후보들은 제각각 그들의 눈앞에 떠오른 구슬을 보았다.
투명한 구슬은 그 안에서 끊임없이 회전했다. 마치 거대한 호수를 품은 것 같았다. 그 안에 황금빛 줄기가 물고기의 꼬리처럼 화려하게 물결쳤다.
그들의 몸 안에 각인된 증명이 황금빛 기운에 반응했다. 그들은 저도 모르게 황홀한 낯으로 구슬을 응시했다.
“그러나 제멋대로 엉켜 있죠. 함부로 건들면 구슬이 깨지고 말 겁니다. 이 구슬을 깨트리지 않고 기운을 모두 구슬 밖으로 빼내는 것이 두 번째 증명입니다.”
“!”
후보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증명.
“마, 만약 증명하지 못하면….”
“그대들이 치렀던 첫 번째 증명과 같습니다.”
자격을 잃겠죠. 잔잔하게 뇌리에 울린 소리는 웅덩이에 던진 돌과 같았다.
후보들 사이에서 파문이 일었다.
그때, 한 소년이 바르르 떨었다.
“아, 이제야!”
쉬익, 흥분 어린 탄식과 함께 끝이 갈라진 혀가 튀어나왔다. 호르헤의 붉은 눈에 흥분이 진하게 묻어났다. 감정이 격해지자 동그랗던 홍채가 파충류처럼 세로로 길어졌다.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소년 옆에 유독 조용한 존재가 있었다. 르옌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그의 눈 한가득 구슬이 들어찼다.
아름답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연습하다가 구슬이 깨진다면 저를 찾으세요. 지정일까지만 성공하면 됩니다.”
“지정일이란 건?”
질문과 동시에 구슬 표면에 황금빛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빛이 가신 자리에는 숫자가 떠올라 있었다.
“그 수가 사라질 때까지. 그게 그대들에게 주어진 시간입니다.”
검은 눈동자가 구슬 안에서 유영하는 황금빛을 담아내었다. 꼭 르옌의 눈에 빛이 떠오른 것 같은 모습이었다.
르옌은 손가락으로 구슬 표면을 덧그렸다.
저 기운이 아름다운 이유는 이 하잘것없는 유리막 안에 갇혀 있어서다. 가둘 수 없고 잡을 수 없는 것이 자연을 거슬러 묶여 있어서.
카메라는 소년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던 것을 멈추고 방향을 바꾸었다. 생각에 빠진 소년을 고요하게 쳐다보던 소녀가 화면을 스치듯 지나갔다.
* * *
촬영 사이사이, 토드 감독은 배우들을 계속 호명했다.
“중간에 집중 못 했지?”
“죄송합니다!”
“그리고 거기, 너. 자꾸 카메라를 쳐다보려고 하던데.”
“죄, 죄송합니다.”
그 짧은 사이에 그걸 어떻게 다 봤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적절한 피드백과 디렉팅을 남긴 토드는 루카의 앞을 지나갈 땐 그녀를 칭찬했다.
“잘했어. 루카. 생각보다 더 잘하는데?”
“감사합니다.”
“정말이야. 아, 지금도 무척 좋았는데, 다음 촬영엔 조금 다르게 해볼까?”
“어떻게요?”
“감정을 조금 빼는 쪽으로. 지금은, 흠, 눈에 확 들어오긴 하는데 그러다가 르옌이 눈치채진 않을까 조마조마한 느낌이야.”
“아아, 네. 알겠어요.”
대체 어떻게 노려봤길래?
하하 호호. 도현은 가식적으로 웃는 루카를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괜히 신경 쓰다가 얽히면 피곤해질 게 분명했다.
토드 감독은 배우의 역량을 끌어내는 데 채찍보단 당근이 효과적이라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잘못한 것을 지적하지만, 잘한 것은 꼭 짚고 넘어갔다.
“드류, 너는 잘했어.”
드류 라보프.
노움족 후보 역할을 맡은 배우로, 후보 중에서 제일 연장자지만 제일 어려 보였다. 그가 앓고 있는 왜소증 때문이었다.
그러나 노련한 연기를 보고 있노라면 그의 나이를 실감하게 됐다.
드류는 뛰어난 배우였다.
곧이어 잠깐의 피드백 타임이 끝났다. 이번에도 도현은 별다른 피드백이 없었다. 사실 피드백이 필요할 만큼 어려운 연기도, 큰 비중도 아니기도 했다.
“촬영 들어갑니다!”
도현은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다시 르옌 누바라가 될 시간이었다.
* * *
드디어 공부에서 벗어난다!
아서는 기뻐서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차라리 칼을 휘두르고 땀을 흘리는 게 낫지, 책상에 앉아서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는 글자를 집어넣는 건 고역이었다.
“그렇게 좋아?”
“그럼 넌 안 좋아?”
“난 걱정되는데….”
이그린은 심란한 눈으로 손바닥에 올린 구슬을 굴렸다. 안에 든 황금빛 기운도 이리저리 튀었다.
표면에 부딪힌 기운은 잠깐 퍼지기도 했는데, 그게 꼭 멀미라도 하는 거 같아서 신기했다.
“넌 뭔가 느껴져?”
“아니. 그래도 곧 느끼겠지!”
“바보인 건지, 낙천적인 건지.”
한숨 섞인 말을 뱉을 때였다.
“르옌 님, 두 번째 시험이 시작해서 다행이죠? 이제 저런 천한 것들이 후보랍시고 같은 공간에 있는 꼴을 보지 않아도 되잖아요.”
사악, 입술 사이에서 튀어나온 혀가 공기를 갈랐다. 빙글거리며 웃는 낯이 무척이나 재수 없었다.
“저 자식이….”
발끈한 아서가 나서려는 걸 이그린이 간신히 붙잡았다. 아서가 눈썹을 찡그리며 왜냐는 눈으로 보았다. 이그린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호르헤가 무서운 건 아니다.
‘정말 무서운 건, 저쪽이야.’
이그린은 누바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그는 숱한 후보들이 그가 이곳을 손아귀 아래에 두려 할 것이라 예상한 것과 다르게 잠잠했다. 시끄러운 건 오히려 호르헤 쪽이었다.
시끄럽게 굴면 그 속에 있는 진의라도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침묵한다면….
꿀꺽, 이그린이 마른침을 삼켰다.
동굴 안에 거대한 몸을 웅크리고 있는 맹수를 보는 기분이 이럴까.
이그린은 영리했다. 그녀는 누바라에게 복종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심기를 거스를 이유 또한 없다는 걸 알았다. 그게 가장 현명한 태도였다.
이만 가자, 아서. 옆에 있는 이에게만 들릴 만큼 작게 속삭인 순간이었다.
“하, 오히려 이쪽이 다행인데?”
한쪽에서 날 선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후보들의 시선이 자연히 그에게로 쏠렸다.
뺨에 난 초록빛 비늘과 손가락 사이사이에 있는 막. 그리고 목에 빗금처럼 난 아가미. 어퍼족의 소년, 오웬이었다.
“정령께서는 참 현명하시지. 신성한 나무 안에서는 비겁한 술수를 벌일 수도, 남의 힘을 빌릴 수도 없으니까 말이야.”
“누굴 보고 하는 말일까?”
“누구겠어? 네가 발을 핥아대는 주인이지.”
아이들은 진심으로 경악했다.
오웬 어퍼.
그가 르옌 누바라에게 시비를 걸었다.
호르헤가 사납게 미간을 구겼다. 그의 눈동자가 흉포한 빛을 띠며 세로로 길어졌다.
“네가 감히 르옌 님한테….”
“남 발이나 닦는 뱀 새끼한테는 관심 없어. 아니면 고귀하신 분은 제 입으로 말도 못 하나?”
오웬은 어떻게든 르옌의 속을 긁고 싶어서 안달 난 거같이 굴었다.
미쳤어. 조용히 빠져나가긴 완전히 글렀잖아. 이그린이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