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573화 (574/582)

제573화. 명사수, 아니면 배우 (8)

어느 날 밤, 기숙사 안.

한 사람의 목소리만이 들려야 하는 방에서 두런두런한 대화 소리가 흘러나왔다. 열린 창문 너머로 두 사람의 인형이 어른거렸다.

팔락, 대본이 넘어갔다. 다시금 대사를 읽으려던 헤레이즈가 불현듯 낮게 웃었다.

“넌 왜 이렇게 여기저기서 시비가 걸리냐. 이 정도면 레슬리 2탄인데?”

그 자리에 있던 건 아니지만, 건너 건너서 상황을 전해 들은 헤레이즈였다. 그의 우스갯소리에 도현이 고개를 기울였다.

킥킥거리던 헤레이즈가 도현의 앞에 대본을 내밀었다. 손가락이 대사를 짚었다.

“넌 여기 연기하면서 기시감 안 들었어?”

“그다지? 레슬리랑은 달라.”

“다르기야 하겠지.”

아니, 그게 아니라. 어두를 던진 도현이 천천히 설명했다.

“레슬리는, 뭐랄까. 그 기저에 있는 건 미성숙함이야.”

“미성숙? 걔가?”

커다란 덩치와 험상궂은 얼굴을 떠올린 소년의 표정이 떫어졌다.

이를 본 도현이 덧붙였다.

“외면 말고 내면.”

“아.”

그래도 이해한 눈치는 아니었다.

“나랑 친해지고 싶어 했지. 지금은 아니지만, 처음에는 말이야. 그가 날 싫어하는 건 거부당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 그런데 오웬은….”

툭. 툭. 무의식중에 움직이던 볼펜이 멎었다.

“오웬의 표면적인 행동 원리는 정의감이야. 정의, 복수, 그런 거.”

장난삼아 꺼낸 말에 도현이 진지하게 반응했다. 처음엔 떨떠름히 듣던 헤레이즈의 푸른 눈에 흥미가 깃들었다.

“표면적인? 그럼 진짜 이유는 다르다는 거야?”

“응, 내가 봤을 땐….”

르옌이 상체를 돌려세웠다.

“하려는 말이 뭐야.”

단출하지만 고급스러운 소재의 검은 셔츠 위로 은은한 불빛이 내려앉았다. 흐트러짐 없는 시선이 상대를 응시했다.

“내가 일족의 도움을 받아 비겁한 술수로 시험에 통과했다고?”

“그래. 네놈은 그런 놈이니까. 더러운 누바라의 피가 흐르지. 학살자의 피가 말이야. 그거 알아, 누바라? 너한테 지독한 냄새가 가득해. 썩은 웅덩이에서 나는 비린내처럼 아주 고약해서 참아 주기 힘들 정도야.”

노골적인 조롱에 르옌을 따르는 무리가 오웬을 노려보았다. 그 살기등등한 기색에도 오웬은 물러서지 않았다.

내가 왜 물러서야 하지?

어퍼는 물의 지배자와 같은 종족이었다. 물속에선 그 어떤 생명체도 어퍼를 위협할 수도, 해칠 수도 없었다. 그런 어퍼족 출신인 오웬은 자긍심이 높았다.

그리고 상대는 누바라였다.

악명 높은, 또 자신의 일족에게 해를 입힌 누바라의 후계자! 오웬 스스로 여기기에, 그의 분노와 증오는 정당했다. 더할 나위 없이.

“아, 그래.”

르옌은 녹색 해조류 같은 눈동자에서 욕망을 읽어냈다.

입술 사이로 실소가 흩어졌다.

저 눈.

잘 알고 있다.

상대를 굴복시켜 발밑에 두고 싶어 하면서, 스스로를 정의라 칭하는 오만한 눈빛. 그러나 결국엔 그저 지배하고 파괴하기를 원하는 본성. 욕망과 추악함은 정당화한 채 자신의 신념이 깨끗하다고 믿는….

르옌은 저런 유의 이들이 익숙했다.

차마 일족의 수장이자 길잡이인 아라한에게는 덤빌 자신이 없어, 대신 그의 아들에게 벌을 주고자 찾아왔던 이들이 그러했으니까.

“정령이 주관하는 시험에 수작을 부렸다고 생각하는구나. 네가 내 일족을 그 정도로 대단하게 보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느릿하게 뱉은 말에 주변에서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반면 르옌은 흥미를 잃었다.

그렇게 찾아왔던 이들은 모두 만용의 대가를 치렀다. 그중 살아서 돌아간 자는 없었다. 언젠가 그를 위협할 만한 이들을 놓아줄 수는 없으니까.

- 하, 한 번만, 한 번만 더 용서해 줘! 제발, 내가 잘못했어!

환청처럼 스쳐 간 목소리에 눈을 감았다가 떴다. 눈이 감긴 찰나 떠오른 건 더는 후회를 담지 못하게, 차게 식었던 입술이었다.

‘떠올릴 필요 없는 기억이야.’

미숙했던 과거는 부끄러워야 할 기억일 뿐이다.

르옌은 가늠하듯 상대를 보았다.

신성한 나무 내부에서 대련은 가능하지만, 서로를 죽이거나 영구적인 상해를 입힐 의도로 싸우는 건 금지됐다.

대신 르옌은 오웬의 의도에 어울려 주기로 했다.

약간의 변덕이었다.

“아첨은 그쯤 해. 그런다고 너를 가까이 둘 일은 없으니까. 네 몸에서 나는 물비린내는 조금, 비위 상하거든.”

푸핫! 옆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호르헤가 즐거운 얼굴로 엄지를 치켜올렸다. 르옌은 그를 무시한 채 뒤로 돌았다. 변덕을 부려 잠깐 어울려 주었지만, 이 이상 시간 낭비는 사절이었다.

검은 셔츠 위로 느슨하게 묶은 은발이 흩어졌다. 무방비한 등은 그만큼 철저한 무시를 의미했다.

오웬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내가 길잡이가 되면 제일 먼저 네놈의 사지를 잘라서 개 먹이로 주겠어.”

한 음, 한 음,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르옌은 그것을 마음에 담지 않았다.

길잡이는 제 것이 될 테니.

복도로 사라지는 무리의 뒷모습을 카메라가 담아냈다.

무리 중 한 명은 길목에 있던 아이의 어깨를 의도적으로 쳤다. 르옌은 그 맨 앞에서 뒤를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거기까지 찍은 후 컷 소리가 울렸다.

오케이 사인이었다.

* * *

촬영은 빠르게 재개되었다.

“오웬, 괜찮아?”

발소리가 멀어지자, 내내 눈치 보고 있던 아이들이 오웬의 주위를 둘러쌌다.

“너 어쩌자고 그랬어?”

“뭐?”

날카롭게 쳐다보자 물어본 아이가 움칠했다.

“아니…. 그 누바라잖아.”

“그게 뭐?”

오웬이 눈매를 구겼다.

“여기는 신성한 나무 안이야. 그리고 이곳에 있는 누바라는 쟤 한 명뿐이고. 겁먹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야? 아니면 너, 쟤가 길잡이가 될 거 같아서 그래?”

아이의 얼굴 위로 당황이 떠올랐다. 대답을 종용하는 시선에 그는 잽싸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상관없잖아.”

그게 물꼬였다.

아이들은 저마다 르옌에 대한 비난을 쏟아냈다. 원색적이며, 일방적인 비난에는 르옌이 정말 한 건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내용이 가득했다.

“누바라는 어린애들을 데려다가 심장을 빼 먹는다잖아. 그러면 생명력이 강해진다고. 분명 쟤도 그랬을 거야.”

“윽, 역겨워.”

그건 르옌을 향한 증오심이라기보단, 누바라, 그리고 아라한 누바라를 향한 증오에 가까웠다. 아이들은 그것을 모르는 체하며 르옌을 비난의 대상으로 삼았다.

복수하고자 르옌을 찾아왔던 많은 이들이 그랬다는 걸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서? 아서?”

“아.”

이그린이 아까부터 정신을 반쯤 빼놓던 아서의 옷을 잡아끌었다.

“이만 가자.”

재촉하는 말에 아서는 이그린이 저 소란에 끼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걸 알아챘다.

하긴, 평소에도 신중한 성격이었으니까.

아서가 이그린을 좋아하는 이유기도 했다. 조금 덤벙거리고, 자주 방심하는 자신과 달리 이그린은 철저하고 성실해서.

“가자니까?”

“너도 그렇게 생각해?”

“뭘?”

“누바라 말이야.”

아서는 자신이 누바라와 대련하는 걸 이그린에게 말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가만히 있는 누바라에게 아서가 달려드는 거지만, 아서는 그걸 대련이라고 생각했다.

말하지 않은 이유는 본능적으로 이그린이 말릴 거란 걸 느낀 탓이었다. 최악의 경우엔 이그린이 자신을 포기하고 멀어질 수도 있었다.

“그걸 왜 물어?”

“엄….”

아, 이런 건 별로 익숙하지 않은데.

아서는 최대한 자연스러워 보이길 바라며 상대를 떠보았다.

“저렇게 말할 정도는 아니지 않아?”

“뭐?”

무슨 가당찮은 말이냐는 듯 황당한 표정에 아서가 시선을 피했다.

“아니, 그냥. 누바라는 호르헤 같은 놈들과 달리 조용하잖아. 딱히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고.”

“아서 우더. 난 네 바보 같은 면을 꽤 좋게 생각해. 하지만 넌 바보야.”

“그건 욕이야 칭찬이야?”

“당연히 욕이지. 아서, 생각해 봐. 그 호르헤 같은 놈들 덕분에 이득을 보는 게 누구라고 생각해?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않고, 뒤에서 거드름만 피워도 되는 게 누구겠냐고.”

거기까지 말한 이그린은 이 화제로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내젓곤 앞서 나갔다. 아서는 황급히 소녀의 뒤를 따라갔다.

그러나 속으론 반박했다.

조금, 아니, 조금 많이 까칠하고, 상대방을 자주 무시하고, 눈빛으로 깔보고, 인정머리가 없긴 하지만….

- 또 너니.

그래도 한 번도 아서를 죽이려고 든 적은 없다. 직접 맞아보며 깨달은바, 오히려 적당히 봐준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게다가 최근 들어서는 패긴 패도 무작정 패기보단, 거기가 약점이라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마치 대련처럼.

아서의 얼굴에 확신이 섰다.

“역시 그렇게 나쁜 애는 아니야.”

아무도 듣지 못할 정도로 작게 중얼거린 아서는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다.

마음에 작은 돌조각이 얹힌 느낌이었다.

* * *

휴식용으로 마련된 벤치에 앉은 도현은 아이스티를 쭉 들이켰다. 다시 촬영할 차례가 올 때까지 대기하는 중이었다.

스태프가 부드러운 수건을 들고 땀을 닦아 주려다가 멈칫했다. 땀이 안 났네? 그런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건물 내부가 더운 건 아니지만, 뜨거운 조명과 카메라에 둘러싸여 연기에 집중하다 보면 땀을 흘리는 배우들이 많았다.

“원래 땀이 잘 안 나요.”

“메이크업 고정 잘 되겠다. 아예 안 나는 거니?”

“아뇨. 달리기같이 격한 운동을 하면 나죠.”

아예 안 나면 그건 좀 아픈 거 아닌가. 체온 조절이 안 될 텐데.

뭐가 됐든 스태프는 좋아했다. 그녀가 간단히 화장을 수정하겠다며 얼굴을 톡톡 두드려서 물고 있던 빨대를 뱉었다.

“아, 난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마셔도 돼.”

“괜찮아요.”

다시 빨대를 입에 무는 대신 손가락으로 잡아 휘휘 저으며, 촬영장을 눈에 담았다. 한참 집중해서 보는데 옆에서 달그락하는 소리가 났다.

도현의 옆자리에 아이스티를 내려놓은 루카가 자연스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도현의 미간이 자연스레 찌푸려졌다.

왜 굳이 여기에?

“인사도 안 하니?”

“…해야 해?”

“아직도 꽁해져 있는 거야?”

도현의 눈썹이 구겨졌다.

“그게 무슨 소리야?”

니흐타 분장을 지운 루카는 평소의 화려한 모습이었다. 다 타버린 재처럼 창백했던 니흐타와는 달리 생기가 넘쳤다.

“앞으로 촬영할 때 자주 볼 텐데, 계속 이럴 순 없잖아.”

무슨 속셈인 거지.

도현이 아는 루카는 이런 이유로 화해를 청해 올 사람이 아니었다. 좋은 말 할 때 친한 척하라고 셀러리를 들고 협박하면 모를까.

“생각해 보면 별일 아니잖아. 물론 네가 개새끼이긴 했지만, 아주 재수 없었지만, 아무튼 나도 너한테 셀러리를 던졌으니까.”

“감자튀김도 던졌어. 시리얼이랑….”

“아무튼!”

도현이 입을 다물었다. 그를 새침하게 흘겨본 루카가 물었다.

“그래서 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는데 거절하겠다고?”

저 무한한 자신감은 어디서 기인하는 걸까? 도현은 루카 하퍼가 좋은 집안에 좋은 부모님, 좋은 외모와 재능을 타고났다는 사실은 의도적으로 외면했다.

그와 별개로 루카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도현의 마음속에서 갈등이 치솟았지만, 이내 이성이 그걸 내리눌렀다.

상대는 고작 십 대 소녀였고, 게다가 그건 옛날 일이었다. 어쩌면 루카 하퍼는 수상한 게 아니라, 정말로 지난 일을 훌훌 털어버린 걸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이 무척 속 좁게 느껴졌다.

“…네 말이 맞아.”

루카보다 더 유치한 인간으로 전락할 수는 없다. 도현은 간신히 말을 쥐어 짜냈다.

그런 노력을 알 리 없는 루카는 눈매를 휘었다. 시원하기까지 한 미소였다.

“그렇게 대답할 줄 알았어.”

괜히 빨대를 한 번 더 휘저으니 얼음이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앞으로 무시하지 말고 인사해.”

“응.”

순순히 대답하자 아이스티를 원샷한 루카가 산뜻하게 일어났다. 자기는 먼저 퇴근하겠다며 팔랑거리며 사라지는 모습을 멍하게 쳐다보았다.

잘한 거 맞겠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