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574화 (575/582)

제574화. 명사수, 아니면 배우 (9)

…실수라 해도 이제 와 뭘 어쩌겠어.

“도현 리! 도현 리!”

“여기 있어요!”

손을 번쩍 들자 스태프가 촬영을 준비하라고 말했다. 도현은 남은 아이스티에 미련을 버리고 벤치에서 일어났다.

스튜디오는 소설에 나왔던 모습을 그대로 구현하고 있었다. 도현은 촬영팀을 따라 구불구불한 나무 복도를 걸어, 길잡이 후보들에게 배정된 방에 도착했다.

방의 벽면은 모두 나무의 뿌리로 단단하게 얽혀 있었다. 이 모든 공간이 신성한 나무의 내부였으니 당연했다.

방의 밝기를 조절하는 건 테이블 위에 놓인 호롱불이 전부라, 캠프파이어를 하는 것처럼 아늑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도현은 스태프의 지시를 따라 옷을 갈아입었다.

그가 입은 건 리넨 소재로 된 남색의 옷이었는데, 상의의 가슴 부분은 끈이 교차로 매여 끝이 느슨하게 늘어져 있었다. 아마 파자마 비슷한 옷인 거 같았다.

옷을 입고 나오니 호르헤 조반니 역을 맡은 배우가 침대에 몸을 늘어트리고 있었다. 그는 고개만 슬쩍 들어 도현을 알은척했다.

“이 침대 누워봤어?”

“아니요.”

“완전 푹신해. 장난 아니야. 내 집에 가져가고 싶을 정도라니까.”

행복하게 침대 위를 구르는 남자는 내에서 제일 잔인한 성정을 지닌 호르헤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영화의 팬이 본다면 재밌어할 만한 광경이었다.

“너도 얼른 누워봐!”

그는 기대감에 찬 눈을 했다. 도현이 침대에 눕고, 그와 같은 행복감을 만끽하여 공감해 주길 바라는 눈빛이었다.

‘위험한 뱀이 아니라 애완 뱀….’

거기까지 생각한 도현이 고개를 털었다. 무슨 생각이람. 다만 저 배우가 자꾸 로맨스 드라마와 영화에 캐스팅되는 이유는 알 것 같았다.

그가 바라는 대로 침대에 눕고, 감상 평도 세 줄 이상 읊어주었다. 충분히 만족한 거 같아서 이만 일어나려는데 토드 감독이 말렸다.

“계속 누워 있어. 어차피 자는 거 찍을 거니까.”

“…네.”

공손하게 누우니 그가 다가와 자세를 이리저리 수정해 주었다. 덜 공손히 눕게 되자 토드 감독이 만족스러워했다.

수면 자세를 교정받은 건 도현만이 아니었다. 꽤 평범하게 누워 있던 크리스 레빗은 감독의 손을 거쳐, 둥글게 몸을 만 자세가 되었다. 감독은 뱀의 수면 자세를 따라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빈센트는 계속 자는 척하다가 인기척이 들리면 자연스럽게 한 번 뒤척이고, 도현은 가만히 눈 감고 있다가 신호가 들리면 10초 세다가 일어나.”

“네.”

“그 뒤엔 침대 내려와서 로브를 걸치고 조용히 나가면 돼. 빈센트가 뒤척일 땐 잠깐 멈추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겠지?”

“알겠어요.”

“좋아, 촬영 시작하자.”

도현은 촬영을 준비했다. 눈을 감았다는 뜻이었다.

잠깐 숨소리만 오가는 고요한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잠시 후, 딱! 하는 경쾌한 소리가 울렸다.

‘10초.’

도현은 속으로 천천히 초를 세었다. 적당히 눈 감고 있다가 뜨라고 부른 숫자였겠지만, 도현은 초를 세는 데 무척 능숙했다.

타이머를 켜 놓은 것과 비슷할 정도였고, 그건 연주할 때 초 단위로 완벽성을 추구하던 형에게서 물려받은 능력이었다.

정확히 10초가 지난 후 도현은 눈을 떴다.

검은 밤이다.

호롱불마저 꺼진 방안은 어두컴컴했다. 도현은 그대로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는 그 외의 생명이 내는 소리를 들었다.

잠들었다.

일정한 숨소리에 어느 정도 확신한 도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깨를 덮던 얇은 이불이 스르륵 흘러내렸다.

도현이 막 로브를 걸칠 때였다.

쉬익.

뱀의 혓소리가 들렸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그가 듣기에는 문제없는 정도였다. 검은 눈이 반대편의 침대를 응시했다.

“…….”

잠들어 있네.

미련 없이 시선을 떨어트린 도현은 곧장 문으로 향했다. 대충 걸친 로브를 여미며 방문을 열었다. 끼익, 작은 소음과 함께 방에서 늘씬한 인형이 사라졌다.

방을 나온 도현은 모자를 뒤집어썼다. 겉으로 보이는 것이라곤 조금 흘러나온 은색 머리카락이 전부였다.

도현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단정하지만 빠른 발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지르고, 코너를 지났을 때.

“…누바라?”

멀리, 반대편 복도에 서 있던 소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 * *

“역시 도현은 촬영을 빠르게 끝낸단 말이야.”

데이먼이 도현의 어깨를 두드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일정이 술술 풀리는 게 기분 좋은 기색이었다.

“나 이거 알아. 우리 주연 배우가 한국인이니까 알아봤지. 한국인은 그거 좋아하잖아. 팔리팔리!”

“팔리팔리….”

토종 외국인의 입에서 갑작스레 나온 한국어에는 당황스러운 감이 있었다. 저도 모르게 따라 말한 도현은 헛웃음을 뱉었다.

“아니야?”

“아뇨, 맞아요. 이럴 때 써도 되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웃음을 삼킨 도현이 물었다.

“언제 그런 걸 알아봤어요?”

“네가 나온 드라마를 보다가 한국 채널 몇 개도 보게 됐어. 재밌는 게 많던데.”

어쩐지 한국에서 인터뷰하면 좋아할 거 같은 내용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데이먼이 등을 토닥여 주었다.

“촬영 마무리할 거니까 먼저 퇴근해. 어린이는 일찍 자야지.”

“그럼 촬영 늦게 끝날 때는요?”

“촬영장에 서면 누구나 어른이지.”

하? 탄식도, 웃음도 아닌 것이 터져 나왔다. 데이먼은 뻔뻔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도 어쩔 수 없어, 도현. 할리우드는 원래 어린아이에게도 비정한 곳이라고. 발을 들인 순간 누구나 책임을 져야 하지.”

도현은 고개를 저었다. 기분이 나빠서는 아니었다. 저렇게 말해도 배우의 일상을 존중해야 한다며 의 주연들을 기숙 학교로 전학시킨 게 데이먼이었다.

촬영 시간이 과도하게 길어지거나 너무 늦어지면 제일 먼저 나서서 말릴 사람도 데이먼이었다.

그건 어찌 보면 당연한 거지만, 동시에 당연하지 않은 일이었다. 촬영장은 언제나 바쁘고, 법과 도덕은 너무 머니까.

실제로 십 년 전만 해도, 촬영장에서 아동·청소년 인권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지켜지지 않는 수준이면 다행이지. 거의 학대에 가까운 일들도 자주 벌어졌다.

도현이 만난 팀은 그런 면에서 행운이었다. 모두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알았어요. 들어가서 일찍 잘게요. 데이먼도 너무 늦게까지 일하진 말아요.”

“맙소사. 그거 아니? 내 걱정을 해주는 건 너와 우리 집 웡키밖에 없어.”

분명 아내도 있을 텐데….

도현은 감동에 젖은 데이먼을 괜히 들쑤시지 않기로 했다.

* * *

오스카의 차를 타고 학교에 도착하니 늦은 밤이었다.

야심한 시간에 돌아다니는 문제 학생을 발견한 것처럼 날카로운 눈빛을 하던 사감 선생님은 학생의 정체를 파악하고선 곧 얼굴을 누그러트렸다.

“이 시간에 오니? 내내 촬영장에 있었던 거야? 저녁밥은 먹었어?”

그가 안쓰럽게 바라보며 물었다. 도현은 잘 챙겨 먹었다고 대답하며, 촬영장에서 가져온 음료와 과자를 꺼내 보였다.

“여기, 밤에 근무하다가 피곤하면 드세요. 맛있길래 챙겨 왔어요.”

도현이 간식거리를 넘기자 그 시선은 더더욱 진해졌다. 내가 그렇게 불쌍해 보이나….

뺨을 긁적인 도현은 방으로 향했다. 최대한 조용히 연다고 여는데도 문 열리는 소리가 꽤 크게 울렸다.

아니나 다를까. 침대에서 부스럭대는 소리가 났다. 휴가 잠에서 깬 모양이었다.

‘르옌은 안 깨우고 잘 나갔는데.’

아쉽게 입맛을 다시자 휴가 웅얼거리며 물었다.

“몇 시야?”

“한 시.”

“왜 이렇게 늦어? 그거 아동 학대 아니야?”

“난 아동이 아니야. 그리고 촬영은 일찍 끝났어. 오늘따라 도로가 밀려서 늦은 거야.”

“원래 어린애는 자기가 어린 걸 부정….”

“잠이나 다시 자, 휴.”

“그래….”

반쯤 잠기운에 잠식되어 있을 때 휴는 말을 아주 잘 들었다. 그는 도현이 말한 대로 금방 다시 꿈나라로 떠났다.

씻고 나오니 시침은 두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도현은 드라이기를 켜는 걸 포기하는 대신 창문을 열었다. 지난번에 봤던 민망한 장면 탓에 망설여졌지만, 축축한 베개를 베고 자는 것보단 낫다고 자신을 설득했다.

“…휴.”

다행히도 호숫가엔 아무도 없었다.

아니, 왜 이런 거에 안심해야 하는 거지.

억울함을 느끼며 달을 올려다보았다. 도현은 머리카락이 마를 동안 오늘 찍었던 장면을 머릿속으로 되풀이했다.

이렇게 했으면 더 좋았을 거야. 그 장면은 이런 식으로도 할 수 있었어. 대사는….

하염없이 길어지는 생각처럼 밤도 깊어져 갔다.

* * *

도현이 다시 촬영장을 찾은 건 이틀 후였다.

촬영장은 아침부터 소란스러웠다. 도현은 그 소란의 원인을 금방 발견했다. 도현의 옆에 있던 헤레이즈도 마찬가지였는지, 윽 소리를 내었다.

“징그러워….”

진심으로 질색하는 투였다.

‘그럴 만하지.’

그들이 보고 있는 건, 가시나무에 걸린 시체였다.

정확히는 시체처럼 꾸며진 더미.

어찌나 실감 나게 구현했는지, 가짜인 걸 알아도 거부감이 일었다. 심지어 더미에서 똑, 똑 핏방울이 떨어져서 더욱.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울상을 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었다.

후자는 SNS에 올리면 안 된다고 스태프들에게 주의받았다. 도현은 그냥 가만히 있었다.

“넌 안 징그러워?”

“징그러워.”

“그런데 왜 이렇게 태연해?”

“어차피 가짜잖아.”

가짜인 걸 아는 이상 무서워할 필요는 없다. 도현은 무서워해야 할 것과 아닌 것을 정확히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둘이 같이 왔어? 신시아는?”

데이먼 감독이 말을 걸었다.

“분장실로 갔어요.”

소녀는 압도적인 비주얼의 현장을 보고는 슬픔을 토로했다. 나무가 불쌍해. 왜 꼭 나무에 걸어야 했을까?

한참 서글퍼하던 신시아는 도현이 저 나무가 모형이란 걸 알려주고 나서야 기운을 회복했다. 그리고 씩씩하게 스태프를 따라갔다.

“아, 그래. 그나저나, 오늘 좀 힘들 수 있는데. 잘할 수 있겠어? 혹시 시간 필요하니?”

“괜찮아요.”

힘들다는 게 장면 때문인지, 아니면 비주얼 때문인지. 아니, 둘 다 인가. 뭐든 상관없었기에 사양했다. 헤레이즈도 그런 도현을 흘긋 쳐다본 후 똑같이 대답했다.

데이먼 감독은 믿음직스러운 두 배우를 보고 만족스레 웃었다.

* * *

“레디, 액션!”

똑, 또옥.

바닥에 고인 붉은 웅덩이 위로 핏물이 떨어졌다. 처음으로 그것을 목격한 소녀는 완전히 얼이 나가 철퍼덕 주저앉았다.

비명을 들은 아이들이 하나둘씩 방에서 뛰쳐나왔다. 그들은 가시나무에 걸린 시체와 그 아래 주저앉은 소녀를 보고 경악했다.

“마르린, 괜찮아?!”

소녀의 친구가 달려와 부축했다.

마르린은 비틀거리며 몸을 바로 세웠다.

뒤늦게 우수수 나타난 이들이 낯빛을 굳혔다. 누군가 비명처럼 새된 목소릴 쥐어 짜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돼!”

이곳은 신성한 나무였다.

허락받지 못한 자는 들어올 수 없고, 허락받고 들어온 자는 함부로 살생을 저지를 수 없는 엄격하고 신성한 곳.

톡, 그 믿음을 조롱하듯 붉은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웅덩이에 흐릿한 형체가 비추었다.

죽음의 공포를 느끼지 못하고 눈을 감은, 평온하게 식은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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