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5화. 명사수, 아니면 배우 (10)
아침부터 무슨 소란이야.
오웬은 심기가 불편했다. 같이 방을 쓰는 친구가 말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또 길을 잃고서 그 큰 덩치로 시무룩해져 있을 걸 생각하니 뒷골이 당겼다.
“길잡이가 길치면 어쩌잔 거야.”
갈롯족이 커다란 덩치와 압도적인 무력을 갖고서도 지배층에 끼지 못한 건, 그 단순한 머리 때문이었다. 그중에서도 오웬의 친구인 데일 갈롯은 특별히 더 멍청했다.
때로 그 순수함이 유쾌하게 느껴졌으나, 지금은 기분이 나쁘니 거침없이 멍청하다고 깎아내렸다.
“데일! 데일 갈롯!”
이 멍청이가 재깍재깍 튀어나올 것이지, 어디서 뭘 하는 거야. 오웬이 신경질적으로 걸었다. 그러다 웅성대는 아이들을 발견하고 곧장 직진했다.
“너희 혹시 데일….”
우뚝.
오웬이 순간적으로 멈춰 섰다.
동공이 작게 수축했다.
“…데일?”
오웬은 데일을 찾았다.
최악의 방식으로.
* * *
토드 감독은 카메라에 집중했다.
의 시즌 1은 얼어붙은 숲에서 일어나는 모험과 싸움, 그리고 우정이 중심이다. 박진감 넘치는 액션이 있긴 해도 틴에이지 판타지 느낌이 강했다.
시즌 2도 초, 중반부는 그러했다.
후보들이 일족과 헤어져 나무에 들어오고, 그리고 그곳에서의 생활에 적응하고, 가벼운 시험을 치르고, 서로 대련하고…. 오히려 첫 번째 증명보다 더 느슨하고 평화로웠다.
그 일상적인 순간을 깨트리는 것이 바로 지금이었다. 운명의 수레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하는 시간. 하나둘씩 그들의 앞에 안배된 운명을 마주하는 시간.
화면을 응시하는 눈이 깊게 빛났다.
* * *
동요는 해일처럼 번져나갔다.
밀랍처럼 창백하게 굳은 오웬을 흘깃거리던 아이들은, 저마다 추측을 내뱉기 시작했다.
“죽은 거 맞아?”
“흘린 피를 봐. 그리고 나뭇가지가 배를 완전히 관통…. 큼, 흠.”
죽일 듯이 노려보는 녹빛의 시선에 소년이 헛기침했다. 그러나 오웬의 기세만으로 아이들의 입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여긴 신성한 나무잖아. 여긴 우리랑 정령밖에 없다고!”
“누가 그걸 몰라? 그럼 저건 뭔데? 스스로 저기 올라가서 꼬챙이가 되진 않았을 거 아니야!”
“그럼 네 말은 누군가 데일을 죽였단 거야?”
“꼬, 꼭 그런 뜻은….”
부정하면서도 의심하는 눈초리였다.
의심은 봄날의 씨앗처럼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웠다. 서로를 바라보는 표정이 조금씩 미묘해졌다.
“하지만…. 우린 서로 죽일 수 없어.”
평소보다 하얗게 질린 낯을 한 아서가 말했다.
“정령이 규칙을 설명했잖아. 나무 안에서는 서로 죽여서도, 큰 상처를 입혀서도 안 된다고. 그러면 바로 자격을 잃을 거라고….”
“여기에 자격을 잃은 사람이 있어?”
당연하게도 그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였다.
나 봤어. 누군가의 떨리는 목소리가 작게 울렸다. 친구의 어깨에 기대어 있던 마르린이 속삭이듯 말했다.
“어젯밤에 누바라가 근처를 지나갔어.”
“마, 마르린?”
“로브를 썼지만, 분명 누바라였어. 달빛에 비친 머리카락이 은색이었으니까.”
“확실해?”
내내 침묵하던 오웬이 마르린을 쏘아보았다.
“그거 확실하냐고!”
“내, 내 기억으론….”
“젠장! 비열한 누바라 자식!”
오웬은 범인을 그로 확신했다.
아니라기엔 너무 공교로웠다.
오웬은 전날 누바라의 심기를 거슬렀고, 데일은 오웬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그리고 그와 갈등이 있었던 다음날 데일이 가시나무에 걸렸다….
“죽여 버리겠어!”
“오웬, 진정해! 죽이면 정령이 자격을 박탈할 거야!”
다른 아이들이 말려 보았지만, 이미 결론을 내린 오웬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놔. 누바라, 이 비겁한 자식! 죽일 거면 나를 죽이지, 내 친구를…! 절대로 용서할 수 없어! 용서 못 해! 용서 못 한…!”
“우와, 뭐야? 르옌 님, 저거 보여요?”
오웬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눈동자를 굴렸다. 그리고 보았다. 복도에서 나타난 인형은 여느 때처럼 검은 옷을 걸치고, 그 위에 시리도록 흰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채였다.
마법이라도 부린 거 같았다. 그가 지나갈 때마다 말소리가 하나둘씩 그쳤다. 이윽고 야릇한 침묵이 가시나무 주변을 감싸 안았다.
가시나무로부터 적당한 거리에 멈춰 선 르옌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검은 망막에 붉은빛 풍경이 자두처럼 대롱대롱 맺혔다.
어떻게 반응할까?
후보들은 기이한 기대감을 담아 소년을 쳐다보았다. 열렬한 시선은 얼핏 순수한 잔혹성과도 닿아 있었다.
“…….”
르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핏물이 떨어지는 광경 속에 홀로 동떨어진 그림처럼 서서 설핏 눈가를 찌푸리다가, 가볍게 혀를 한 번 찼을 뿐이었다.
오웬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저 새끼가…!”
“오웬! 진정해! 오웬!”
“얘 좀 말려! 누가 잡아봐!”
모욕이다. 모욕일 것이다.
르옌은 나무에 걸린 제 친구를 비웃었다. 죽은 이를 애도하지 않고 조롱했다. 오웬은 멀어져 가는 르옌을 향해 팔을 뻗었다.
“멈춰! 개자식아, 거기 서란 말이야!”
“하하, 저 꼴 좀 봐. 물 밖에서 팔딱거리는 생선 같잖아!”
호르헤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질 낮게 킬킬대면서도 르옌이 정말 돌아보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르옌이 그를 버리고 가기 전에 따라붙으려던 때였다.
“누바라! 잠깐만!”
인파 사이에서 쑥 튀어나온 누군가가 르옌의 팔목을 덥석 잡았다.
르옌의 눈이 조금 커졌다.
“저거, 네가 한 거 아니지?”
미친 아서 우더!
그때만큼은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었다. 심지어는 호르헤조차도 얼빠진 낯으로 아서를 보았다. 이그린은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컷! OK!”
토드 감독이 크게 외쳤다.
* * *
“순간 공기가 바뀐 줄 알았어요.”
누군가 꺼낸 말에 조명 각도를 조절하던 스태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촬영장에는 특수 효과가 없었다.
그건 편집을 거친 후에야 영화에 등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도현이 등장한 순간, 마치 특수 효과를 깔아놓은 것처럼 그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겪어보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든 신기한 경험이었다.
헤레이즈가 나타났을 땐 꼭 잠에서 깬 기분이었다. 몇몇 스태프들은 저도 모르게 피식피식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다음 장면 이어서 갑시다!”
곧바로 촬영이 이어졌다.
탁, 르옌이 아서의 손을 떨쳤다.
그는 불쾌한 듯, 제 팔목을 보며 눈썹을 찡그리기도 했다. 아서는 속으로 까칠한 자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론 티내지 않았다.
“아서, 미쳤어?”
아연실색한 이그린이 아서의 뒤에서 작게 속삭였다.
어차피 다 들릴 텐데. 그리 생각하면서도 아서는 이그린의 장단을 맞추어 작게 말했다.
“안 미쳤어.”
“아니야. 넌 미쳤어!”
그 일방적인 비난에 어깨를 으쓱한 아서가 르옌을 쳐다보았다. 누바라, 하고 부르는 목소리에 르옌도 그를 응시했다.
“비록 넌 나 같은 천민은 상대하기도 싫어하고, 말 섞기도 싫어하고, 눈 마주치는 것도 싫어하지만. 지금도 왜 저런 천민이 살아서 숨 쉬고 말을 거는지 모르겠단 표정을 짓고 있지만!”
“…….”
“그래서 범인이란 거야, 아니란 거야?”
“모, 모르겠는데….”
작게 속닥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서는 더더욱 어깨를 반듯이 폈다.
“그래도 넌 저런 짓을 저지를 놈은 아니야. 난 알아. 너는 겨우 천민 하나 죽이겠다고 밤에 몰래 나와서 나뭇가지에 매달아 놓고 갈 놈이 아니란 말이야.”
“참….”
르옌은 드물게 할 말 잃은 얼굴로 그를 보았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어이없다? 황당하다?
이런 감상을 느끼게 한 게 신기할 정도였다. 르옌은 그것을 불쾌감이라고 정의 내렸다. 이 우스운 촌극의 주인공이 된 것이 무척이나 불쾌했다.
르옌은 기분을 억누르고 이 상황에서 아버지가 제게 무엇을 원할지 생각해 보았다. 답은 어렵지 않았다. 위대한 수장께서는 그의 것이 무시당하는 걸 가장 혐오했다.
“그래. 네 말대로야.”
나는 하지 않았어.
단조로이 뱉은 말에 아이들이 술렁였다. 제일 거센 반응을 보인 건 오웬이었다.
“그걸 믿을 거 같아? 집어치워! 난 저놈처럼 멍청하지 않아!”
“아니, 내가 왜 멍청….”
읍읍, 읍! 아서는 이그린의 손에 입이 막힌 채 발버둥 쳤다. 이그린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아서한테 넌 멍청이가 맞으니 제발 닥치라고 애원했다.
“내가 죽였다고?”
“그래, 이 살인자야!”
그 말에 르옌은 특유의 우아한 몸짓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좋아.”
궁지에 몰린 사람답지 않게 무척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내 결백을 증명할 방법이 있어.”
“무, 무슨 궤변을 해도 난….”
“궤변? 글쎄, 굳이 말이 필요하진 않아.”
고압적인, 그러나 달이 뜨지 않은 밤처럼 어딘가 음울한 눈빛이 그를 향했다. 그와 달리 목소리는 하프 현의 가장 낮은 울림처럼 아름다웠다.
“이봐, 어퍼. 정말 생선이라도 된 게 아니라면 목 위에 달린 걸로 생각이라는 걸 해 봐.”
르옌 누바라는 잠시 웃었고, 가늘게 올라간 입꼬리는 별 의미 없이 미지근해 보였는데, 오웬에게는 그것이 무척 불길하게 느껴졌다.
“내일 아침이 되면 금방 답을 알 수 있잖아. 아, 이런. 이렇게까지 말해줘도 모르겠어? 내일 네가 나무 장식이 되어 있을지, 아닐지를 말하고 있는 거야.”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종류의 문장이 흘러나왔다. 오웬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는 상대가 누군지 새삼스레 깨달았다.
누바라, 가장 위험한 종족이 사랑해 마지않는 완벽한 후계자.
“감히 이런 모함을 하고도 내일 네가 살아 숨 쉰다면, 안타깝게도 네 추리는 틀린 걸 테고. 죽는다면, 그래. 멋진 추리였다고 박수를 보내줄게.”
르옌 누바라는 여느 때와 같은 우아한 낯으로, 상대를 조롱하는 정중한 태도로, 그러나 서릿발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네가 들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오웬의 뺨이 파르르 떨렸다.
바락바락 악을 쓸 땐 언제고, 피식자로 전락하자 토끼처럼 굳어버린 모습에 호르헤는 진한 비웃음을 내걸었다.
그사이 르옌은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깨끗하게 지웠다. 언제 개화한 꽃처럼 웃었냐는 듯이, 차가운 무표정을 하고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게 꼭 죽일지 말지 고민하는 눈빛 같아서 오웬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똑, 나무에서 흘러내린 핏물이 정적을 차갑게 파고들며 대치를 깨트렸다.
“부디 네가 저 가시에 걸린 두 번째 멍청이가 아니었으면 좋겠네.”
반쯤 진심이었지만, 그걸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짧게 비소한 르옌은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호르헤가 그를 부르며 황급히 따라붙었다. 자연스럽게 한 발짝 뒤에 선 호르헤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얼빠진 어퍼의 얼굴을 상세하게 묘사했다.
물론 르옌이 호응해 주는 일은 없었기에, 뱀은 금방 흥미를 잃고 화제를 바꾸었다.
“르옌 님, 그런데 어젯밤엔 어딜 가신 건가요?”
르옌은 잠시 호르헤를 쳐다보았다.
호르헤는 기대감이 담긴 눈으로 그를 보았지만, 그 잠깐의 일별이 전부였다. 뱀은 아쉬움을 삼키며 주인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