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576화 (577/582)

제576화. 명사수, 아니면 배우 (11)

“레디, 액션!”

르옌이 떠나간 자리에는 침묵만 남았다. 후보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이제 어떻게 할 건지 서로에게 떠넘기는 시선이었다.

“젠장, 데일!”

뒤늦게 정신을 차린 오웬이 나무 위로 올랐다. 아서가 황급히 나무 밑으로 가 양팔을 뻗었다.

그를 노려보던 오웬이 욕을 중얼거린 후 데일을 나뭇가지에서 떨어트렸다.

쿵-!

커다란 몸을 간신히 받아낸 아서가 비틀거렸다. 곧장 나뭇가지 위에서 뛰어내린 오웬은 그런 아서를 본 척도 하지 않은 채 데일을 붙잡았다.

“데일, 망할 자식…!”

그의 눈가가 붉어지는 것까지 본 아서는 등을 돌렸다. 억누른 흐느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굳어버린 피가 손끝에서 바스스 흩어졌다. 그걸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는데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무모했어.”

“…….”

“네가 나설 필요 없는 일이었어.”

그쯤에서 아서는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범인이 밝혀진 것도 아닌데 모두 누바라가 했다고 생각했잖아.”

“그가 가장 유력하니까.”

“그게 진실은 아니지.”

“아서.”

이그린이 말을 골랐다. 그녀는 아서가 얼마나 우직하리만치 곧은 심성을 가졌는지 알았다. 그녀 또한 첫 번째 시험에서 그 특혜를 받았으니까.

‘무작정 반박하는 건 안 돼.’

그를 설득하기 위해 입을 연 찰나였다.

“너, 내가 잘못 봤다고 생각하는 거야?”

마르린의 얼굴에 불쾌함이 떠올랐다. 시체를 발견하여 받은 충격 탓에 예민해져 있던 소녀는 날 선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난 실리아족이야. 누구보다 밤눈이 밝은 종족이라고. 나는 아무리 어두워도 색을 구별할 수 있고, 그날 본 건 분명 달빛 같은 은발이었어!”

그 쏘아붙임에 당황한 아서는 다급히 부정했다.

“아니, 네 말은 믿어. 누바라의 은발은 눈에 띄니까. 난 그냥, 그가 밤에 한 일이 데일과는 상관없다고 생각한 거야.”

아이들은 아서의 입에서 나온 말을 쉬이 믿지 못했다. 아서의 얼굴이 가라앉았다.

‘어제 그냥 가면 안 됐어.’

이들이 누바라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걸 알면서 그것을 그대로 방치했다. 그건 나비의 날갯짓처럼 폭풍을 일으켜 별다른 증거도 없이 누바라를 범인으로 모는 계기가 되었다.

아서는 죄책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만큼 더욱 고집스러워졌다.

“누바라가 의심스러운 건 알아. 하지만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는데 그가 범인인 양 몰아가는 건 옳지 않아. 애초에, 너희들 눈에는 누바라가 자격을 잃은 것처럼 보였어?”

“그건….”

곧게 응시하는 푸른 눈과 단호한 목소리에 아이들이 흔들렸다.

정말 아닌가?

“하지만 누바라잖아.”

아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인정한다면, 이제 형체 없는 무언가를 두려워해야 한다.

“그러니까 그게 이유가 될 수는 없다는….”

“그 누바라 말이야. 모르는 게 없고, 가지지 못한 것도 없을 텐데. 그러면 정령의 규칙을 어기고도 대가를 피할 방법도 하나쯤은 있지 않겠어?”

누바라는 공포의 존재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 두려워하는 건 아라한 누바라와 그의 군대였다.

그의 후계자의 소문이 아무리 흉흉하다고 한들, 결국 그들과 같은 후보였다.

정령조차 막지 못한 미지를 적으로 두는 것보다는 르옌 누바라를 범인으로 낙인찍는 것이 나았다.

“그건 억지야!”

“그럼 누군데? 누바라 말고 다른 누군가가 그랬다는 게 더 억지 아니야?”

심장이 콱 답답해졌다. 아무도 듣지 않는 절벽에서 홀로 소리치는 기분이었다. 아서는 저도 모르게 의지하는 이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시선을 받은 이그린은 눈길을 피했다.

“…….”

아서는 실망하지 않았다.

이그린은 똑똑한 친구니까. 그리고 일족을 대표해 이곳에 온 거니까…. 그러니까, 아서는 분명 이해할 수 있었다.

* * *

오늘은 조금 특별한 날이었다.

즐거운 토요일이었고, 촬영이 없는 날이었으며, 그리고 교장 선생님의 차를 타고 마을로 나가는 날이기도 했다.

“재즈 괜찮아요?”

“전 좋아요.”

“저도요!”

옆자리에 앉은 신시아가 발랄하게 외쳤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헤레이즈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한적한 도로를 가로질렀다.

열린 창문 너머로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와 새소리가 들려왔다. 신시아는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불러댔다. 다만, 헤레이즈는 그리 유쾌해 보이지 않았다.

감추는 거 같긴 했지만, 도현의 눈에는 그가 불편해하는 게 보였다.

‘상담받는 걸 싫어하나?’

오늘 외출의 목적은 한 달에 한 번으로 정해놓은 상담 일정이었다.

아무리 학생의 상담이라도 교장 선생님이 운전기사로서 동행한 건 조금 특이한 일이었는데, 그걸 자청한 건 마샤였다.

- 내 학생들이 꿈을 향해 열심히 헤엄치는데, 이런 도움이라도 줘야죠.

그녀는 완고했다. 기다리기 힘들 거란 말에도 가만히 웃으며,

- 근처에 친한 친구가 있어요. 덕분에 친구랑 오붓한 시간을 보내겠네요.

하고 말했다.

“르옌은 상담 처음 받아?”

“옛날에 받아본 적 있어.”

“그래? 어땠어? 조 선생님은 엄청 좋아. 굉장히 친절하시고, 다정하셔.”

아마도 조 선생님이란 분이 상담 선생님인 거 같았다. 도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상담사는 메리였는데, 그녀도 무척이나 다정한 사람이었다고 말해주었다.

차는 어느새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가운데에 첨탑이 뾰족하게 솟은 교회가 있고, 교회를 중심으로 아기자기한 청록색, 벽돌색, 노란색 건물들이 줄지어 있었다.

마을에 들어선 차는 어느 한 모퉁이에서 멈춰 섰다.

“자, 내리렴.”

신시아의 뒤를 따라 내린 도현은 그들이 들어갈 이 층짜리 벽돌색 건물을 보았다. 건물 일 층은 문이 활짝 열려 있었는데, 그 사이로 진한 커피 향이 풍겼다.

“일 층이 카페인가?”

“응. 상담실은 이 층이야.”

“같이 운영하는 거야?”

“그건 아니랬어.”

그렇구나.

“여기부턴 저희가 갈게요. 감사합니다, 교장 선생님.”

헤레이즈가 한 말에 마샤는 고개를 끄덕인 후, 자신은 친구 집에 가 있을 테니 끝나면 연락하라고 말했다.

마샤를 배웅하고, 도현은 두 사람을 따라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 주인은 밝게 인사하다가 헤레이즈의 얼굴을 보고 웃었다.

“이 층이지? 저 계단으로 가렴.”

“네, 감사합니다.”

외부 계단도 없이 건물을 공유하면 불편하지 않을까 했는데, 카페 주인은 그저 유쾌해 보였다. 안 불편하구나.

도현은 가볍게 카페 안을 둘러보았다. 한쪽에서 재생 중인 LP판이 눈에 띄었다. 흘러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가사가 있는 원곡과 달리 피아노 커버였지만, 알아차리기 어렵지는 않았다.

“Sleepless In Seattle….”

무의식중에 중얼거린 말에 카페 주인의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 그는 제법 반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꽤 오래된 영환데.”

“영화를 좋아해서요. 그리고 이 곡은 명곡이니까요.”

“그렇지! 얘야, 넌 들을 줄 아는구나! 이 영화의 다른 곡도 좋지만, ‘When I fall in love’는 정말 명곡이지! 그리고….”

“저, 미스터. 죄송하지만 저희가 상담이 곧이라서요.”

“…아! 그래, 그래. 그럼 얼른 가보렴.”

도현은 그에게 고개를 숙인 후 헤레이즈의 뒤를 따라갔다. 계단에 오르니, 헤레이즈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번 이야기를 꺼내면 끝이 안 나는 편이야. 특히 음악이나 영화 얘기가 나오면 더.”

아주 호되게 당해본 거 같은 말투였다. 도현은 슬며시 웃음이 나는 걸 참으며 계단을 올랐다. 커피 향과 피아노 건반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똑똑.

이 층 문 앞에 선 헤레이즈가 노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어서 오렴!”

저 사람이 조 선생님인가.

‘조’라길래 아시아권 사람인가 했는데, 그는 누가 봐도 완벽한 미국인이었다. 조는 애칭인 모양이었다.

“오, 새로운 친구도 왔구나. 미리 전해 들었단다. 나는 제이딘 마터야. 제이딘, 조, 아무렇게나 부르렴.”

“반가워요, 제이딘. 도현 리예요.”

도현과 달리 몇 번 와본 경험이 있는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응접실에 가서 앉았다.

내부는 가정집처럼 꾸며져 있었다. 어쩌면 제이딘은 진짜로 여기서 거주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누가 먼저 하겠니?”

“저요!”

신시아가 손을 번쩍 들었다.

거기에 반박하는 사람은 없어서, 자연스레 신시아가 첫 번째 순서가 되었다. 그녀는 이따 보자는 말과 함께 상담실 안으로 사라졌다.

헤레이즈는 뭘 할지 고민하는 도현에게 책을 권했다. 응접실 안에는 한 개의 책장이 있었는데, 책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기다리면서 보라고 놔둔 거니까 봐도 돼. 원한다면 추천해 줄 수도 있고.”

“부탁할게.”

헤레이즈는 별말 없이 일어나 책장 앞에 가서 섰다. 그는 도현의 취향을 조사하더니, 한 권을 꺼내어 건네줬다. SF소설이었다.

“유명하진 않은 작가더라. 나도 여기 와서 처음 알았어. 그런데 생각보다 읽을 만해.”

“그렇구나. 고마워.”

헤레이즈는 어깨를 으쓱했다. 도현은 책을 펴다 말고 그를 흘끔 쳐다보았다.

“헤레이즈, 뭐 물어봐도 돼?”

“뭐? 그거 2권도 여기 있냐고? 찾아봤는데 여긴 1권밖에 없더라. 나중에 사서 보려고. 원한다면 다 읽고 나서 빌려줄게.”

“아, 고마워.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뭐?”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

헤레이즈가 멈칫했다.

“내 착각이 아니라면, 네가 상담받길 싫어하는 거 같아.”

“…….”

여기까지는 그의 선을 침범하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었다. 예상대로 헤레이즈는 불쾌해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앓는 소리를 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그 틈을 노려 질문했다.

“상담이 싫은 거야? 아니면 상담사?”

도현은 그가 말을 꺼내길 기다렸다. 역시나, 잠시 망설이는 듯하던 헤레이즈는 입을 열었다.

“…조가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야. 조의 상담도. 그냥 난 상담이란 것 자체를 안 좋아해. 알레르기 같은 거지.”

“왜?”

“내가 조금 유별나잖아.”

“네가?”

도현이 의아하게 되물었다.

헤레이즈가 유별나던가? 물론 일반적인 기준에서 그의 외양이 특별한 편이란 건 안다. 그의 커리어도 말이다.

그래도 그건 보통 유별이 아니라 특별이라고 하지 않나….

“냄새 말이야.”

“아.”

“후각에 예민하고, 약간 결벽증도 있고….”

그가 짜증스럽게 앞머리를 뒤로 넘겼다.

“옛날부터 그랬다 보니 그런 소리 많이 들었거든. 정신 병원에나 가라는 소리 말이야. 심지어 어렸을 땐 담임 선생님도 우리 부모님을 붙잡고 설득했어. 아이덴 씨, 헤레이즈는 수업 시간에도 마스크를 써요. 그건 아주- 비정상적인 일이에요.”

그는 조롱하는 투로 말을 흉내 내었다.

“그래서 꼭, 그 말 대로 된 거 같아서 기분이 좋진 않아. 물론 아니란 건 알고 있어. 그냥 기분이 그렇다는 거야.”

“이해해.”

“네가? 나를?”

“나도 그리 평범하진 않았거든.”

더 물어볼 줄 알았는데, 도현을 빤히 쳐다보던 헤레이즈는 ‘하긴’ 하고 한마디 한 후 팔짱을 꼈다.

너무 쉽게 수긍해 버리니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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