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역부터 월드스타-577화 (578/582)

제577화. 명사수, 아니면 배우 (12)

정상의 기준이 무엇일까?

도현이 보기엔 헤레이즈는 무척 ‘정상적’이었다. 그는 필요한 관계 외에는 친분을 잘 쌓지 않는 거 같긴 했지만, 그래도 친분을 다진 이들과는 잘 어울렸다.

조금씩 흘리는 이야기를 모아서 보건대 성적도 좋은 편 같았다. 게다가 개인이 가진 능력과 재능 부분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말하자면 미국 소년들의 우상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어떤 이의 눈에는 비정상으로 보인다.

정상의 기준이 너무 빡빡한 게 아닐까. 아니면 나도 그 ‘비정상’에 속해서 이렇게 느끼는 걸까? 날 때부터 정상의 선 안에 들어 있던 사람은 그 원이 널따랗고 편안하게 느껴지는 걸까?

그 원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하지만 이곳에서 봤을 때, 그 작은 원은 좁고 답답해 보였다.

“나는 통제에 집착을 보인대. 남을 통제하려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통제하는 방향으로. 그리고 거기서 어긋나면 쉬이 받아들이지 못해.”

사실 도현은 지금도 하려면 분 단위로 일주일 일정을 짜서 그대로 실천할 수 있었다. 그는 틈 없고 흠 없는 계획에서 안정감을 얻었다. 그건 벽난로에 불이 타닥타닥 타오르는 방처럼 아늑하겠지.

그러지 않는 건 일상에 존재하는 변수 때문이었다.

변수는 다양했다.

오늘따라 너무 맑은 하늘, 기분 좋게 살랑이는 풀잎, 귀를 간지럽히는 새 소리나 애정이 담긴 눈길을 보내는 친구들.

도현의 계획을 엉망으로 만드는 원인이지만, 도저히 미워할 수는 없는 것들.

“신시아는 예쁜 꽃보다는 이끼를 더 좋아해.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아도, 돌이며 바닥에 악착같이 붙어서 끈질기게 살아가는 게 대단하대.”

헤레이즈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래서 뭐, 하는 표정이었다.

“데이먼 감독님은 화요일의 법칙이 있어. 화요일에는 꼭 파란색 넥타이를 걸쳐야 한다는 것인데, 다른 색을 매면 일주일 내내 운수가 안 좋댔어.”

“…….”

“오스카는 아침엔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점심을 먹은 후에는 라테 종류를 마셔. 그게 한 번도 거꾸로 된 적은 없어.”

이윽고 헤레이즈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그는 도현의 얼굴을 쓱 훑다가 눈매를 설핏 찡그렸다.

“아니면 좋겠는데, 그거 위로, 뭐 그런 거야?”

“응.”

“…내가 그런 걸 원해서 말한 줄 알아? 쓸데없는 오해를 할까 봐 말한 거지. 두드러기 날 거 같으니까 관둬.”

뚱하니 말한 헤레이즈가 제 몫으로 챙겼던 소설책을 펼쳤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려니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책이나 읽어. 실컷 추천까지 해줬더니….

그는 도현과 위로 비슷한, 말랑말랑한 대화를 나누는 게 적응이 안 되는 눈치였다. 도현은 순순히 SF 소설을 펼쳤다.

헤레이즈의 말대로 소설은 꽤 괜찮았다. 도현은 후에 그에게 2권을 빌리기로 했다.

* * *

제이딘과의 상담은 순조로웠다.

어린 날엔 철통같은 벽을 단단히 몸에 두르고 얼굴엔 눈이나 겨우 보일까 싶은 가면을 쓴 채 상담에 임했었다. 그에 비하면 지금은 굉장히 오픈 마인드였다.

처음 보는 타인을 향한 낯섦과 경계심, 딱 그 정도였다.

“나는 너와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서 이 자리에 있는 거야. 난 네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너를 비난하거나 공격하지 않아. 네 이야기를 들을 뿐, 너를 어떤 아이라고 판단하지도 않지. 이곳은 너에게 안전한 공간이란다.”

그래서일까?

메리는 작은 방에 틀어박힌 도현의 문을 열고, 바깥은 무서운 곳이 아니라고 안심시켜 주는 어른이 되고자 했다. 그와 달리 제이딘은 친구가 되자고 말했다.

무엇이든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

“생각, 감정, 세계관, 목표, 관심사, 철학, 꿈…. 그 어떤 것도 좋아. 무엇이든 네 마음이 허락한다면 내게 말해주렴.”

어쩌면, ‘치료’의 목적으로 방문했던 메리와 달리, 제이딘을 만난 건 ‘어린 배우가 겪을지도 모르는 정신적 고통에 대한 예방 차원’이기 때문인지도.

“최근에 승마를 배우고 있어요. 승마 클럽에 들어갔거든요.”

도현은 마침 생각난 것을 꺼내었다. 제이딘은 별것 아닌 말에도 호응하며 반응해 주었다.

도현은 늘 듣는 쪽에 서 있는 편이었는데, 이렇게 말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나도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길 원했던 걸까?

조금은 어색한 기분이었다.

상담을 마치고 나가니, 신시아와 대화를 나누고 있던 헤레이즈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교장 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다.

모두 상담이 끝났다고 알리는 그는 꽤 의젓해 보여서 내심 신기했다. 한 살이긴 하지만, 헤레이즈가 그들보다 나이가 많다는 사실이 그제야 와닿았다.

“조, 저흰 가볼게요.”

“미스 마샤가 늦게 오시는 거 같던데.”

제이딘의 말을 들은 헤레이즈가 수긍했다.

“네. 그래서 아래층에 있는 카페에서 기다리려고요.”

“원한다면 응접실에서 기다려도 돼.”

“괜찮아요. 이 뒤에 다른 상담 일정도 있잖아요. 그리고 이 밑에서 파는 커피가 맛있기도 하고요.”

“로디가 커피를 기가 막히게 내리기는 하지.”

제이딘은 얼추 이해했는지 더 권하지 않았다. 그들은 제이딘의 배웅을 받으며 일 층으로 내려갔다. 멀어졌던 소리와 향기가 다시금 선명해졌다.

카페는 주방 쪽을 제외하곤 모든 벽면이 유리창으로 되어 있었는데, 헤레이즈는 익숙하게 코너에 있는 자리로 향했다.

맞은 편에는 헤레이즈가 앉고 도현과 신시아가 나란히 앉았다. 외진 곳에 있는 마을이긴 하지만, 토요일이라 그런지 도로를 오가는 사람들이 꽤 눈에 띄었다.

짧은 구경을 마친 도현이 헤레이즈를 보았다.

“교장 선생님은 무슨 일 때문에 늦으시는 거야?”

“그게, 친구분이…. 아, 감사합니다.”

종업원으로부터 메뉴판을 받아 든 헤레이즈가 두 사람에게 이를 밀어주었다.

“난 메뉴 정했으니까 너희만 고르면 돼. 아무튼, 친구분이 다른 지역에 잠깐 갈 일이 생겼는데, 집에 노묘가 있어서 고민이었대. 멀리 이동하기엔 어려워서. 그래서 교장 선생님이 며칠간 고양이를 대신 돌봐 주겠다고 했더니 답례로 파이를 구워 줬다더라.”

따뜻하면서도 어딘가 우스운 이유였는데, 신시아는 아주 심각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양이. 파이. 응, 둘 다 무척 중요한 이유네.”

그 진지한 말투에 웃음이 날 뻔했다.

헤레이즈도 마찬가지였는지 큼, 하고 헛기침을 한 번 한 후 이어서 말했다.

“늦는 이유는 그 답례가 아직 오븐에서 안 나와서고. 아, 미안하다고, 사과의 의미로 파이를 나눠 주겠다고 하시더라.”

그 소식에 신시아가 무척 기뻐했다.

그들은 각자 메뉴를 고르고 주문했다. 도현은 유기농 녹차를 시켰고, 신시아는 허니 바닐라라테, 헤레이즈는 브루잉커피를 시켰다.

종업원은 도현에게 사인을 부탁했다. 헤레이즈와 신시아의 사인은 이미 받아서 괜찮다고 했다. 도현은 흔쾌히 그가 내미는 종이에 사인을 남겨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한 메뉴가 나왔다. 그들은 각자 시킨 음료를 마시며 느긋하게 노닥거렸다. 가만히 창밖의 풍경을 구경하다가 이따금 대화를 나눴는데, 대화 주제는 다양하고 뜬금없었다.

도현은 고양이를 키움으로써 얻는 정서적 행복감이 큰지 아니면 옷에 달라붙는 고양이 털로 인한 피해가 큰지 떠드는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헤레이즈가 ‘심지어 먹을 것에 고양이 털이 들어갈 수도 있어! 그건 소화도 잘 안돼.’라고 열변을 펼칠 때쯤, 다른 곳에 주의를 팔았다.

‘음반 구경해도 되나?’

LP 플레이어가 있을 때부터 느끼긴 했는데, 카페 주인이 음반에 관심이 많은 거 같았다. 카페 벽면에 LP판이 인테리어처럼 촘촘히 꽂혀 있었다.

도현은 홀린 듯 일어났다.

“나 저것 좀 구경하고 올게. 얘기 나누고 있어.”

두 사람은 열띤 토론에 완전히 빠졌는지, 도현을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도현은 고개를 저으며 아까부터 눈여겨보았던 진열장으로 향했다.

가까이서 본 음반은 꽤 희귀한 것들이 많았다. 심지어는 도현이 갖고 싶었지만 구하지 못한 것도 있었다.

도현은 연신 감탄하며 음반의 면면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어느 시점에서 침묵했다.

“…….”

“얘야, 듣고 싶은 음반이 있으면 그렇게 서 있지 말고 하나 골라보렴.”

음반 진열장 앞에 가만히 서 있자, 카페 주인인 로디가 다가와서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그는 단숨에 곡의 제목을 맞춘 소년에게 호감을 느끼는 상태였다.

“아니면 추천을 해줄까? 어떤 음악을 즐겨 듣는지 말만 해주면 내가 골라주마.”

“…좀, 신기한 음반이 보여서요.”

“무슨 음반?”

도현은 잠시 망설이다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흰 손끝이 콕 집은 건, 연주자의 이름이라곤 딸랑 알파벳 하나뿐인 밋밋한 재킷이었다.

그러자 카페 주인, 로디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 음반!”

도현은 태연하게 물었다.

“원래 알파벳 하나만 적기도 하나요?”

“보통은 안 그렇지. 아주 배짱이 두둑한 연주자야. 이니셜인지 뭔지도 알 수 없는 알파벳 하나라니, 재미있지 않니?”

“그렇네요. 재밌어요.”

로디는 그 대답에 어린 야릇한 기운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도현이 호응하자 신이 나서 말을 쏟아내었다.

“내 친구 놈은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자가 음반 성적에 자신이 없어서 이름을 숨긴 거라는데, 당치도 않지. 초판이 이미 다 팔려서 품절이라더군. 나는 손 빠르게 움직여서 미리 구했지만!”

음반은 총 3천 장이 제작됐다.

스테파노스 프로듀서는 오천 장을 찍고 싶어 했다. 도현은 과하다고 만류했다. 결국 그들이 말씨름한 끝에 타협한 게 삼천 장이었다.

삼천 장이 모두 팔린 순간, 스테파노스는 의기양양한 채로 전화를 걸었다. 재판할 음반의 수는 자신이 정할 테니 반박하지 말라는 말에 도현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연주자의 정체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말이 나오고 있는데, 어느 하나 확실친 않아. 전문가들도 이 바이올리니스트가 누군지 특정하지 못하고 있어. 보통 연주에는 그 나라 특유의 버릇이나, 아니면 사사한 스승의 색채가 묻어나기 마련인데, 이 연주자의 해석이 상당히 오묘하거든!”

말을 줄줄 쏟아내던 로디가 멈칫했다.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건 확실하지.”

“어떤 게요?”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일 거란 것.”

“오….”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게 틀렸다.

“반주자가 루빈스타인이야. 헨리 루빈스타인! 오, 혹시나 해서 묻는 거지만, 그가 누군지는 알고 있지?”

“그럼요.”

같이 녹음도 했다.

“그래. 그 콧대 높은 스타 피아니스트가 반주를 맡았단 말이야. 그게 바로 H가 명성 높은 연주자라는 증거지. 나이도 최소한 삼십 대는 넘겼을 거야.”

도현이 흥미롭게 물었다.

“그건 무슨 근거에 기초한 거죠?”

“이 H가 과거에도 한 번 이 가명을 쓴 적 있거든. 독립 영화였는데 그때가 벌써 7년 전이니까 그때 이십 대였다고 쳐도 지금은 삼십 대…. 잠깐.”

로디가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이내 그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얼마나 놀랐는지, 얼이 나간 얼굴로 입을 뻐끔거리던 로디가 더듬더듬 말했다.

도현은 그의 다음 말을 예측했다.

“…그, 그 영화! 네가 나온 거 아니냐!?”

역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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