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8화. 명사수, 아니면 배우 (13)
도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로디가 헛숨을 들이켰다. 그는 돌연 주위를 홱홱 둘러보더니, 도현의 옆에 바짝 붙어 섰다.
한껏 낮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혹시 H의 정체를…?”
그렇게 궁금한가.
로디는 뜻밖의 행운에 흥분한 사람 같았다. 그리고 도현은 H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뜻밖의 행운이 된다는 게 묘했다.
물론 로디의 바람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었다. 도현은 능숙하게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애석하게도 몰라요. 그때도 H는 신비주의라서 한 번도 만나지 못했거든요.”
하지만 로디는 쉬이 믿지 않았다.
“네 연주를 맡아줬는데 얼굴조차 본 적이 없다고?”
그는 도현이 H의 비밀을 지켜주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고 여겼다.
반 정도는 사실이었다.
“네. 저도 직접 만나서 인사드리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그쪽에서 거절해서요.”
로디는 긴가민가한 기색이었다. 게슴츠레한 시선에 도현이 진실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에요.”
기본적으로 도현은 신뢰감 가는 인상이었다. 희고 깨끗한 피부와 단정한 옷차림, 그리고 불필요한 동작이 없는 몸짓이 그런 느낌을 주었다.
무엇보다 화룡점정은 검은 잉크에 푹 적셨다가 뺀 거 같은 눈동자였다. 이는 흰 피부와 대조되어 더욱 또렷한 인상을 주었는데, 소년이 눈을 바라보며 호소할 때면 열 중 여덟은 눈동자가 흔들렸다.
로디도 그 눈빛을 뿌리치지 못했다.
그는 어렵사리 아쉬움을 삼켰다.
“정말 철저한가 보구나.”
도현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정말 H가 도현을 만난 적이 없든, 아니면 만났는데 함구시켰든, 어느 쪽이든 철저한 건 매한가지였다.
애써 실망감을 추스르던 로디는 문득 피식 웃었다.
“재밌는 이야기도 있지 뭐냐.”
의아해하던 도현은 이어진 말에 합죽이가 되었다.
“영화에서 연주한 H도, 음반을 낸 H도 모두 어린 소년이라고, 그것도 영화의 주인공이었다는 가십인데.”
오늘 그가 한 말 중 유일한 진실이었다.
얼떨결에 진실을 밟았음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로디는 우스움을 참지 못하겠는지 계속 피식거렸다.
“참, 그렇게 말하는 호사가들 앞에 너를 데려다주고 싶구나. 이렇게 어린 걸 두 눈으로 보면 말이 쏙 들어갈 텐데 말이야.”
“하하.”
도현은 말없이 웃었다.
한 치의 의심도 없는 표정을 보니 의도대로 잘 이루어졌다 싶으면서도, 양심이 조금 따끔거리는 것도 같았다.
로디는 도현이 대답하지 않은 걸 눈치채지 못했다. 대신 그는 진열장에 꽂힌 음반을 뽑았다.
“이 음반을 틀어주랴?”
그가 음반을 뒤집었다. 음반 뒤편에는 음반에 수록된 곡의 정보가 쓰여 있었다.
로디가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이 음반은 순서대로 들어야 진가가 드러나는데….”
“무슨 문제가 있나요?”
“1번이랑 2번 트랙이 지금 틀기에 좋은 곡은 아니라서 말이야.”
확실히.
오후의 생동감이 가득한 낮 시간대, 그리고 햇빛이 부서지듯 들어오는 카페에서 악마의 트릴과 크로이처 소나타는 썩 어울릴 거 같진 않았다.
그리고 그 곡들은 너무 솔직했다.
마치 성당에서 신부에게 고백하는 신자와도 같았다. 늦은 밤 혹은 이른 아침, 홀로 있을 땐 듣기 좋을지 몰라도 화기애애 떠드는 이런 곳과는 성질이 달랐다.
“아쉽긴 하지만, 나머지 트랙도 좋으니까.”
도현은 LP 플레이어에 손을 뻗는 로디를 말렸다.
“지금 듣고 싶어서 물어본 건 아니었어요.”
“부담 가질 거 없어. 내 카페는 커피만 주문받는 게 아니라 곡도 주문받거든.”
매우 부담된다.
음반을 내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마주치고, 또 카페에서 틀어질 줄은 몰랐다. 꼭 발가벗고 거리 한복판에 선 기분이었다.
도현은 초조함을 티 내지 않은 채, 여상스레 물었다.
“조금 더 경쾌한 곡이 좋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손님들이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곡이요.”
“아, 그건 괜찮아. 확실히 1, 2번은 무겁지만, 3번 곡부터는 좀 다르거든.”
도현은 침통히 눈을 내리깔았다.
여기서 더 말리면 이상해진다. 로디는 필연적으로 수상함을 느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도현을 H로 의심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도현과 H의 불화설 정도는 생각할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로디는 열심히 돌아가고 있던 LP판을 꺼냈다. 가게 안의 음악이 멈추자 손님 몇몇이 의아해했다. 로디는 능숙하게 새로운 LP판을 그곳에 끼웠다.
도현은 속수무책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딸칵하는 소리와 함께 바늘이 검은 원반 위로 내려앉았다. 도현은 쥐구멍이 있다면 당장 거기에 몸을 욱여넣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바이올린 선율이 흘러나오자, 멈춘 음악과 함께 두리번거리던 손님들의 얼굴이 펴졌다. 그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도현의 연주를 일상에 받아들여 주었다.
로디가 감상하듯 눈을 감고 고개를 까딱였다.
“크라이슬러, 사랑의 슬픔이라는 곡이란다. 무척 아름다운 곡이지.”
“…….”
“사랑의 기쁨이라는 곡도 있는데 이 음반에는 없어. 나도 처음에는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듣다 보니 알겠더구나. 이 연주에는 슬픔과 기쁨이 모두 담겨 있어.”
부자연스럽게 곡이 끊겼던 탓에 사람들은 자연스레 평소보다 귀를 활짝 열어둔 채였다. 대비할 새도 없이, 완전한 날 것의 반응이 도현의 눈앞에 펼쳐졌다.
카페 중앙에 있는 테이블에서 독서하던 중년의 여성이 찻잔을 내려두고 로디처럼 눈을 감았다. 그녀의 입가엔 기분 좋은 미소가 떠오른 채였다.
젊은 연인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소곤거리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소리가 선율 자락에 녹아들었다.
볕이 잘 드는 창가에서 노트북으로 작업에 몰두하던 남성은 무의식중에 잔뜩 힘을 주었던 미간을 누그러트렸다.
사람들 틈을 자연스레 파고들었던 사랑의 슬픔이 흘러가고, 차이콥스키의 멜로디가 펼쳐졌다.
연인은 조금 더 조용해졌다. 그들은 햇빛이 동그랗게 고인 카펫 위에 웅크려 앉은 고양이처럼 나른하고 행복한 낯으로, 가만가만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었다.
책을 읽던 여성은 종이 위에 올린 손가락을 느릿하게 까딱였다. 노트북에 빨려 들어갈 거 같던 남성은 잠깐 휴식을 취하기로 했는지, 안경을 벗고 뻐근한 눈을 깜빡였다.
풍경 속에는 헤레이즈와 신시아도 있었다. 그사이 격렬했던 토론을 끝낸 두 사람은 잔잔히 대화를 나눴다. 그러다가도 반짝이는 것에게 홀린 까마귀처럼 불현듯 멈춰서 선율에 귀를 기울였다.
평범한 풍경이었지만, 도현에게는 마치 마법이 일어난 순간처럼 보였다.
아주 일상적이고, 동시에 특별한 마법이 아무도 몰래 침투해 요술을 부리고 떠난 느낌이었다.
달빛이 흘러나왔다.
“정말 아름답지 않니?”
작게 탄식한 로디가 동의를 구하듯이 물었다.
도현은 잠깐의 침묵 후에 나직하게 말했다.
“네. 아름다워요.”
햇빛 조각처럼 반짝거리는 풍경이 검고 투명한 눈동자 위로 깊이 스며들었다.
마샤는 십 분이 더 흘렀을 때 도착했다.
떠나는 도현을 보며 로디는 한쪽 눈을 찡긋했다. 다음에 오면 멋진 곡을 틀어 주겠다는 말에 도현이 웃었다.
그 친근한 모습에 헤레이즈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언제 그렇게 친해진 거야?”
“그냥 같이 얘기하다 보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도현은 또래의 친구들과 친해지는 것보다 나이 많은 이들과 친해지는 게 더 쉬웠다.
이전에도 진과 니콜라스와 친해지는 건 그리 오래 걸렸으면서, 리암은 만나자마자 십 년은 된 악우처럼 투덕대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걸 헤레이즈에게 알려주지는 않았다.
‘애늙은이라고 놀릴 게 뻔한데 말할 리가.’
헤레이즈는 이상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더 캐묻진 않았다. 신시아가 도현의 옆에 달라붙으며 종달새처럼 떠들었다.
“르옌, 너도 카페에서 나오는 음악 들었어? 되게 좋았는데, 무슨 곡인지를 모르겠어. 아서한테 물어봤는데 아서도 모른대.”
“보통 클래식은 잘 안 듣잖아.”
헤레이즈가 투덜댔다. 내가 교양이 없는 게 아니라고, 그렇게 아무도 뭐라 한 적 없는 일에 불만을 표하는 걸 흘려넘긴 도현이 되물었다.
“음악?”
“응. 르옌이 자리에 없을 때 나온 건데.”
그때 나누던 대화가 그런 거였나?
도현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손바닥 아래 가려진 입꼬리가 꿈지럭꿈지럭댔다.
도현은 큼, 헛기침한 후 말했다.
“그거라면 내가 알아.”
차례대로 사랑의 슬픔, 멜로디, 달빛이라고 알려주자 신시아의 표정이 환해졌다.
음반을 만들기 전에는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다. 행위를 합리화하기 위한 이유가 수십 가지였고, 부족하다 싶을 땐 어디선가 또 이상한 이유를 들고 와 덧붙였다.
만들면서 이루어낸 것도 많았다.
자신의 속마음이나 영혼을 거울 보듯 들여다볼 수는 없으니 짐작만 할 뿐이지만, 그날 도현은 많은 것을 마주하고, 나아갔다. 고해성사한 신자가 성당을 나설 때 새로운 하늘을 맞이하듯이, 도현도 그랬다.
그러나 이제 와선 그 모든 게 지금으로 이어져 있는 거 같았다. 수십 갈래로 뻗어간 길이 결국 하나로 모여 나를 이 풍경으로 인도했다고. 이걸 보기 위해서 그 길을 밟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주회를 성공적으로 마친 연주자처럼 심장이 쿵쿵 뛰었다.
스테파노스에게 초판이 매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그냥 현실감 없었는데, 지금은 손끝이 저릿했다.
이래서였을까?
형이 그토록 음악을 사랑한 건.
한쪽 발을 구름 위에 올린 것처럼 몽롱한 기분이었다. 도현은 멍하니 온갖 소리가 섞인 거리를 걸었다.
몇 명의 행인이 옆을 스쳐 지나가고, 구름이 느릿하게 흐르고, 옆에선 친구이자 소중한 동료들이 대화를 나눴다.
차에 오르기 직전.
도현은 문득 궁금해졌다.
이른 새벽녘, 도둑처럼 서랍에 상자를 집어넣고 나온 후로 의도적으로 떠올리지 않던 호기심이 말릴 새도 없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너는 이 음반을 들었을 때 무슨 표정을 지었을까?
* * *
잠깐의 나들이 이후 다시 촬영 일정이 몰아쳤다.
도현보다 더 바쁜 건 헤레이즈와 신시아였다. 두 사람은 거의 학교에서 얼굴을 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에 비하면 한가한 편이긴 해도 도현 또한 바빴다.
촬영일이 밝았다.
작중에서도 하루가 흘렀다.
오웬은 죽지 않았다. 그는 멀쩡히 살아서 숨 쉬고 있었다. 그러나 나무 안에 평화가 찾아온 건 아니었다.
마르린이 나무에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