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9화. 명사수, 아니면 배우 (14)
그 누구도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사실 그들은 현실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성역이나 다름없는 신성한 나무 내부. 그곳에서 끔찍한 살인이라니.
심지어 그 덩치 큰 데일 갈롯이 무력하게 죽다니.
너무도 황당한 이야기라 그들은 데일의 기이한 죽음과 범인에 대해서만 관심을 쏟았지, 그다음을 걱정하진 않았다.
어제까지도 독기에 가득 차 있던 오웬 또한 넋이 나가 바보같이 나무만 바라봤다. 실핏줄이 터진 초록색 눈에 차차 공포라는 독이 스며들었다.
누굴까, 대체 누가, 왜?
어떻게?
파리하게 질린 오웬은 비틀거렸다. 그는 반사적으로 눈동자를 굴리며 누군가를 찾았다. 기름칠이 안 된 톱니처럼 삐걱대며 움직인 녹안이 검은 인형에게 향했다.
카메라 감독은 오웬과 르옌을 절묘하게 한 프레임 안에 담아냈다.
그들의 거리는 가깝지 않았지만, 텅 비어 있지도 않았다.
수많은 아이가 제각기 혼란에 빠져 있는데도, 오웬의 시야에서 은색의 머리칼을 가진 소년은 주머니에서 툭 튀어나온 송곳처럼 부자연스럽게 시선을 강탈했다.
카메라 감독은 마치 오웬이 된 거 같은 기분이었다. 그와 시야를 공유한 채, 한쪽에서 똬리를 튼 뱀처럼 조용히 있는 소년을 남몰래 훔쳐보는 느낌이었다.
혼란스러운 아이들이 온갖 물감이 섞인 어지러운 색이라면, 르옌은 홀로 까만 잉크 한 방울이었다.
누군가에게 속절없이 시선을 빼앗기고, 몰입하게 되는 감정은 사랑뿐만이 아니다.
그보다 더욱 난폭하고 강력한 것이 바로 공포였다.
카메라가 점점 오웬의 모습을 화면에서 밀어내고, 르옌을 집중적으로 담아냈다. 마치 주변의 모든 것을 잊고 상대에게 몰입해 버린 오웬처럼.
카메라 감독은 느슨히 묶은 은발과 새카만 옷, 등에 멘 활, 그리고 반듯이 선 몸을 담아내며 생각했다.
만약 존재감이라는 게 재능이라면, 저 배우는 누구보다 특출난 재능을 지녔다고.
그러나 정말 뛰어난 것은 그 존재감이 아니었다.
카메라는 르옌의 정면이 아닌, 옆모습을 비스듬히 담아내고 있었다. 그렇기에 왼쪽 얼굴은 샹들리에의 빛을 받아 진주 가루를 뿌린 것처럼 빛나지만, 반대편 얼굴은 어둠에 갇혀 있었다.
카메라의 본질은 관찰이다.
배우의 몸짓뿐만 아니라 눈의 깜빡임과 눈썹의 움직임, 눈동자의 흔들림 혹은 작은 호흡까지도. 그 모든 것을 관찰해서 세밀하게 그려낸다.
그래서 영화배우는 연극배우처럼 과장되게 행동하거나 말하지 않아도 된다. 멀리 있는 사람에게 보이거나 들리게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영화 연기는 정교해야 한다. 조각품에 세밀한 주름과 피부 결을 그려 넣는 조각가처럼, 그렇게 모든 것을, 그러나 현실과 멀지 않게 조각해 내어야 한다.
그런 부분에서 저 동양인 소년은 아주 탁월한 조각가며, 배우였다. 그는 자신의 시선 한 자락까지도 조각해 냈다.
선과 악. 빛과 어둠.
수려한 얼굴엔 두 가지 성질이 공존했다.
빛 아래에 있는 왼쪽 얼굴은 혼란스러워하는 아이 같았다. 반면 어둠에 가려진 오른쪽 얼굴은 날이 잘 든 칼처럼 단단하고 서늘했다. 안개처럼 뭉개진 소음 속에서 또렷한 얼굴은 묘하게 슬퍼 보이기도, 혹은 무감정해 보이기도 했다.
꽃잎이 겹겹이 덧대진 연꽃처럼 의뭉스러운 진실을 감춘 채로, 카메라를 철저한 관찰자로 남긴 소년은 파르라니 시선을 내리깔았다. 작게 입술을 달싹인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 사이를 벌리던 소년은 멈칫했다. 이내 다시 일자로 다문 입매는 생동감이 없었다.
빛과 어둠이 얽혔던 얼굴은 그가 고개를 돌림에 따라 조명 아래 훤히 나타났다. 모든 게 관찰자의 착각이었다는 듯이 드러난 얼굴은 식어 있었다.
시선을 마주친 오웬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뻣뻣하게 그 시선을 마주했다. 마치 그가 움직이는 순간, 괴물이 덮치기라도 할 것처럼.
르옌은 그 모든 생각과 감정을 읽어냈다. 매끄러운 입술에 차가운 조소가 걸렸다. 그는 거칠 것 없이 걸어가, 얼음 동상처럼 선 오웬을 보고 비스듬히 웃었다.
“표정이 이상하네. 살았는데 기쁘지 않아?”
르옌은 동의를 구하듯 오웬을 보았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오웬은 대답하지 않았다. 결국 르옌은 흥미가 식은 듯이, 말없이 그 옆을 지나쳤다.
털썩.
오웬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르옌이 지나간 자리에서 아이들이 하나둘씩 말을 꺼냈다. 그들은 누바라가 범인일지 아닐지, 저마다 이유를 들어 추측했다.
마르린이 누바라의 심기를 거슬러서 죽었다, 혹은 오웬이 살아 있으니 누바라가 아니다. 그러나 귀를 어지럽히는 소리는 오웬의 귀에 닿지 않았다.
오웬은 그가 훔쳐보았던 풍경을 되새겼다. 이내 녹안에 서서히 확신이 차올랐다. 그는 차오른 확신만큼 공포에 눌려, 창백하게 중얼거렸다.
범인은 누바라야.
* * *
카메라 감독은 촬영분을 확인했다.
오케이 사인이 나오긴 했어도, 두 번, 세 번은 더 확인해야 후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그는 직접 촬영했던 걸 이제는 두 눈으로 보면서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감독 중에서 제일 감수성이 넘치는 사람은 데이먼이었다.
독특하게도 소설보다 시집을 더 즐겨 읽는 그는 어느 날엔가, 도현이 연기하는 르옌을 보면 밤 호수에 홀로 핀 연꽃이 떠오른다고 한 적이 있었다.
홀로 고고히 달빛을 받는 연꽃은 비밀스럽고, 의뭉스럽다. 그 안에 무엇을 품고 있는지 도무지 알 방법이 없다. 그러나 그 신비가 사람을 매료시킨다.
깊은 밤, 연꽃 아래 검은 물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호수를 가르고 들어가 연꽃을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이 들게끔.
그 충동의 정의는 각자 달랐다.
오웬은 그 충동을 공포라고 이름 지었다. 호르헤는 복종심이라고 생각했다. 아서에겐 호승심이었다.
그리고 훗날 이것을 보게 될 수많은 이도 각자 다른 정의를 내리게 되겠지.
아마도 그 이름은 매혹이리라고, 그는 어렵지 않게 추측했다.
* * *
“씬 62 테이크 원 갑니다!”
다행히 다음날 또다시 나무에 누군가 걸리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안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게 꼭 폭풍이 오기 전의 고요한 전초전처럼 느껴져서였다.
나무 안엔 금방이라도 끊어질 거 같은 얇은 실처럼 예민한 긴장감이 흘렀다.
후보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혹시 나와 대화하는 이가 범인은 아닌지 의심했다. 활기차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다.
마르린이 나무에 걸린 이후로 오웬은 말이 없어졌다. 르옌과 호르헤만이 평소처럼 행동했다. 그럴수록 그들을 향한 의심의 눈초리는 더욱 커져만 갔다.
그리고.
누구보다 바삐 움직이는 이가 있었다.
이그린이 아서를 붙잡았다.
“또 어디를 가려고?”
“범인을 찾아야지. 도와줄 사람을 구하러 갈 거야. 혼자서 찾기엔 나무는 너무 넓고, 상대는 위험한 존재니까….”
“그걸 알면서 그래!?”
내내 참던 이그린이 폭발했다.
“그만 좀 해! 그 정령조차 알아내지 못한 존재야! 그걸 네가 무슨 수로 밝혀내겠다는 건데?”
후보들은 당연하게도 정령을 찾았다.
그에게 나무 안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살인에 대해 토로했고, 어느 정도는 원망하면서도 그가 해결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기대와 달랐다.
- 나무 안의 규칙은 지켜지고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데일과 마르린이 죽었다고, 그런데 어떻게 규칙이 지켜지고 있는 거냐고 물어도 정령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규칙이 지켜지고 있다는 말만 반복했다.
“하지만 정령은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했어. 그러니까 다른 존재가 해야 해.”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하는 정령에게서 하나둘씩 기대를 버릴 때, 아서는 끈질겼다.
소년은 포기나 체념이라는 게 머릿속에 들지 않은 거 같았다. 그 집념은 정령의 완고함을 기어이 꺾어버렸다.
스토킹 일주일째에 그 정령조차도 아서에게 두 손 두 발을 들었다.
- 당신의 눈에 내가 전능해 보일지 몰라도, 나는 이 나무에 얽매여 있는 몸입니다. 나는 약속으로 묶인 것 외에는 그 무엇도 간섭할 수 없습니다.
그 대답을 들을 때 이그린도 옆에 있었다. 이그린의 머릿속에 온갖 질문이 떠돌았다.
부자유한 존재라는 걸까?
그럼 정령을 나무에 묶은 존재는 누구지? 무엇을 약속한 거지? 약속의 상대는? 그걸 한 이유는? 그렇게 해서 정령이 얻는 건….
끝없이 의문이 이어질 때였다.
- 알겠어요.
아서가 순순히 대답했다.
이그린은 의아한 와중에도 안심했다. 드디어 저 망아지가 포기라는 걸 배우는구나 싶어서.
- 이제 이해한 거야?
이그린의 물음에 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 응. 이유는 모르겠지만, 정령은 나설 수 없다는 거잖아?
의외로 별로 실망한 기색이 없었다.
속상함을 숨기는 걸까.
이그린이 아서를 위로하려 입술을 뗐다.
- 그럼 내가 하면 돼.
그리고 입을 떡 벌렸다.
그때의 아서는 지금과 표정이 똑같았다.
신념에 찬, 확고한 표정.
이그린은 아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얼어붙은 숲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그랬다.
저 불처럼 뜨겁게 타오르는 신념은 어디서 오는 건지, 왜 꺼지지 않는 건지 의문투성이였다.
“그게 너라고?”
“그래.”
“아니, 네가 틀렸어.”
이그린이 딱딱하게 말했다.
“넌 고작 길잡이 후보야. 정령조차 어찌하지 못한 존재를 상대로 네가 뭘 할 수 있을 거 같아? 아서 우더, 정신 차려.”
이그린의 입에서 차가운 말이 줄줄이 쏟아졌다.
“네가 강한 편이긴 하지만, 그뿐이야. 데일 갈롯을 떠올려 봐. 그는 우리 중 그 누구보다도 힘이 셌어. 그런데 어떻게 되었지?”
그녀는 필사적이었다.
아서는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제멋대로 나무 안을 휘젓고 다녔다. 아서가 범인을 찾는 중이라는 걸 나무 안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이그린은 두려웠다.
이토록 제멋대로 구는 아서를, 범인이 조용히 넘어가 줄까? 그가 다음을 준비 중이라면, 그 타깃은….
“마르린은? 걘 우리 중에서 무척 영리한 축에 속했어. 게다가 누구보다 밤눈이 밝았지. 그런데 모두가 잠든 밤사이에 그렇게 끔찍한 일을 당했어. 아서. 너는 데일보다 강하지도, 마르린보다 똑똑하고 어둠에 밝지도 않아.”
친구와 좀 싸우더라도.
틀어지고 사이가 멀어지더라도.
그렇게 해서 아서가 포기한다면 이그린은 기꺼이 그럴 수 있었다.
아서는 그녀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니까.
“나도 알아. 그래서 도와줄 사람을 찾고 있어. 혼자서는 어려워도, 여럿이서 하면 분명….”
“누가 널 도와주는데?”
이그린이 차갑게 웃었다.
“누가? 지금껏 한 명이라도 네 말에 고개를 끄덕인 애가 있었어? 없었지? 당연하지. 그 누가 네 자살 행위에 가담하겠어.”
아서가 화가 난 표정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이건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어! 당장 내일 자신이 가시에 걸려 있을 수도 있다고! 가만히 있는다고 해결되는 일은 없단 말이야!”
이그린은 아서의 환상을 깨트리기로 했다.
“아서, 여긴 모두가 경쟁자야.”
“갑자기 무슨 소리야?”
“다들 자기 일족 부흥이라는 사명을 가지고 온 종족의 대표들이라고.”
아서가 답답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건데?”
“왜 아무도 널 도와주지 않는 건지 아직도 모르겠어?”
아서, 내 정의로운 친구.
이그린은 진심으로 그를 안타깝게 보았다.
“경쟁자를 알아서 치워준 거잖아.”
“…뭐?”
“나만 아니면 돼. 잘 숨어서 버티면 경쟁자가 사라져. 이기려고 용을 쓸 필요도 없지. 가만히만 있어도 되니까.”
아서의 얼굴이 충격에 물들었다.
이그린은 그 얼굴을 애써 외면하며 진실을 들춰냈다.
“이제 알겠어, 아서? 널 도와줄 존재는 없어.”
그 말이 선고처럼 떨어지며.
“컷!”
토드 감독이 크게 외쳤다.
그는 잠시 스크린을 보더니 턱을 문질렀다. 카메라 감독과 이야기를 나눈 그는 배우들을 보고 말했다.
“씬 62 한 번 더 갑시다.”
배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로도 비슷한 상황이 계속 반복됐다.
“컷, 한 번 더-.”
“다시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거 같은데, 한 번 더 찍어 보죠.”
“컷, 다시….”
슬레이트에 적힌 테이크 숫자가 두 자리가 되고, 앞자리 숫자가 2가 되었을 때 토드 감독이 휴식을 선언했다.
“잠깐 쉬고 다시 갑시다.”
헤레이즈의 안색이 파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