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0화. 명사수, 아니면 배우 (15)
“헤레이즈, 괜찮아?”
도현이 뚜껑을 뜯지 않은 새 생수 한 병을 넘겨주며 물었다. 자연스럽게 이를 건네받은 헤레이즈가 목이 타는지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단숨에 물을 반절 넘게 비운 그는 숨을 토해냈다.
“마사지 예약했으니까 괜찮겠지.”
“내일 말고 지금 말이야.”
예술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 으레 그렇듯 토드 감독 또한 한 가지 독특한 부분이 있었는데, 그의 경우에는 완벽주의였다.
평소에는 무난히 굴다가도 한 가지에 꽂히면 도통 타협할 줄을 몰랐다. 정말 사소한 것 하나에도 그랬는데, 눈을 깜빡이는 타이밍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NG를 낸 적이 있을 정도였다.
그가 한번 발동이 걸린 날은 그 장면 하나를 종일 찍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일전에 헤레이즈의 액션 연기 장면이 그러했고, 오늘이 그랬다.
‘괜찮으려나.’
NG가 많이 나면 배우는 지친다.
체력도 문제지만, 무엇보다 계속되는 실패에 움츠러드는 자신감이 문제였다. 아무리 자존감 넘치는 배우라 한들, NG가 스무 번을 넘어가기 시작하면 조금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스스로 느끼는 압박도 심할 테고.
걱정스럽게 응시하니 헤레이즈가 묘한 표정으로 도현을 보았다. 그는 미간을 좁히다가, 문득 때에 맞지 않게 웃었다.
“왜 웃어?”
“네가 타고나긴 했구나 싶어서.”
“뭐?”
문맥을 알 수 없는 말에 도현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헤레이즈는 매니저이자 어머니인 여성의 보살핌을 살뜰히 받는 신시아를 보다가, 다시금 도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여상한 물음이 흘러나왔다.
“이 촬영장에서 감독님 눈에 걸리지 않은 사람은 너밖에 없는 거 알고 있어?”
다른 이가 한 말이었다면, 자신의 위로가 기만처럼 들렸나 싶어서 당황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헤레이즈였다.
을 찍을 때, 도현은 루카 하퍼가 세상에서 제일 단단하고 자기애로 넘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물론 루카 하퍼는 자존감이 높다. 그녀는 마치 꽃이 만개한 단단한 나무와도 같았다.
반면 헤레이즈는 흐르는 구름 같았다. 때론 구름으로, 빗방울로, 웅덩이로, 바다로 변화무쌍하게 모습을 바꾸지만, 그것이 바로 그의 강점이다.
강인함이란, 너른 나무의 단단함만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너한텐 다섯 손가락을 넘어가지 않는 NG가 당연하겠지만, 나한테는 이게 당연해.”
차분하고, 어느 정도는 심드렁한 말투였는데 도현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이 멍해졌다.
“몇 번을 더해도 상관없어. 그래서 감독님이, 관객들이 만족할 만한 영상이 나온다면. 오히려 그렇게 해서 부족함이 채워지면 감사하지. 이게 내 방법이야.”
헤레이즈는 쉽게 말했지만, 그 내용까지 가벼이 들리진 않았다.
문득 헤레이즈가 어린 나이에 너무 대단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캐스팅 명단이 공개되었을 당시에 사람들은 하나같이 도현을 걱정했다. 캐스팅 관련한 인종 이슈 때문이었다. 사실은 도현조차도 그의 일에만 매몰되어 있었다.
이제야 보였다.
헤레이즈가 아서 역할을 맡고 나서 얼마나 많은 부담감과 책임감을 느껴왔는지. 그리고 결국엔 자신만의 답을 찾아냈다는 사실도.
‘부끄러워.’
내가 뭔데 그를 이렇게 걱정한단 말인가.
뭐라도 된 듯이 그를 살피고, 마음에 상처라도 입었을까 안달 낸 게 무척 부끄럽고 민망했다. 도현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시야 안에 백금발과 청회안이 선명하게 박혔다.
아, 입술 사이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헤레이즈는 맥이 아니었다.
“…왜 말이 없어?”
도현이 침묵하자 헤레이즈가 미간을 찌푸렸다. 괜히 오버해서 말했나, 하는 후회가 그의 얼굴 위로 스쳐 지나갔다.
“아니야. 그냥 잘 자란 거 같아서.”
“뭐?”
청회안이 황당함에 물들었다.
“너, 내가 더 나이 많은 건 알지?”
“고작 한 살 차이잖아. 헤레이즈, 한국에선 그런 사람을 보고 꼰대라고 해.”
“하아?”
그의 어이가 가출하는 게 실시간으로 보였다. 도현은 더욱 뻔뻔한 낯을 했다. 지금 중요한 건 오만함에 대한 사과가 아니었다.
“혹시, 네 방법에 동료의 의견을 참고하는 것도 있어?”
도현의 말에 헤레이즈의 눈빛이 바뀌었다.
“…네가 보기엔 뭐가 문젠데?”
검은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 * *
도현과 헤레이즈가 토론을 시작하자, 신시아도 쪼르르 달려와 합류했다. 세 배우는 의기투합해서 열정적으로 의견을 나눴다.
쉬라고 놔뒀더니 일하는 어린 배우들에 토드 감독은 잠시 어이없는 표정을 짓다가, 살래살래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입가에는 숨길 수 없는 흐뭇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날 촬영은 세 번의 추가 촬영 끝에 마무리됐다. 도현은 곧장 기숙사로 향했고, 헤레이즈와 신시아는 마사지 숍으로 배송되었다.
도현은 그날 잠들지 않고 침대 위에서 눈만 깜빡였다. 휴의 고른 숨소리와 호숫가의 새소리, 그리고 시계 초침 소리가 엇박자를 그렸다.
그러다 번쩍, 깜깜했던 방에 환한 빛이 번졌다. 도현의 핸드폰 화면이 켜지면서 생긴 빛이었다.
도현은 놀라지도 않고 태연하게 핸드폰을 확인했다.
[헤레이즈 아이데 : 지금 내 방 올 수 있어?]
나보고 미친놈이라더니.
다음부터 놀리면 똑같이 돌려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눈동자를 반짝였다.
* * *
“아서 연기가 갈수록 좋아지는데?”
모니터링을 하던 토드 감독이 기분 좋게 말했다. 대기할 때 쉬라고 둔 의자에 앉은 도현도 웃었다.
헤레이즈는 조금 핼쑥한 낯으로 따라 웃었다. 툭 치면 풀썩 쓰러질 거 같은 가녀린 미소였다.
“도현, 너 요즘 기분 좋아 보인다?”
“그래요?”
“응, 나 몰래 혼자만 맛있는 거 먹고 다니는 거 아니지?”
오스카가 장난스레 물었다.
도현은 재밌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웃었다.
“체중 관리 해야죠. 지금 골격근량과 체지방률이 제일 좋아서, 변동이 생기면 곤란해요.”
“독하다, 독해.”
괜히 장난쳤다가 본전도 못 찾은 오스카가 혀를 내둘렀다.
다른 집 매니저들은 스타들 관리하느라 허리가 휜다는데, 이쪽은 뭐, 알아서 체지방률 소수점 자리까지 관리하니 할 일이 없었다.
“그렇게 신경 쓰면 스트레스는 안 받아?”
동그란 눈이 오스카를 향했다.
깜빡, 순진하게 팔락이는 속눈썹 아래 검은 눈동자가 때마침 조명의 빛을 받아 투명하게 빛났다.
“배역에 더 가까워진다고 생각하면 설레는데요.”
“…….”
오스카는 자신을 칭찬했다. 하마터면 변태라고 말할 뻔했기 때문이었다.
‘안 되지, 안 돼.’
열심히 하는 내 아티스트를 변태라고 매도한다니. 매니저로서 할 말은 아니었다.
“아, 다시 촬영 시작하네요.”
…근데 틀린 말은 아니지 않나?
오스카가 심각한 고민에 빠진 사이, 촬영이 시작되었다.
토드 감독의 발동이 걸렸던 날로부터 꽤 시간이 흘렀다. 당연히 촬영도 진척이 있었다.
이그린과 다투고 나온 아서는 홀로 나무 안을 헤매었다. 이그린도, 다른 아이들도 무척 실망스러웠다. 한동안 정처 없이 걷던 아서는 결심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면 혼자서라도 하겠다고.
그는 밤중에 방을 나서는 계획을 세웠다. 감시하는 이그린 몰래 나가는 건 정말 힘들었지만, 아무튼 성공해 냈다.
그렇게 며칠.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아서는 회의에 빠졌다. 너무 무식하게 돌아다녔나. 이제라도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나.
아서는 스스로 똑똑하지 않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이그린에게 도움을 청하자니 자존심이 상했다. 무엇보다 그는 아직 그녀에게 감정이 상한 상태였다.
결국 아서는 그날 밤도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 …밖으로, 나갔어?
수상한 두 인형이 나무 밖으로 나가는 장면을 포착하고 두 눈을 부릅떴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아서는 그대로 뒷걸음질 쳐, 방으로 달려갔다. 다급히 문을 열고 자고 있던 이그린을 거칠게 흔들었다. 깜짝 놀라며 깬 이그린은 누가 봐도 밖에 나갔다 온 아서의 몰골을 보고 기겁했다.
- 제발, 이그린. 화내지 말고 내 말부터 들어줘!
아서는 이그린이 화내기 전에 재빨리 말했다.
- 나, 수상한 이들을 봤어. 그들이 나무 밖으로 나가는 것도!
“…아서, 솔직히 말해. 헛것을 본 거 아니야?”
장서관에 틀어박혀 양피지 더미에 파묻힌 이그린이 힘없이 말했다. 마찬가지로 며칠 사이에 폐인이 되어버린 아서가 책상에 파묻었던 고개를 들었다.
두 눈이 해골처럼 퀭했다.
“진짜로 봤어. 정말이야. 아마도….”
“아마도는 왜 붙어?”
이그린이 아서에게 양피지를 던졌다. 넋 나간 아서는 그걸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맞았다. 얼굴에 부딪힌 양피지가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아서는 붉어진 이마를 문지르다가, 바닥에 떨어진 양피지를 주웠다. 이그린이 무어라 말하는 걸 한쪽 귀로 흘려 넘긴 아서는 문득 양피지 한구석에 그려진 그림에 시선을 빼앗겼다.
“픽시?”
아주 오래전에 그려진 듯 흐릿한 그림은 분명, 그들이 첫 번째 증명을 치를 때 동굴에서 보았던 동물이었다.
신성한 동물, 픽시.
아서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픽시는 아서의 마음속 송곳 같은 존재였다.
잠을 자다가도 가끔 쇠사슬에 묶인 채 구슬프게 울던 붉은 새가 생각나면 눈을 번쩍 떴다.
구해줘야 하는데.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픽시가 떠오를 때면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콕콕 찌르는 듯한 통증도 느껴졌다. 자신의 무력함이 답답했다.
“픽시라고?”
이그린도 흥미를 보였다.
그녀 또한 동굴에서 보았던 신성한 새를 잊지 않았다. 사실은 아서 몰래 장서관을 드나들며 픽시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기도 했다. 그녀 또한 픽시에게 마음의 빚을 진 채였다.
“이 그림, 픽시가 분명해. …근데 뭐라고 써진 거지?”
“비켜봐.”
이그린이 양피지를 빼앗았다.
그녀는 아서와 달리 꼬부랑거리는 고대어를 능숙하게 읽었다. 바쁘게 움직이던 눈동자가 이내 확장되었다.
아서가 안달했다.
“왜? 뭐라 쓰여 있는데 그래?”
“…모든 주술에는 매개체가 존재한다. 나무에 걸린 결계 또한 마찬가지다. 다만, 보통 주술이 사물을 매개체로 삼는 것과 달리 이 주술의 매개체는 살아 있는 생명이다. 아직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는 알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세 신성한 동물이 가진 힘에 그 비밀이 숨겨져 있음은 확실하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휙! 이그린이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얼빵한 낯을 향해 새된 목소리로 외쳤다.
“우린 봤잖아. 픽시가 쇠사슬에 묶여 있는걸!”
아서가 무언갈 말하기도 전에 이그린이 흥분하여 말을 쏟아냈다.
“아서 우더. 네가 잘못 본 게 아니었어! 정말로 누군가 결계 밖으로 나간 거야! 결계를 유지하는 매개체인 픽시가 쇠사슬에 구속되어 있어서 결계에 문제가 생긴 거라고!”
아서의 눈이 점점 커지다가, 완전히 이해했을 땐 경악이 스며들었다.
“자격을 잃은 길잡이 후보가 없는 것도, 정령이 ‘규칙은 지켜졌다’라고 말한 것도 그래서야! 범인은 외부인이니까!”
마지막 말은 거의 억눌린 비명처럼 튀어나왔다.
진실의 파편을 발견한 두 소년 소녀의 시선이 얽혀드는 것을 마지막으로.
“컷! OK!”
토드 감독의 목소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