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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역부터 월드스타-581화 (582/582)

제581화. 명사수, 아니면 배우 (16)

“레디, 액션!”

아서와 이그린이 우당탕탕 수사물을 찍을 때, 르옌은 평소와 다름없이 고요한 생활을 보냈다. 르옌과 대련하던 호르헤가 바닥에 드러누워 숨을 골랐다.

가슴이 부풀었다가 내려간다. 땀과 흙먼지가 엉킨 머리카락은 이마 위에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었다.

르옌이 호르헤에게 손을 내밀었다. 몇 번 더 숨을 고르던 소년은 그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활 쏘시려고요?”

등 뒤에서 활을 꺼내는 르옌에 호르헤가 물었다. 르옌은 가볍게 수긍했다. 단숨에 활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호르헤가 눈을 깜빡였다. 아주 짧은 찰나였다. 그러나 다시금 정면을 보았을 때, 화살은 과녁의 중앙을 꿰뚫은 채였다.

르옌 누바라의 화살은 빗나가는 법이 없다.

그건 꽤 오래전부터 그를 봐온 호르헤가 성립한 명제였으며, 때로 그를 의아하게 만드는 부분이기도 했다.

누바라족은 축복 덕에 강력한 힘을 지녔지만, 그들이 뛰어난 것은 주술과 창술이었다. 그런데 그 후계자인 르옌이 단검과 활을 주로 쓰는 건 조금 독특했다.

일전의 수업에서 창을 아무렇게나 쥐고 상대를 농락하던 모습을 보면 창술 또한 뛰어난 거 같은데….

“계속 거기서 구경할 건가?”

“아, 들어가야죠. 구슬이랑 오붓한 시간을 보내야 해서.”

실리아족의 후보가 가시에 걸린 이후로 시간이 흘렀다. 길잡이 후보들은 점차 비극에서 눈을 돌리고 구슬에 집중했다.

호르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요즘 매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구슬을 들고 씨름했다. 구슬에 새겨진 숫자가 줄어들수록 초조함은 더해졌다.

미간을 좁히던 호르헤가 물었다.

“르옌 님은요?”

“조금 더 있다가 갈게.”

그는 호르헤를 쳐다보지 않고 대답했다. 휘익, 바람을 사납게 가르는 소리와 함께 또 다른 과녁이 중심을 꿰뚫렸다.

“물론 생각해 둔 게 있으시겠지만.”

세 번째 시위를 메기던 르옌이 그를 쳐다보자, 호르헤가 눈매를 가늘게 휘었다.

“너무 늦게 시험을 치르진 마세요. 걱정되니까요.”

르옌이 일축했다.

“불필요해.”

“네, 네. 그렇겠죠.”

호르헤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 먼저 들어갈게요. 너무 늦지 않게 오세요. 뭐어, 하실 일이 있다면 어쩔 수 없지만.”

뱀 아니랄까, 호르헤는 충성스럽게 굴면서도 틈만 나면 르옌을 떠보려고 굴었다.

르옌은 호르헤가 자신이 가시나무 범인인지, 아닌지 궁금해하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수고를 들인 적은 없었다.

호르헤는 매정하다며 우는 시늉을 하다가, 르옌이 상대해 주지 않자 터덜터덜 연무장에서 나갔다.

르옌은 다시 세 번째 시위를 걸었다.

푸드덕, 나무에 앉아 있던 새가 위로 날아올랐다. 바람이 터져 나오며 화살이 과녁보다 더 높은 곳을 향해 날았다. 높이 비상하려는 새를 따라잡고, 단숨에 목을 꿰뚫었다.

투둑. 그대로 절명한 새가 나무 아래로 추락했다.

터벅터벅 걸어간 르옌은 하늘을 비상하는 대신 땅 먼지를 묻힌 새에게 손을 뻗었다. 아직 식지 않은 몸체나 부드러운 깃털엔 관심을 주지 않고, 그대로 화살을 뽑았다.

새가 풀밭에 축 늘어졌다.

동시에.

“컷! OK!”

컷 사인이 울렸다.

“한 번에 성공할 줄이야.”

스태프들은 놀란 눈으로 정확하게 목이 꿰뚫린 새 모양 인형을 보았다. 목 안에 넣어두었던 가짜 피 덕에 더 진짜 같았다.

에서 위험한 장면에 등장하는 모든 동물은 인형이나 CG였다. 촬영 과정에서 일어나는 동물 학대에 대한 비난이 거세어지는 분위기기도 했고, 주연들이 어린 배우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방금 촬영한 장면 같은 경우, 나무에서 새가 날아오르는 장면까지는 새 훈련사와 함께 따로 촬영된 것을 쓰며, 새가 화살에 맞고 추락하는 부분은 인형이었다.

본래 후자는 CG로 진행하려 했으나, 첫날 도현의 양궁 실력을 본 토드 감독이 해볼 수 있겠냐며 제안했다.

새라고 해도 모양만 새일 뿐 쏘기 전까지는 허공에 고정된, 정지한 물체였다. 도현은 당연히 해보겠다고 했다.

실패해도 문제 될 건 없었다.

활을 쏜 이후의 장면부터 CG 작업을 하면 되니까.

그래서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하는 심정으로 준비된 새 인형은 톡톡히 제값을 했다.

모두가 경탄의 시선으로 보자 도현이 민망하게 볼을 긁적였다.

‘과녁의 중앙이 더 면적이 좁은데.’

정중앙에 날리는 건 익숙해진 사람들이 가만히 있는 인형을 맞혔다고 놀라는 걸 보니 기분이 미묘했다. 역시 사람은 시각에 약한 동물이라는 걸까.

“명사수네, 명사수야.”

데이먼은 끊임없이 감탄했다.

그는 이러다가 어느 날 올림픽에 국가 대표로 나와 있는 거 아니냐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도현은 더욱 민망해졌다.

“그 정도는 아니에요.”

“아니야. 내가 보기엔 가능성 있어. 너 양궁 가르쳐 주시는 분이 별말 안 하던?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그건….”

수업이 없는 날 양궁장에 가서 홀로 연습하다가, 벤치에 앉아서 쉬는 강사를 본 적이 있었다.

도현은 그에게 인사하려 다가갔고, 그를 부르기 전, 정수리 너머로 스치듯 화면에 뜬 검색어를 보았다.

[배우 국가 대표 겸직], [양궁 국가 대표 선발 규정], [이도현 양궁], [이도현은 왜 배우를….].

“…말은, 안 하셨어요.”

말은 안 했다. 말은.

도현은 강사가 자신을 호시탐탐한 시선으로 보았던 기억을 애써 밀어냈다.

‘…그래도 뿌듯하네.’

도현은 다시금 결심했다.

언젠가는 제게 주어진 연기를 모두 자신이 해내겠다고. 그것이 액션이든, 춤이든, 연주이든….

뭐든 간에.

“다음 장면 촬영 들어갑시다!”

“네!”

소년이 활짝 웃었다.

* * *

“레디, 액션!”

밤공기가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화살에 매달린 핏물을 성의 없이 털어낸 소년이 나무에 기대어 앉았다.

어깨 위로 흘러내린 은발이 바람결에 흔들렸다. 그 사이로 드러난 이마는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고, 우아한 검은 눈동자는 비스듬히 아래를 향했다.

손안에는 황금빛을 흩뿌리는 구슬이 들려 있었다. 계속 쥐고 있던 탓에 미진한 온기가 유리 표면에 감돈다.

다른 후보들이 구슬을 가지고 씨름하는 동안, 르옌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생각날 때마다 그것을 꺼내어 지금처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그것도 그만둬야겠지.

구슬 안의 금빛 기운이 유리잔에 담긴 술처럼 출렁이기 시작했다. 미약했던 파동은 곧 걷잡을 수 없이 거세어졌다.

빛이 점점 환해지며, 검은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물든 것 같은 착시가 일었다.

-파직.

작은 균열의 소리가 들렸다.

아주 미세하고, 조그마한.

완전한 균열이 되기 전의 미약한 비틀림.

정령의 말대로라면 저 구슬이 깨지기 전에 엉망으로 꼬인 기운을 풀고, 그것을 안전히 빼내야 한다.

정해진 길을 따라서.

“…증명의 조건은.”

누바라의 후계자라는 건 만천하의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위대한 자를 뜻했다. 길잡이의 증명을 치르고 아버지에게서 수장의 자리를 계승 받고 나면, 세상은 그의 수중에 들어온다.

그 미래를 의심해 본 적은 없다.

영광과 빛, 축복과 명예, 넘쳐흐르는 황금과 권력, 그 모든 게 따를 것이다. 소년은 걷는 걸 멈출 생각이 없었다. 다만….

챙-!

날카로운 파공음이 울리며 유리가 산산이 조각났다. 르옌은 차분한 낯으로 손아귀를 더 세게 말아쥐었다. 유리 조각은 형체도 남기지 못하고 금모래처럼 부서져 내렸다.

금빛 기운이 허공으로 부유했다.

르옌은 검은 동공을 수축하며 며칠 전의 일을 떠올렸다.

구슬이 깨졌다.

호르헤가 크게 동요하며 입술을 짓씹었다.

그때였다.

산산이 조각나며 안개처럼 퍼져나간 기운은 어느 순간 다시 한 점으로 모였다. 호르헤의 손에 들린 건 깨지기 전의 모습 그대로인 구슬이었다.

호르헤는 허탈한 숨을 뱉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이 이거였냐며, 구슬이 알아서 복원된다는 걸 알려주지 않은 걸 보니 정령의 성격도 꼬인 거 같다고 뱀 혀를 식식댔다.

그 순간, 르옌은 깨달았다.

모든 주술에는 매개체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구슬과 금빛 기운, 둘 중 무엇이 매개체인가.

소년은 다시 생각했다.

둘 중에 매개체가 있을까?

르옌이 손을 뻗었다.

도망치려는 기운을 잡아챘다.

흩어지려는 걸 묶고, 벗어나려는 걸 가두고, 사라지려는 걸 속박했다. 그리하여 자유롭게 유영하던 금빛 무리가 손바닥에 스며들 때까지.

이윽고 빛이 잦아들었다.

아무것도 없이 깨끗한 손을 몇 번 쥐었다 펴다가 고개를 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정령이 희미하게 일렁였다.

올이 가는 머리카락이 발치까지 길게 늘어졌다. 본디 찬란해야 할 금빛 머리채는 흐릿했다. 문지르면 금방 밤과 동화되어 흩어질 거 같았다.

“구슬을 깨트리지 말 것. 기운을 모두 구슬 밖으로 빼낼 것. 지정일 안에 해낼 것.”

르옌은 제 신체 어딘가에 정령이 걸어두었을 주술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것을 역으로 발동했다. 손 위로 구슬이 생겨났다.

안이 텅 빈, 평범한 유리구슬이었다.

애초에 매개체는 후보들이었으니.

본디 생명체는 매개체가 되지 못한다. 그게 보통의 상식이었다.

하지만 르옌 누바라는 알고 있었다. 그 안에 별의 조각을 가진 존재들은 예외성을 지닌다는 것을.

머릿속에 정령의 음성이 울렸다.

- 증명은 이루어졌습니다. 그 또한 그대의 길일 터.

정령은 그대로 사라졌다.

다시금 홀로 남은 소년이 나무에 머리를 기댔다.

생각대로 두 번째 증명을 통과했음에도 그 얼굴에 즐거움이나 기쁨 같은 감정은 없었다. 오히려 소년은 후회하는 듯한 기색으로, 혼란을 느끼는 아이처럼 눈썹을 찌푸렸다.

스스슷, 밤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며 소리를 내었다. 차게 내려앉은 바람은 소년을 지나쳐, 풀밭에 아무렇게나 나동그라진 새의 핏방울을 말렸다.

그 위로 두 개의 긴 그림자가 졌다. 가죽을 덧댄 신발 아래 풀잎이 무참히 밟혔다. 나무 아래서 눈을 감고 있던 르옌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르옌 누바라.”

어둠 속에서 세 쌍의 시선이 마주쳤다.

* * *

스태프들이 바삐 움직이며 조명을 정리했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도현은 문득 저를 빤히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다.

“신시아?”

그의 부름에도 신시아는 말을 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를 가만히 응시할 뿐이었다.

“왜 그래, 신시아?”

“수상해.”

“뭐가?”

“르옌이랑 아서.”

나랑 헤레이즈가 수상하다고?

도현이 눈만 끔뻑이는데, 신시아가 그런 도현의 주변을 빙빙 돌았다. 나름대로 심각해 보이는 모습이라 도현은 입을 다물고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신시아는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도현이 묻고 나서야 신시아는 이상 행동의 이유를 말해주었다.

“아서가 르옌을 닮아가고 있어.”

“무슨….”

도현은 말하다 말고 멈칫했다.

헤레이즈는 모로 보나 도현과 닮지 않았다. 생긴 것부터 시작해서 성격까지도. 그렇다면 신시아가 닮았다고 하는 건….

“연기 말하는 거야?”

“으응.”

“아, 그거였구나.”

도현은 그제야 풀린 의문에 시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마찬가지로 환복하고 온 헤레이즈가 옆에 다가와 물었다.

“무슨 얘기 중이야?”

“신시아가 너랑 내가 이상하대.”

“뭐? 넌 그렇다 쳐도 난 왜?”

도현은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헤레이즈는 당당하게 그 시선을 받아쳤다.

결국 한숨을 내쉰 건 도현이었다.

“…너랑 내 연기가 닮았다고.”

“아.”

단숨에 이해한 헤레이즈가 탄식했다. 누가 봐도 무언가 있는 거 같은 모습에 신시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도현은 그녀의 기분이 상하기 전에 재빨리 말했다.

“밤마다 같이 연습해서 그래.”

“밤마다?”

“응. 내가 헤레이즈 방에 찾아가고 있거든.”

“왜?”

“더 잘 연기하고 싶어서?”

“나는?”

그 말엔 헤레이즈가 답했다.

“넌 여자 기숙사잖아.”

딱 도현이 하고 싶은 말이었다.

그러나 신시아는 쉬이 수긍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무언가 고심하는 듯하던 그녀는 어느 순간 입을 열었고.

“그럼 기숙사가 아니면 돼?”

두 소년의 입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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