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어느 정도 멤버들 간의 통성명도 끝나고 연습이 시작되었다.
“그럼 연습 시작하자. 케이도 자리에 서고.”
한야의 말에 케이는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 휘청거리며 거울 앞에 섰다.
‘말을… 듣네?’
서도화는 의외의 모습에 놀란 눈을 하다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한야는 예전부터 연습생 누구든 무난히 잘 다뤄 이끌어주곤 했지만 그 통솔력이 마왕에게도 통할 줄은 몰랐다.
물론 케이의 표정은 썩어들어가고 있지만 어쨌든 한야의 말을 듣고 연습을 하고자 일어섰다. 어떤 방법을 썼는지 몰라도 서도화는 그 모습이 꽤나 신기했다.
그러고 보니 관심이 없어서 몰랐는데 겉모습도 많이 바뀌었다.
분명 제2세계에선 아덴과 비슷하게 튼튼한 체격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곳에서는 왜 저렇게 병약미소년 같은 이미지가 되었나.
‘이것도 핵 때문인가?’
그러나 마왕에 대한 서도화의 생각은 금방 사그라들었다. 사실 이세계에서 왔다는 공통점만 있을 뿐 서도화는 마왕의 빠진 근육과 지방을 고민할 정도로 그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서도화와 아덴, 케이, 그리고 막내인 주상현까지 자리에 서자 한야의 주도 아래 연습이 시작되었다.
“우선 어제 연습했던 곡 마무리까지 해보자. 도화는 눈치껏 따라 하고. 할 수 있지?”
“네.”
“와 드디어 곡 하나 떼네. 거의 일주일 붙들고 있지 않았어요?”
“좀 느리더라도 완벽히 익히는 게 좋으니까. 보컬도 곡을 제대로 이해하고 불러야 감정이 잘 잡힌다잖아.”
유제이 엔터에서의 연습은 데스티니와는 다르게 굉장히 자유롭고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데스티니 엔터에선 연습 시작과 동시에 트레이너 이외엔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워낙 연습생 군기 잡는 데에 빡센 곳이었고 지켜보는 눈도 많아 연습 시작과 동시에 월말 평가 못지않은 기준이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이곳처럼 대화하며 연습하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서도화가 멤버들의 동작을 따라 할 생각으로 대충 몸을 풀고 있을 때 주상현이 말을 걸어왔다.
“도화 형은 이미 연습하셨을 수도 있어요. 요즘 많이들 커버하는 곡이라서요. 형 체인에어 선배님의 아로하 아세요? 저희 연습곡인데.”
주상현이 서도화에게 가사가 적힌 종이를 건네주었다.
“어, 알지.”
그렇게 어렵지 않은 곡이라 오디션 보러 다니기 전에 많이 연습했었다.
날마다 노래, 랩 할 것 없이 외워놔서 어느 파트도 무난히 부르고 춤출 수 있다.
별생각 없이 대답하며 가사를 한번 훑고 다시 내려놓았을 때 갑자기 주상현이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형이라도 알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어?”
형이라도? 서도화가 주상현을 바라보았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건 무슨 소리며 어째서 주상현은 뜬금없이 세상 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걸까.
“혹시 누구 파트 외우셨어요? 역시 메인? 혹시 형, 안무도 다 외웠어요?”
“아무 파트나 괜찮아. 안무도 외웠어. 빈 파트가 어디야?”
“그걸… 다 외웠어요? 아로하 멤버별로 안무 엄청 달라지는데? 정말요?”
도대체 왜지? 서도화가 말을 할수록 주상현의 눈에는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감동이 차오르고 있었다.
서도화의 착각인지는 모르겠는데 조금 신나 보이는 것도 같았다.
‘왜 저래?’
곡 안무를 알고 있냐고 물어서 알고 있다고 대답한 것뿐인데.
서도화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주저하고 있는 사이 한야가 슬쩍 대화에 끼어들었다.
“도화는 데스티니에서도 안무 잘 뜨기로 유명했어. 월말 평가 있으면 팀 파트 전부 외워서 연습생 지도도 맡았을 정도였거든.”
서도화의 완벽주의적이거나 강박적인 연습량에 짜증을 내는 팀원도 있었지만 덕분에 서도화의 팀은 언제나 좋은 점수를 받았고 한야도 그 덕을 본 인원 중 하나였다.
“어 도화 형 보컬로 들어온 거 아니었어요? 우리 팀 댄서는 있어도 보컬이 약해서 섭외해온 줄 알았는데.”
데스티니의 서도화가 노래 잘 부르는 건 데스티니를 포함한 수많은 기획사 연습생들 사이에서 무척 유명한 이야기였다.
보컬 실력만 유독 부각되었던 터라 댄스는 기껏해야 중상급 정도로 생각하고 있던 주상현이다.
감동을 넘어서 이젠 부담스러울 정도로 눈을 반짝이는 주상현의 말에 서도화는 민망해하며 고개를 저었다.
“잘 못 해. 잘하지 못하니까 더 열심히 연습한 거야.”
그는 스스로 자기객관화가 몹시 잘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그래도 노래는 특출나게 잘 부르는 거 인정한다.
그래서 제2세계에서도 음유시인이라는 직업을 택했고 그 당시 시스템이 측정하기를 서도화의 노래 레벨은 노력할 필요 없이 만렙이었기에 보컬 실력에 대해선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춤은, 솔직히 못 추는 건 아니지만 천재적으로 재능이 있는 다른 연습생들, 이를테면 주상현과 같은 멤버와 비교하면 평범했다.
못하면 연습하는 모습이라도 제대로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매번 모든 파트를 외워갔었다.
그게 플러스요인이 되어 트레이너들에게 꽤 예쁨 받았고 연습생들에겐 시기의 대상이 되었다.
“정말요? 하, 그렇구나……망하… 법은 없구나.”
“뭐?”
“아니에요. 형…….”
얼버무리는 주상현을 서도화가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아까부터 도대체 왜 저렇게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불안하게.
“그럼 도화 형은 남은 포지션 맡아주세요. 춤이든 노래든 이렇게 다섯이서는 맞춰본 적 없지만 일단 한번 해보고 조정하면 되니까.”
“어.”
주상현이 서도화를 연습실 중앙으로 데려와 가운데에 세웠고 곧바로 연습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한 시간, 두 시간. 연습이 진행되어갈수록 서도화의 표정은 애매하게 바뀌었다.
‘설마 우리끼리만 연습하나?’
눈치가 보여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지만 무척 당황스러웠다.
그도 그럴 게 아무리 그래도 회사 소속 연습생들의 연습인데 이 분위기는 뭐라고 해야 할까…….
정식으로 계약해 들어온 연습생들이라기보단 고등학교 축제 장기자랑 준비하는 느낌이었다.
긴장감이라곤 전혀 없는 허술한 분위기.
일단 기본적으로 연습생들을 케어해주는 직원들이 있기는 한데 전혀 연습에 간섭하지 않고 그냥 지켜보거나 음악을 대신 틀어주는 게 고작이었다.
거기다 트레이너는 어디 가고 목 풀기, 몸풀기는 한야가, 아로하 안무 연습 지도는 댄스에 일가견이 있는 주상현이 하고 있는가.
이래서야 나중에 보컬 지도는 서도화가 할 것 같은 느낌이다.
‘트레이너 선생님은 언제 오는 거지?’
서도화가 슬쩍 문을 바라보자 그를 발견한 직원 중 하나가 머쓱하게 말했다.
“선생님 곧 오실 거야. 좀 많이 늦으신대. 걱정 마.”
“아…네.”
심지어 지각하는 트레이너라고?
“…….”
아, 아니다. 너무 안 좋게 생각하지 말자. 이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들지만 일단 아직 첫날도 경험해보지 않았으니.
알 건 다 아는 한야와 주상현이 굳이 이 회사에 머무는 건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과연 데뷔를 할 수 있는 걸까?
몸풀기가 끝났을 때쯤 드디어 트레이너가 연습실로 들어왔다.
“오오, 처음 보는 얼굴이네? 안녕. 몸풀기 중이야?”
“안녕하십니까!”
트레이너는 서도화를 힐끔거리곤 거울 앞으로 향했다. 차림새만 봐도 댄스 트레이너로 보이는 남자.
그는 서도화를 모르지만 서도화는 그가 누군지 알고 있다.
그는 유행할만한 킬링 안무를 잘 만들기로 소문난 안무가이자 데스티니 엔터 소속 백업 댄서로 활동 중인 테리라는 사람이다.
“통성명부터 할까? 서도화?”
트레이너 테리는 음악을 끈 뒤 서도화를 보며 무턱대고 인상을 찌푸렸다. 딱 봐도 서도화를 께름칙해 하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서도화는 그러려니 했다.
‘소문을 들었나 보네.’
서도화가 데스티니에서 해고당한 걸, 또 그 사유를 들은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저 트레이너에게 잘 보일 생각은 빠르게 버리는 편이 낫다.
연락 두절에 잠수라니 태도부터 글러먹은 연습생을 어떤 트레이너가 좋아해 줄까.
서도화는 그의 표정을 모른 척한 채 인사했다.
“네, 안녕하십니까.”
“말은 많이 들었다. 너 닉네임이 데스티니 기대주였잖아.”
비아냥이 잔뜩 낀 억양이었다.
“왔어요? 오늘 좀 늦은 거 아니에요?”
그때 마침 연습실을 나갔던 김유진과 직원 몇 명이 다시 들어와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응?”
그녀는 곧바로 연습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연습이 진행되고 있을 상황, 트레이너가 한참이나 늦었단 소식에 항의할 겸 서도화의 첫 연습도 볼 겸 연습실로 왔더니 이게 무슨 상황이람.
음악은 켜져 있지도 않았고 연습생들은 굳은 채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부족한 시간을 잘 활용해 연습생들을 교육해야 할 트레이너는 서도화와 사뭇 심각한 얼굴로 대화 중이었다.
딱 봐도 서도화와 통성명 중이거나 반가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테리 씨가 도화에 대한 소문을 들은 모양입니다. 대표님.”
매니저 이병수가 아슬아슬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속닥였다. 대충 상황을 파악한 김유진이 푹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어린애한테 저런 거 그만하라니까.”
연습생 중에서도 도드라지게 이름을 날리던 서도화이기에 데스티니와의 일로 그에게 반감이 있는 사람은 생각보다 정말 많다.
심지어 그를 캐스팅한 유제이 엔터테인먼트 내에서조차 서도화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부터 그 소문의 연습생을 가르쳐야 할 데스티니 소속 댄서는 오죽할까.
김유진은 한숨을 쉬며 곁에 있던 직원에게 말했다.
“저번에 고정 트레이너 알아보라고 했던 건 아직이에요? 최대한 빨리 섭외해보죠.”
한편 장난치듯 능글거리듯 비아냥거리는 트레이너의 말에 서도화는 말이 없었다.
아니 뭐, 기대주였던 것도 사실이고 비아냥 당할 만한 짓을 한 것도 맞으니 할 말이 없다.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서도화 입장에서는 ‘네, 전부 제 잘못입니다.’ 하는 수긍의 행동이었지만 그 행동이 자신을 무시한 것이라고 오해한 트레이너의 인상은 더욱 험악해졌다.
“데스티니에서 트레이너 말에 재깍재깍 대답하라는 가르침도 안 배웠어?”
“죄송합니다.”
“일단 서도화는 오디션 보고 들어온 것도 아니니까 직접 한번 봐야 어떻게 가르칠지 알 것 같은데. 한번 볼까?”
연습생들이 조마조마한 얼굴로 서도화를 쳐다보았다.
잘해도 칭찬이 나올 리 없는 이 살벌한 분위기에서 혼자 춤추고 노래 부르라니.
심지어 서도화는 이 소속사에 온 후 처음으로 자신의 실력을 드러내는 자리였다.
부끄러움이 문제가 아니고 몹시 부담스러운 분위기일 텐데.
그러나 서도화는 곧바로 연습실 한가운데로 자리를 옮겼다.
“네, 알겠습니다.”
전형적인 괴롭힘이었다. 그리고 서도화는 클리셰적인 괴롭힘에 꽤나 익숙했다.
기죽고 상처받고 부담이고 뭐고 그런 거 없다. 적진 한가운데서도 치료를 위해 뜬금없이 하프를 켜고 노래를 부르던 그다.
전장에서 바로 옆의 사람이 죽어 나가도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불러야 했는데 누군가 지켜보는 데에 부담이고 부끄러움이고 그런 게 어디 있겠는가.
행실이 나쁜 이미지면 뻔뻔하게 실력이라도 좋아야지.
일단 저 트레이너에게 인정받는 게 먼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