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그럴 리가. 서도화는 다정한 한야가 그들을 걷어찼다는 말만큼이나 그의 말을 납득할 수 없었다.
아덴과 케이가 일반인 말을 고분고분하게 듣는다니, 이세계에서만 해도 세상에서 제일 말을 안 듣는 걸로 투톱을 달리던 놈들이?
마왕과 용사가 남의 말을 듣는 놈들이었다면 그 세계는 정말로 평화로웠을 것이라고 그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때 연습 중이던 아덴이 움찔거리더니 서도화에게 다가와 소곤거렸다.
“도화, 이곳에도 무서운 인간이 있었어.”
“뭐?”
아덴의 안색은 예전 마카파로 마을 술집의 지하세계 두목 출신 주인(훗날 동료가 되었다)을 만났을 때만큼 파리해져 있었다.
“저 형, 정강이 힘이.”
서도화는 아덴의 말 또한 이해하지 못했다.
“암만 일반인 힘이 강해 봐야 너만 할까. 네가 뭐가 아프겠냐.”
그의 말에 아덴은 멈칫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심각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여기서 할 말은 아니지만 나 아직 마나가-”
“아덴.”
한야가 아덴의 말을 끊고 점잖게 미소를 지었다.
“게임 얘기는 숙소 가서 하자. 나중에 들어온 도화보다 안무 습득력 떨어지는 주제에 쉬고 있어? 연습해야지. 일어나 얼른.”
“네…….”
아덴이 터덜터덜 일어나 한야와 연습실 중앙으로 향했다.
“…….”
서도화가 멍하니 한야를 바라보았다.
‘주제에’라고 했다.
그는 한야가 저런 표현을 쓰는 걸 처음 보았다.
그러나 곧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완전히 벽에 기댔다.
‘어지간히 속 썩였겠어?’
그 다정한 한야도 참기 힘들 만큼 시비 트고 다닐 놈들이다. 저 두 놈들은.
멍하니 아덴을 구경하고 있는 서도화에게 주상현이 다시 한번 소곤거렸다.
“아덴 형이랑 케이 형 머물 곳도 없이 무작정 해외에서 왔대요. 그래서 그런지 쫓아낸다고 하면 열심히 해요.”
유제이의 사람들은 이미 아덴과 케이를 다루는 방법을 무척 잘 알고 있었다.
* * *
한편 유제이 엔터 대표실에선 김유진과 매니저, 트레이너 간의 심각한 논의가 오가고 있었다.
“테리 씨가 보기에 케이는 아직 부족하다는 말씀이시죠?”
“부족한 수준이 아니라 이대로 나가면 욕먹죠.”
“하아……. 다섯 명 다 나갈 수 있으면 좋겠는데.”
트레이너 테리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욕심이고요. 서도화야 예전 회사에서부터 잘하던 놈이니까 대표님께서 주변 압력만 잘 견디시면 올려보낼 수 있겠지만 케이는 기본적으로 실력이 없어요. 아예.”
“대신 비주얼이 좋잖아요.”
“에이, 대표님 비주얼도 초반에만 먹히지 무슨. 비주얼로 관심받고 실력에 태도 불량까지 묶어서 욕먹는 거 보고 싶으면 내보내시던가요.”
테리의 말에 김유진의 한숨이 더욱 짙어졌다.
이번에 팝넷에서 론칭한다는 연습생 서바이벌 프로그램 <밀리언 아이돌>.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연습생들을 내보내 보려 했다.
연습생 수가 적은 만큼, 되도록 다섯 명 모두를 내보내고 싶었지만…….
그리 녹록지 않은 상황이었다.
주상현은 이미 경연 프로그램 경험이 있고 탄탄한 팬층이 있으니 출연 확정 이후엔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한야는 춤이든 보컬이든 평균 이상은 하는 데다 특유의 어른스러움과 자상함, 리더십 등 대중에게 어필할 만한 매력이 충분히 있었다.
아덴도 싸가지는 없지만 한야가 있으니 그럭저럭 탄탄한 체력을 바탕으로 한 노력형 이미지로 둔갑시킬 수 있을 것이다.
서도화는 말수가 없는 게 걱정이긴 해도 실력도 탄탄할뿐더러 비주얼적으로도 스타성으로도 기대해볼 만했다.
하지만 케이는.
“케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데뷔시키기엔 실력이 엉망이고 무작정 내보내기엔 비주얼이 너무 아깝다.
도대체 어쩜 몇 달을 봐도 볼 때마다 숨 막히게 잘생길 수 있는지, 심지어 서도화를 내보내라며 태도 불량에 대해 민감하게 굴던 직원들조차 케이만은 미련하게 잡고 있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나중에 따로 데뷔시키자니……. 데뷔도 시기가 있는 법인데.”
올해 케이의 나이는 18살, 데뷔시키기 적절한 나이다. 만약 지금 있는 멤버들을 데뷔시켜 자리 잡게 만들고 다시 연습생을 뽑아 케이가 소속될 그룹을 만들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만약 유제이가 자본만 충분했다면 고민은 무슨, 어떻게든 붙잡고 개조시켜 넥스트 아티스트로 데뷔시켰을 터인데.
“내가 걔에 대해 아는 건 없지만 아마 해외교포 중에서도 재벌 3세쯤 되는 놈일 거예요. 재벌 3세 새끼들이 죄다 저렇게 싸가지가 없거든.”
“…일단 알겠습니다. 고민 좀 해볼게요.”
“케이 꼭 데뷔시켜야겠습니까? 얼굴 써먹고 싶으면 차라리 모델로 가보던가요. 뭐, 모델도 얼굴만 가지고 하는 일이 아니지만.”
테리의 말이 심해지자 결국 가만히 듣고 있던 이병수가 그를 제지했다.
“말 너무 심하게 하지 마시고요. 아무튼 들어가 보세요.”
테리는 뭐든 너무 날 서게 말하는 게 문제였다. 그는 김유진의 머뭇거림이 몹시 답답한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대표실을 나섰다.
“뭐, 대표님 알아서 하세요. 저는 돈 받고 애들 가르치는 사람이니까, 어쨌든 케이도 최선을 다해서 가르칠 겁니다.”
* * *
다음 날 아침.
“하.”
서도화가 짐을 내려놓고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이런 건물 오랜만이네.’
앞으로 서도화가 살게 될 연습생들의 숙소였다.
적어도 완공된 지 20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붉은 벽돌 건물, 상당히 노후된 주택이었고, 앞으로 연습생 4명과 함께 살아갈 곳이었다.
물론 연습생 다섯이 사는데 원룸은 아니고 방 하나 딸린 집이긴 하다.
‘어차피 연습생 숙소는 잠만 자는 곳이니까.’
딱히 좋은 집일 필요가 없다. 그래서 대체로 대부분의 연습생 숙소는 이런 좁고 낡은 곳이 많았다.
서도화가 짐을 들고 숙소로 올라가 초인종을 누르자 주상현이 문을 열어주었다.
“형, 오셨어요?”
“어? 응. 좋은 아침이다.”
“다들 형이랑 밥 먹고 다 같이 연습실 가려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주상현의 어색한 환대에 서도화도 어색하게 대답하며 그를 따라 숙소 안으로 향했다.
“도화.”
서도화가 거실로 들어오자 아덴이 다가와 반가움과 친밀함을 표했다.
서도화는 아덴의 부름에 대답하듯 그의 등을 툭툭 치며 내부를 둘러보았다.
숙소는 회사에서 들었던 대로 방 하나와 부엌 딸린 거실 하나의 구조였는데 짐과 가구가 테트리스 하듯 들어차 생각보다 훨씬 더 좁았다.
싱크대와 가스레인지만 겨우 있는 부엌 공간엔 크기가 맞지 않는 4인용 식탁이 들어서 있었고 거실엔 2층 침대 하나와 멤버들의 수납장, 컴퓨터와 책상, 방엔 2층 침대 하나와 수납장, 그리고 옷이 잔뜩 걸린 행거로 가득 차 있었다.
워낙 짐도 많고 가구 배치도 편의성 위주라서 깔끔하게 치워놔도 어수선하게 어질러져 보이는 그런 집이었다.
“도화 왔어?”
한야가 방에서 나와 다가왔다. 서도화가 고개를 까딱 인사하자 한야는 이리 오라 손짓했다.
“거실은 아덴이랑 상현이가 쓰고 있고 너는 방에 행거 하나 치우고 침대 들여줄 거야.”
“네.”
“아직 침대가 안 들어와서 바닥에서 자야 하는데 괜찮아?”
“괜찮아요.”
그러자 거실에 있던 아덴이 방으로 얼굴만 내민 채 말했다.
“네가 내 침대 써. 너 바닥에서 자면 다음 날 죽잖아.”
“아니, 괜찮아.”
“내일 연습 못 하는 것보단 그게 나아.”
-내일 전투에 방해되는 것보단 그게 나아.
야외에서 잘 때 아덴이 동료에게 제 잠자리를 내어주며 늘 하던 말이다. 그 말을 이 세계에서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괜찮다니까? 여긴 바닥 푹신해.”
서도화의 말에 아덴의 뒤에서 빼꼼 얼굴을 내민 주상현이 ‘응?’ 하고 의아한 소리를 냈다.
“맨바닥이 어떻게 푹신해요?”
주상현이 생각하는 바닥과 아덴, 서도화가 말하는 바닥은 다르다.
아덴과 서도화가 말하는 바닥은 돌이 잔뜩 깔린 숲속 흙바닥이나 대리석 같은 딱딱한 바닥을 말하는 것이다.
아덴은 자신은 몰라도 일반인들이 느낄 땐 이곳의 폭신한 장판 바닥이나 그 세계의 흙바닥이나 별반 다를 거 없을 거로 생각하나 보다.
“한야 형, 도화는 바닥에서 자면 다음 날 죽어요.”
그는 진심으로 서도화의 약한 몸에 대해 걱정하며 말했다.
짜증 나.
서도화가 고개를 내저었다.
바닥에서 자다가 다음날 반쯤 죽어서 일어난 건 북부의 끝 설산 동굴에서 모닥불에 의지해 노숙했을 때의 일이고.
보통 그런 데서 자고 탈 안 나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이런 장판 깔린 바닥에서 자는 거야 오히려 익숙했다.
“아덴 형이 도화 형이랑 되게 친한가 봐요? 저만 도화 형이랑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주상현이 팔자 눈썹이 된 채 말했다. 그가 보기엔 서도화, 한야, 아덴, 케이 전부 자신만 빼고 연이 있었다.
조금 소외감 느끼는 듯한 모습에 아덴이 심드렁하게 방구석 처박혀 있는 케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보다는 나아.”
한야가 주상현의 어깨를 토닥였다.
“금방 친해질 거야. 도화는 정말 자상하거든. 그러니까 이제 밥 먹자.”
주상현은 어딜 가나 사랑받는 막내라더니 정말인가보다. 이곳에서도 어지간히 깐깐한 사람들한테 사랑받는 걸 보니.
“그래 상현아, 앞으로 잘 부탁해.”
서도화는 주상현에게 다정하게 말하곤 일어나 저 멀리 스스로 고독을 택하며 구석에 박힌 케이에게 다가가 팔을 잡았다.
“무슨 짓이냐! 이거 놔라!”
아프게 잡아당긴 것도 아니고 일으켜주려고 한 건데 나름대로 아는 사이끼리 참 날카롭게도 군다.
“너도 같이 밥 먹으면서 멤버들이랑 친해지는 게 어때?”
“놔라! 난 늘 저들과 밥을 먹지 않았다! 인간들과 합석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야! 따로-”
서도화는 단호했다.
“안 돼. 밥은 같이 먹을 거야. 같은 지붕 아래 살면서 왜 그래? 지금 같이 안 먹으면 치워버릴 거야.”
멤버들이 멀뚱멀뚱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도화와 케이를 바라보았다.
그 고집 센 케이가 서도화의 손에 속절없이 끌려오고 있었다.
마치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현장을 보는 듯했다.
“그, 그렇게 싫으면 밥은 따로 먹어도…. 연습은 어차피 같이하니까요…….”
싫다며 안간힘을 쓰는 케이를 보며 주상현이 조심스레 말해도 서도화는 단호했다.
“안에서의 행동이 바깥으로 새어 나가지 않을 리 없어. 뭐든 같이 하고 좀 친해지려고 노력해야 화목한 그룹이 될 거야.”
서도화의 말에 한야도 고개를 끄덕이곤 주상현의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려주었다.
“도화 말이 맞아. 오늘부턴 케이도 같이 먹자.”
한야의 말에 아덴은 작게 한숨을 쉬곤 국을 데우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놔라! 이 음유시인 자식! 내가 핵만 있었어도!”
“쉿, 조용해. 우리 게임 이야기는 적당히 하기로 했잖아.”
“게, 게임? 네놈 무슨 말을-”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광경은 아니었다.
이상한 말을 하며 끌려오는 멤버에 똑같이 이상한 말을 하며 끌고 오는 멤버, 저들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며 가만히 지켜보는 멤버와 국이나 데우러 간 멤버.
‘이게 안 이상하다고?’
주상현은 다시 울적해지고 말았다.
‘어떻게 우리 멤버들 중 정상이 하나도 없어…….’
서도화는 그나마 자신과 같은 평범한 사람인 줄 알았더니 믿었던 서도화마저 저들과 죽이 잘 맞는다.
혹시 자신이 이상한 걸까. 원래 연예인들은 한 가지씩 독특한 구석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걸까.
그러나 주상현이 당혹스러워하든 말든 두 사람을 지켜보던 한야는 생긋 미소 지으며 서도화에게 말했다.
“아덴이 요리를 잘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