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다음 날 유제이 엔터테인먼트 연습실.
“팔꿈치 올라가는 각도가 다들 제각각이다! 거울 안 보고 대가리 없이 그냥 움직이지? 카메라 앞에서도 정면 안 보고 움직일래? 아이 씨! 케이!”
트레이너의 불호령에 서도화는 거울을 통해 케이를 살폈다. 어떤 식으로든 단체 생활을 많이 해봤던 서도화와 기존의 연습생들, 아덴과는 달리 마왕 케이는 협력, 서로 맞추어 나가는 게 무엇인지 몰랐다.
그래서 더욱 이곳에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듯했다. 그래도 협조적으로 어찌어찌 잘 따라오고는 있지만.
‘뭐, 마왕이 춤을 춘다는 거 자체가 꽤 노력한 거긴 하지.’
마왕이 춤을 춘다. 마왕이 노래를 부른다. 큰 용기와 각오 그리고 노력이 필요했다는 건 인정한다.
멤버들이 연습하는 곡은 아이돌 원크루의 하이틴.
대단한 테크닉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동작의 느낌과 박자, 쉴 새 없는 안무 동작으로 오디션 단골 곡, 연습생이라면 한 번쯤 춰본다는 곡이다.
서도화 또한 오디션을 보겠다고 집에서 연습한 적 있어 별문제 없이 금방금방 안무를 익힐 수 있었다.
거울을 통해 서도화를 본 아덴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덴은 연습생 서도화가 무척이나 신기했다. 제2세계에서야 음유시인으로서 얌전히 사람들 치료하고 기껏 해봐야 전투 중 가장 안전한 곳에 숨어 하프 띵땅거리는 모습만 봤지 이렇게 역동적인 동작을 능숙하게 춰내는 건 본 적이 없었다.
신체를 사용하는 건 서도화보다 자신이 항상 더 잘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곳에서의 서도화는 훨씬 전문적이고 난이도 높은 춤과 노래를 구사했다. 외우는 게 빠른 건 당연할 뿐더러 춤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을 잡은 아덴이 봐도 정말 실력이 좋았다.
‘몸을 저렇게 움직일 정도면 싸우기도 잘 싸웠을 텐데. 왜 안 싸웠지?’
자신이 알던 한량 친구 서도화와는 무척 다른 색다른 느낌이었다.
거울 속 케이를 지켜보던 서도화의 시선이 아덴의 눈빛을 눈치채고 옮겨갔다.
‘왜?’
눈썹을 까딱이는 서도화의 물음에 아덴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신기하네.’
서도화와 아덴, 케이의 거울 속 시선 교환을 모두 지켜본 한야가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서도화가 이곳에 온 것만으로 연습실 풍경이 이렇게 달라지다니.
케이는 이유는 몰라도 오늘은 투덜거림 없이 바로 연습을 시작해주었고 아덴은 케이에게 쓸데없이 시비를 걸지 않았다.
이런 평화로운 풍경… 한야는 아덴과 케이가 회사에 온 후 처음 보는 것이었다.
한야 뿐만이 아니었다.
‘뭐지 오늘? 진도 잘 나가네.’
트레이너 테리도, 주상현도, 매니저 이병수도, 심지어 연습실 밖에서 몰래 지켜보던 김유진마저 평화로운 연습실 풍경이 무척 의아하고 신기했다.
* * *
연습을 끝낸 연습생들이 향한 곳은 유제이 엔터테인먼트의 회의실이었다.
“한야를 통해서 전했으니 대충 무슨 일로 너희를 불렀는지는 알고 있지?”
“네!”
“팝넷에서 공문이 들어왔는데. 이번에 새로운 플롯으로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있다고 하더라고. 이건 참고하라고 보내준 건데 한번 봐봐.”
김유진이 멤버들에게 공문을 내밀었다.
[수신 : POP-NET 기획팀 허심경]
[발신 : (주)유제이 엔터테인먼트 업무 담당자]
[제목 : <대규모 라이브 프로젝트, 밀리언 아이돌> 참가자 모집의 건]
각 소속사에 한꺼번에 보낸 듯한 문서엔 이번에 새로 론칭할 경연 프로그램에 참가할 연습생을 모집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중 멤버들이 봐야 하는 부분에 친절히 형광펜이 칠해져 있었다.
모집인원 : 100팀(심사 후 개별 연락, 각 기획사 당 최대 1팀까지)
지원 자격 : 기획사의 추천을 받은 연습생들로 이루어진 그룹
우승 보상 : 데뷔 이후 2년 동안 팝넷과의 협업, 앨범 발매 및 컴백쇼 지원, 전반적인 글로벌 마케팅 지원.
“생각했던 거랑 다르네요. 팀별 참가면.”
“100팀이나 뽑아요?”
“그렇다네? 인원이 하도 많아서 한야 말처럼 플롯이 좀 달라.”
서도화는 김유진의 설명을 들으며 공문을 뜯어보았다.
일단 중요하게 봐야 하는 부분은 모집인원이 무려 100팀이라는 것.
뭘 이렇게 많이 모집하나 싶지만 아마 어그로용으로 초반에만 수를 맞춰둔 후 빠르게 탈락시켜 인원을 줄여나갈 거다.
그 후에 전 시즌에 했던 대로 숙소 생활을 하며 진행할 테지.
그리고 보상.
보상의 내용이 너무나 좋았다.
사실 상 소속사가 있는 그룹에 대한 전반적인 지원, 프로젝트 그룹과도 같은 대우를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K-POP의 인기를 견인하고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 팝넷과 협업한 그룹이면 성공길은 보장되어 있는 거나 마찬가지일 터.
그리고 또 한 가지 특이한 건 경연의 진행이 모두 실시간 스트리밍 투표 일명 ‘마음’ 점수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설명에 따르면 예선부터 파이널에 이르기까지 모든 연습생들의 공연은 팝넷의 공식 너튜브 채널과 공식 홈페이지에 실시간으로 스트리밍이 되며 공연을 하는 동안만 투표가 진행된다.
모든 참여자가 시청자들에게 자신의 공연을 편집 없이 보일 수 있지만 베네핏과 함께 예쁘게 편집된 공연을 방송에 송출할 수 있는 건 오직 TOP 5 내에 선발된 연습생뿐.
“허허.”
서도화의 입에서 의미 모를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거 글로 보기만 해도 TO P5 안에 못 들면 차별하고 굴리고 굴리고 굴려서 울고불고 난리일 장면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이런 컨셉이긴 한데.”
“100팀 중에 다섯 팀…….”
“……좀 힘들겠지만 그래도 공연 할 수 있고 너튜브에는 공연 클립 업로드도 해줄 거래!”
김유진이 한껏 띄운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다 우리가 지금 가릴 처지니? 우리가 너희 공연에 정말 온 힘을 쏟을 거니까 너무 걱정 마.”
“알아요. 대표님, 저희도 열심히 할 거예요.”
“그래그래. 한번 해보자 우리! 내가 실력 하나는 끝내주는 애들만 싹 다 뽑았으니까 우승까진 몰라도 너희 이름, 얼굴 정도는 확실히 알릴 거야.”
하지만 이번엔 늘상 긍정적이던 한야 또한 씁쓸하게 미소만 지을 뿐 맞장구쳐주지 않았다.
희망차게 이야기해봐야 현실이 그리 녹록지 않은 건 이곳의 누구라도 알고 있었다. 무려 100팀이다.
100명이서 시작한 전 시즌에서도 이름은커녕 얼굴도 제대로 기억되지 못하고 탈락한 연습생들이 많은데 하물며 100팀은 오죽할까.
그리고 말은 똑바로 해야지. 아덴은 그렇다 치고 케이를 실력 하나 보고 뽑았다는 건 너무 뻔뻔하지 않은가.
‘그래도 최선을 다하긴 하겠지만.’
서도화가 작은 한숨을 쉬었다. 팝넷은 참 가혹한 기획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내놓는다.
큰돈을 들여 좋은 무대를 만든다고 해도 수많은 팀이 참가하는 라이브 스트리밍에서 눈에 띄는 건 하늘의 별 따기 천운이 필요한 일이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의 유제이 연습생 5인은 실력 차이가 너무 극단적이었다.
정확히는, 뭔가 애매했다.
눈길을 끌 만한 화제성과 몇몇의 실력, 비주얼은 좋지만 완벽한 5인이라기엔 좀 부족했다.
거기다 화제성은 이미 한번 데뷔해 큰 인기를 끌었던 주상현뿐이고 이 또한 그룹 전체가 아닌 주상현 하나의 화제성에 국한될 뿐이다.
실력도 엄청나게 뛰어나다기엔 어폐가 있다. 프로젝트 그룹에서도 메인 댄서를 맡을 정도로 댄스에 일가견 있는 주상현과 모든 방면에서 뛰어나 데스티니 기획사의 기대주로 손꼽혔던 서도화가 있긴 하지만 그 외의 멤버들은 실력이 좋아서 캐스팅된 멤버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래도 멤버들의 절망적인 예상만큼 주상현과 서도화 외의 희망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얘들이 왜 그렇게 걱정해? 떨어져도 괜찮아. 경험이 중요한 거야. 알겠지? 걱정은 우리가 하면 돼.”
김유진은 이번 경연 프로그램에 대해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우승과 같은 과분한 결과까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얼굴을 알리기도 전에 초반 탈락이라는 생각도 안 한다.
그녀는 멤버들에 대한 가능성을 믿는다.
주상현의 존재만으로 멤버들의 라이브 스트리밍은 일단 주목받을 것이고 서도화는 방송을 타기만 하면 그에게 관심 가지는 사람이 분명히 있다고 확신한다.
한야 또한 당장 이목을 끄는 건 힘들겠지만 회차가 거듭될수록 충분히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재능이 있다.
멤버들이 걱정하는 멤버는 아덴과 케이일 텐데 김유진은 오히려 아덴과 케이가 예상외의 히든카드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입만 안 열면.’
김유진은 지금의 이야기에 흥미 없어 보이는 케이, 서도화만 보고 있는 아덴을 차례로 둘러보곤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다들 어렴풋이 알고는 있을 거로 생각하지만 포지션부터 말해줄게. 일단 서도화. 저번에도 말했듯이 메인보컬. 메인에 서는 경우가 많을 테니까 카메라 앞에 두고 연습 많이 해야 할 거야.”
서도화는 보컬 실력뿐만 아니라 댄스 실력, 겉으로 보이는 유순한 이미지, 이목을 끄는 비주얼과 끼를 갖춘 전형적인 육각형 연습생이었다.
게다가 방송을 타지 않은 신선한 페이스로 충분히 그룹을 이끌어갈 만한 능력이 되는 멤버다.
경연 프로그램이 진행될 때까지만이라도 주상현을 가운데에 세워 주상현 위주의 그룹을 만들까도 생각했었지만 그렇게 하면 처음부터 다른 멤버들은 주목받을 기회를 잃어버린다.
주상현은 어디에 둬도 눈에 띄는 멤버이니 그보단 서도화를 중심에 세우는 게 좋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리더와 서브보컬, 랩은 한야가 맡고 메인댄서는 상현이.”
“네.”
“프로젝트 그룹으로 해왔던 게 있으니 잘해줄 거라고 믿어.”
“맡겨주세요.”
“그리고 아덴이는 랩, 리드댄서.”
“……네?”
평범하게 흘러가던 회의, 김유진의 말에 멤버들은 단체로 황당한 얼굴을 했다.
서도화, 주상현, 한야가 제각각 중요한 역할을 맡을 거란 건 다들 예상하고 있었지만 아덴이 댄서 포지션 중 한 자리를 맡을 거란 건 정말 의외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덴은 케이와 더불어 안무 트레이너에게 가장 많은 지적을 받던 연습생이 아니었던가.
‘도화 형이 리드 될 줄 알았는데?’
서도화도 댄스 실력이 출중한 멤버라 주상현은 틀림없이 자신과 서도화가 댄스 멤버가 될 줄 알았다.
“누구든 내세울 만한 거 하나는 가지고 있어야지. 아덴이가 테크닉은 딸리지만 배우는 것도 조금씩 빨라지고 팔다리 길고 힘도 좋아서 보기 좋다더라. 트레이너 쌤이.”
“……테리 쌤이?”
아덴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김유진을 쳐다보았다. 테리가 누구인가. 아덴과 케이가 숨만 쉬어도 질린 표정을 하곤 인상을 구기던 사람이 아닌가.
그가 자신을 칭찬했다니 그걸 어떻게 믿겠나.
그러자 주상현이 말했다.
“맞긴 맞아요. 아덴 형 춤출 때 파워가 있어서 보는 맛이 있죠.”
그제야 아덴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칭찬하면 더 잘해.”
이 세계나 저 세계나 동료의 말은 참 의심 없이 잘 믿는 아덴이다.
“네, 형. 저희 열심히 해봐요.”
“좋아. 너희 이제 같은 팀이니까 상현이가 아덴이 많이 도와주고, 또 케이는…….”
모두의 시선이 케이에게로 쏠렸다.
도로 심각해진 김유진의 표정을 보며 서도화는 조용히 생각했다.
‘깍두기…인가.’
케이는 그들의 시선에 짜증스레 고개를 떨궜다. 모두 부족한 자신의 실력을 못 미더워하는 눈이었다.
원래의 세계에선 절대 받아본 적 없는 시선.
‘힘만 있었어도, 원래 세계였더라면 이런 수모는 결코 겪지 않았을 것을.’
하다못해 이곳에서 내세울 것 하나라도 있었더라면 이리 작아지지는 않았을 것을.
그때 김유진이 케이의 마음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케이는 우리 팀의 비주얼 담당이야.”
“어우, 인정이요.”
주상현이 서둘러 엄지를 추켜들며 연신 수긍의 말을 내뱉었다. 케이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비주얼? 그게 무엇이냐. 나에게도 맡길 수 있는 것이 있단 말이냐?”
“……그게 뭐냐니. 비주얼 담당의 뜻을 모른다는 말이야?”
출신이 영어권은 아닌가 보다…….
이미 오래전 마왕에게 정신 세뇌를 당한 직원 및 멤버들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한 채 그냥 수긍하고 넘겨버렸다.
김유진은 순간 마왕의 세뇌조차 뚫고 강렬한 막막함을 느꼈지만 잘 참아내고 케이의 얼굴을 손으로 가리켰다.
“얼굴 담당이라는 거지. ……그리고 서브보컬.”
김유진이 스치듯 빠르게 덧붙였다.
“무슨 뜻이냐. 얼굴 담당은 한야가-”
“한야가 아니고 한야 형.”
서도화가 재빨리 말을 정정해주었다. 케이는 서도화를 노려보면서도 순순히 말을 바꾸었다.
“…한야 형이 아니더냐. 그가 리더니까.”
원래 하나의 무리가 생기면 그곳의 수장이 무리를 대표하는 얼굴이 됨은 아이도 아는 당연한 사실이다.
그런데 왜 한야가 아닌 자신을 얼굴 담당으로 쓰는가.
잠시 고민하던 케이의 눈이 갑작스레 번뜩이며 사정없이 구겨졌다.
“설마 날… 리더 대역으로 쓰겠다는 말이냐!”
위험할 때 대신 죽는 역, 버리는 패를 맡으라는 말이 아닌가!
날 선 말투로 소리치는 케이를 보며 서도화의 입술이 비틀렸다. 서도화는 한숨을 푹 쉬더니 케이의 어깨에 손을 올려 토닥였다.
“그 더러운 손 치워라! 음유시인! 네놈의 술수-”
“케이야, 지금은 장난칠 상황이 아닌 것 같아. 안 그래? 대표님, 얘가 좀 먼 외국에서 와서 비주얼 담당이라는 뜻을 잘 이해 못 해서 그래요. 제가 나중에 제대로 설명할게요.”
“어? 어어, 그래. 하하, 도화가 있으니까 편하네. 일일이 설명 안 해줘도 되고! 케이야, 나중에 도화가 설명해주겠지만 절대 나쁜 뜻 아니고 오히려 좋은 뜻이야.”
“형이 우리 중에 제일 잘생겼다는 말이에요!”
“도화야, 말 나온 김에 케이 저 말투도 좀 어떻게 안 되겠니?”
“닥쳐라 마왕, 이제 슬슬 적응하고 배워. 대가리가 텅텅 비었냐? 생각이랑 상황 파악이라는 걸 좀 해.”
“아덴! 너도 어른 앞에서 말조심 좀 안 해?”
또 유제이 엔터에 소란이 일었다.
난장판이다.
주상현이 다시 울적해졌다.
‘역시 다들 좀 이상해… 다….’
“아무튼 나는 오히려 초반엔 케이가 유리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
“저도 사실 그렇게 생각해요.”
한야가 김유진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체적으로 유제이 연습생들의 외모는 상향평준화 되어 있지만 그중에서도 케이는 압도적인 비주얼을 자랑했다.
무대가 진행되는 경연 프로그램에서 케이의 외모는 순식간에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것이다.
대형에서 그가 어디에 서 있든 원샷만 한번 받을 수 있다면 외모만으로도 화제성은 충분히 당겨올 수 있을 테지. 물론 입을 다물어야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