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물론 장기적으로 봤을 땐 지금의 케이에게는 결코 좋은 관심은 아닐 거지만.”
“네.”
“케이가 나쁜 건 아니지만 말투나 너무 경계하는 성격은 어떻게든 고쳤으면 좋겠어. 네가 아이돌을 목표로 하는 이상.”
“내 꿈은 세계정-”
“케이.”
“……알았다.”
김유진이 케이를 달래듯 미소 지었다.
“조금이라도 너에게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그대로 너를 아껴주고 응원해 주는 팬이 되었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야.”
그런 김유진을 안심시키듯 서도화가 말했다.
“걱정 마세요. 저희가 잘 말해둘게요.”
“그럼 다들 출연해서 열심히 해보는 걸로. 됐지? 상현이도 됐지?”
“네.”
회의에 들어오기 전까지 하고 싶지 않아 하는 티가 나던 주상현은 기획 내용을 보고 안심한 표정이었다.
“그룹 결성해서 나가는 거라면 안 나갈 이유가 없어요. 데뷔에 가까워졌다는 걸 팬들에게 보여줄 수 있잖아요.”
“고맙다. 자신이 없거나 두려워도 군말 없이 최선을 다해줬으면 좋겠다. 내가 너희한테 사활을 걸었듯이 너희들도 죽을 기세로 열심히 해줬으면 좋겠어. 미안하지만 이게 우리가 데뷔 전 인지도 쌓을 마지막 기회야.”
그리고, 서도화에게도 마지막 기회였다.
대형기획사를 시작으로 오갈 때 없는 서도화에게 유일하게 열린 데뷔길.
이제는 누군가에게 발목 잡힐 새도 없고 자신의 실력에 좌절할 새도 없다. 그저 죽을 각오로 열심히 해볼 생각이었다.
멤버들이 각자의 각오를 다졌다.
김유진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일단 얘들아. 지원서부터 넣을까?”
“아.”
그러고 보니 그룹이 어쩌고 하기 전에 지원서부터 통과되는 게 먼저였다.
* * *
여느 대형기획사나 이름있는 중견기획사들은 경연 프로그램이 론칭될 때마다 미리 소속 연습생들이 들어갈 자리를 맡아놓는다. 하지만 유제이 엔터와 같은 소형, 중소기획사들은 참가를 원한다면 그를 위한 참가 지원 영상부터 만들어야 했다.
“괜찮은 아이디어 있으신 분?”
김유진의 물음에 선뜻 의견을 내는 직원은 없었다.
아니, 의견 내기가 부담스러웠다.
지원서를 넣을 수백, 수천의 작은 기획사들과 경쟁해 몇 개 안 되는 자리를 따내야 하는 상황에 누가 선뜻 의견을 낼까.
아무리 화제성과 인기를 갖춘 주상현이 있다고 해도 그룹만의 매력이 없다면 PD의 눈에 들기는 무척 어렵다.
“흐음.”
작은 기획사 데뷔조는 이게 문제다.
컨셉 잡고 거기에 부합하는 멤버를 뽑기엔 인원이 부족하니 일단 재능 있는 개개인을 뽑고 나서 컨셉을 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
각 멤버들만의 고유 매력은 분명히 있지만 그들이 뭉쳤을 때 느낄 수 있는 그룹만의 매력이 무엇인지, 장점은 무엇인지 찾는 게 정말 큰 숙제였다.
특히 정해진 컨셉도, 편곡도 없이 커버곡으로 영상을 찍어야 할 땐 더더욱.
고민하는 침묵의 시간.
직원들과 함께 멤버들 또한 고민에 빠졌다.
편곡도 안 되는 커버 영상으로 수백은 될 지원자들을 제치고 출연권을 따낼 만한 영상. 그런 게 뭐가 있을까?
모두가 책상만 내려다보며 고민할 때 아덴은 서도화를 바라보았다.
“도화.”
원래의 세계에서 답이 없는 일로 동료들이 고심할 때 언제나 해답을 내놓는 건 서도화였다.
서도화, 그와 다른 동료들의 가장 큰 다른 점을 말하자면 그는 귀찮음이 많고 딱히 올곧지 않다는 것이었다.
영웅답게 뭐든 정직하고 심성이 곧고 대의를 위해 세상을 구하는 동료들 사이에서 서도화는 늘 쉬운 길, 편한 길, 안전한 길을 찾았다.
그래서 늘 하이넬과 동료들에게 한심한 취급을 받곤 했지만 그렇기에 동료들이 생각하지 못한 지름길, 보다 효과적인 해답을 귀찮고 힘들어서 찾아내곤 했다.
하이넬은 그런 서도화의 모습을 개같다고 표현했지만 어쨌든 동료들은 이것저것 의견을 나눈 뒤 그래도 답이 나지 않을 때 서도화에게 물었다.
“넌 어때?”하고.
그리고 지금, 동료라고 할 수 있는 직원, 멤버들이 적절한 의견을 내지 못하는 상황.
그래서 아덴은 아까부터 심각해 보이는 서도화에게 물었다.
“넌 어때?”
이번에도 좋은 길을 알려주지 않을까 하고.
아덴의 말에 직원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서도화에게로 향했다.
“어?”
생각지도 못하게 의견을 말해야 할 분위기가 되었다.
서도화는 갑작스레 주목받아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민망스레 웃으며 짧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딱히 생각나는 건 없어서.”
그래서 말을 안 하고 있었긴 한데.
그러나 아까부터 말하고 싶어 입이 간질거리는 건 있었다.
‘의견은 아니지만.’
그냥 그는 기왕 주목받은 김에 과감히 말했다.
“……애초에 큰 연출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연습실에서 찍는 건데 그 정도로 매력적인 영상이 있어요?”
“어?”
아무리 잘 찍어봐야 얼굴도 잘 안 보이는 거리에서 의상만 갖추고 찍은 커버 영상일 뿐이다.
“PD님이 보기에만 매력 있어 보이면 되는 거 아니에요?”
어차피 PD가 보는 영상이니 PD의 입맛에만 맞추면 되는데 굳이 독특하게 하고 최선을 다해서 실력 어필하고 그러지 않아도 되는 거 아닌가?
애초에 PD도 그리 대단한 거 기대하고 보지는 않을 거다.
아무튼 그룹만의 개성은 합격한 뒤에 대중 앞에서 보여주면 되는 거고.
그렇다면 팝넷PD의 입맛은 무슨 입맛인가.
서도화가 입을 열기도 전에 김유진이 먼저 말했다.
“상업적인 매력.”
돈 되는 거.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거. 화제가 될 만한 거.
굳이 독특하고 잘하는 걸 지금 당장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
그럼 팝넷이 생각하기에 가장 입맛에 맞는 모범적인 아이돌은 누구일까.
직원들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김유진이 뜬금없이 주상현을 보며 웃었고 서도화가 말했다.
“유니드 곡으로 하는 건 어떨까요?”
팝넷이 입맛대로 직접 만든 프로젝트 아이돌, 주상현이 소속되어 있기도 했던 그룹, 바로 유니드다.
김유진이 시원스레 말했다.
“좋아 그럼 유니드 곡으로 하고 병수 씨 애들 선곡 뭐 했는지 오늘 안에 빨리 정해서 저한테 보고해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파트 분배는 제가 할 테니까 일단 이틀 안에 안무 외우도록 테리 쌤한테 전달하세요. 테리쌤 레슨 끝나도 상현이가 멤버들 지도 좀 해주고.”
“예!”
상업적인 거. 김유진의 전문 분야였다.
김유진은 데스티니 엔터 대표의 대학교 후배였지만 그 덕에 회사의 중요한 직책을 맡았던 건 아니었다.
그는 당당하게 입사 시험을 통과해 입사했고 밑바닥부터 실력을 쌓아 기획팀 팀장의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런고로 김유진은 상업적인 기획, 아이돌을 잘 팔리도록 포장하는 기술 하나는 기가 막혔다.
김유진은 단순한 안무, 보컬 영상에 들어갈 작은 디테일들을 생각하며 씨익 웃었다.
조금 쇼를 할 생각이다.
* * *
“대리님 추가로 들어온 지원 영상 옮겨놨어요.”
“나? 나한테?”
팝넷 밀리언 아이돌팀 오대준 PD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을 가리켰다.
아직 봐야 하는 지원 영상이 산더미인데 또 추가로 들어왔단다.
“아니 대한민국에 기획사가 이렇게 많아?”
참 헛웃음밖에 안 나온다.
벌써 밤 10시다.
직원 세 명이 나눠서 영상을 보고 있는데도 끝이 안 나고 그렇다고 들어오는 영상 퀄이 볼 만한가 하면 또 그것도 아니었다.
분명 기획사가 있다는데 고등학교 축제 장기자랑 느낌 낭낭한 연습생들이 참 많고 방송에 선보일만하겠다 싶은 그룹은 극소수의 그나마 이름 좀 안다 싶은 회사 연습생들이었다.
춤추고 노래하는 영상이 이렇게 지루한 줄 오대준은 처음 알았다.
“아오 시발. 짬 안 찬 게 죄지. 죄야.”
그는 투덜거리며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아 헤드셋을 꼈다.
그러곤 새 영상의 제목을 확인했다.
[유제이 엔터테인먼트]
“유제이? 여긴 또 어디야. 아 또 신생이야?”
보기 전부터 오대준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신생 기획사에서 보내온 지원 영상은 대체로 보기 겁이 난다.
오대준이 한숨을 크게 쉬자 옆에서 똑같이 지루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지원 영상을 검토 중이던 PD가 획 말했다.
“유제이 거기에요. 김유진 회사.”
“엉? 누구?”
김유진? 오대준은 김유진이 누구였더라 생각하다 눈을 크게 키우며 물었다.
“유진 씨 회사 차렸어? 데스티니 김 팀장 말하는 거 맞지.”
“예예. 작년에 차렸다던데요. 나가면서 괜찮은 애들 좀 데려갔다던데 좀 기대해봐도 되지 않아요?”
“아.”
오대준은 금방 심드렁해졌다.
“유진 씨 왜 그랬대. 아까운 짓을 했네.”
김유진은 업계에서 보는 눈 하나는 기가 막힌 사람으로 소문이 자자하지만 그래도 작은 기획사에 큰 기대는 안 한다.
대형 기획사와 작은 기획사의 차이는 사람의 차이가 아닌 들어오는 인재 풀과 투자되는 자본 규모의 차이라고 생각하기에.
“좋은 애들 누구-”
느긋하게 영상을 켜던 오대준의 말이 뚝 멎었다.
그는 입을 연 그대로 굳어서 영상 속 인물을 바라보았다.
-케이, 카메라 켰어?
-잠시 기다려라. ……켜진 거 맞나?
“아니 뭐 저렇게 잘생겼어?”
오대준이 저도 모르게 말했다.
회사가 워낙 작아 카메라를 켜줄 스태프조차 없는지 직접 촬영 버튼을 누른 연습생.
그는 카메라가 켜졌는지 모르고 한참이나 화면 앞에 머물렀다.
그 때문에 오대준은 그가 서성대는 시간만큼 화면에 가득 들어찬 케이의 얼굴만을 보고 있어야 했다.
“이야, 역대급인데?”
오대준은 일부러 옆자리 들으라는 듯 크게 말했다.
원래라면 자기소개까지 전부 넘겨버리고 곡 커버 파트부터 봤을 텐데 이번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잘생겨도 너무 잘생겼기 때문이다.
“왜요. 뭐가 역대급인데요. ……와 얘는 진짜 잘생겼네.”
오대준은 호들갑을 듣고 고개를 쭉 뺀 옆자리 PD가 감탄하며 일어나 오대준의 뒤에 섰다.
수많은 연예인들을 보며 일하는 PD들마저도 한 멤버의 외모만으로 관심이 갈 정도로 케이란 멤버의 비주얼은 장난이 아니었다.
“얘 방송에 나오면 난리 나겠다. 그치?”
“예, 안 봐도 뻔하죠 뭐.”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켜졌어. 켜졌어.
-빨리 돌아와.
케이를 기다리다 지친 듯한 멤버들이 그를 불러들였다. 드디어 케이가 화면에서 비켜서고 멤버 전체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야~ 여기 애들!”
PD들은 다시 한번 감탄사를 내뱉었다.
케이란 멤버만 넘사벽으로 잘생긴 줄 알았더니 멤버들이 하나같이 비주얼이 좋다.
특히 케이와 붉은 머리의 사납게 생긴 연습생, 그리고 가운데에 선 순하게 생긴 연습생.
케이의 비주얼에 먼저 관심이 갔기 때문일까? 화면상 얼굴도 잘 안 보이는 거리에 있는 연습생들의 얼굴로 자꾸 시선이 갔다.
“역시 유진 씨 보는 눈이 있네요. 가운데 애는 완전 데스티니 상이네. 어?”
뒤에서 팔짱을 낀 채 말하던 PD가 놀라며 연습생 중 누군가를 가리켰다.
“얘 주상현이 아니에요?”
“……어우, 야 끝났는데?”
뒤늦게 주상현을 발견한 오대준이 크으, 손뼉을 쳤다.
김유진이 데려갔다던 괜찮은 애가 주상현이었을 줄이야.
시작도 전에 반은 먹고 들어갔다.
영상 속 연습생들은 겨우 자기소개할 준비가 되었는지 자세를 바로 했다.
-하나, 둘, 셋.
-안녕하세요. 저희는 유제이 엔터테인먼트 연습생…….
그들은 차례대로 자신의 이름을 호명하고 커버할 노래 제목을 밝힌 뒤 공연을 시작했다.
곡은 유니드의 서스펜스.
“주상현은 본인 노래를 가지고 왔네.”
오대준은 낄낄거리면서도 영상에 집중했다. 괜찮은 비주얼, 알맞은 선곡에 잘하는 걸 아는 연습생까지 있으니 꽤 관심 있게 볼만했다.
이 정도면 실력이 중타만 쳐도 통과시킬 만한데. 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