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김유진은 케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창백한 인상과 팔랑팔랑 힘없어 보이는 팔과 다리.
‘아크로바틱은커녕…….’
달리기도 제대로 못 할 것 같은데…….
그러다 고개를 저었다.
‘아냐, 뭐든 직접 보고 판단해야지!’
“그래! 한번 해봐. 트레이너 선생님한테 한번 보여드려. 너무 위험하게 무리하지는 말고.”
“무리? 허!”
툭. 서도화가 마왕의 옆구리를 쳤다. 마왕은 서도화를 노려보다 마지못해 힘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어? 어 그래. 착하다.”
“얘네가 아크로바틱이 되면 좀 낫죠.”
테리가 거들먹거리며 말했다.
“상현이나 도화는 뭐, 못해도 며칠 내에 알아서 되게 만들어 올 애들이고 퍼포먼스 난이도를 확 올릴 수 있어요.”
“그럼 테리 씨가 조금 있다 애들 한번 봐주세요.”
“네, 거참. 무기력하고 근육 하나 없는 놈이 텀블링은 어떻게 잘하냐?”
서도화는 케이를 향한 테리의 시비를 모른 체하고 말을 이었다.
“가능하다면 아크로바틱에, 마침 저희 춤 잘 추는 멤버는 많으니까 댄서들을 적극 활용한 퍼포먼스 위주 그룹을 정체성으로 잡는 게 어떨까요.”
물론 재정 상황이 괜찮다면.
서도화의 말에 김유진은 미련 없이 노트북을 덮었다.
“오, 괜찮은 생각이네!”
처음부터 멤버들과 함께 컨셉에 대해 논의하면 좋았을 것인데.
멤버들이 정말 아크로바틱에 자신 있다면 스토리 작가까지 고용하여 만든 판타지적 세계관에 무척 잘 어울리는 안무를 한계 없이 뽑아낼 수 있을 테지.
물론 김유진의 빚은 늘어나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대표님.”
한야가 손을 들었다.
“그래 한야야 왜?”
“저희 그럼 이렇게 팀으로 데뷔하게 되는 거 맞나요?”
“그래 맞아.”
“그럼 컨셉, 멤버, 차후 스케줄까지 정해진 것 같은데 그룹명은 당연히 정해졌겠죠?”
“아, 그룹명…….”
힘차게 대답한 김유진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직원들도 갑자기 허공을 보며 고민 많은 얼굴이었다.
“아직. 좋은 이름 지어내려 하다 보니 시간이 좀 걸리네.”
“후보명 같은 것도 없어요?”
주상현의 물음에 김유진의 곁에 앉아 있던 직원이 다시 노트북을 켰다.
“있긴 한데 영……. 정해지면 알려줄게. 일단 후보명이라도 볼래?”
직원이 노트북을 돌려 후보명을 보여주었다.
1. Cosmos [코스모]
2. 트루바드
3. Win throne [윈스론]
4. Kfive [케이파이브]
5. 사사오입
6. 펜타스틱
이, 이게 뭐야!
후보명을 천천히 읽어내려가던 멤버들은 창백해졌다.
“진짜로 이게 후보명 명단에 올라온 이름이라고요?”
“어째서요?”
“진심이세요?”
“그, 그래서 내가 아직 안 정해졌다고 했잖아. 너희한테 이런 이름으로 나가라고 하겠니?”
물론 나쁘지 않은 이름도 있었다. 그러나 인사 등등을 하며 입으로 발음했을 때 그리 예쁘지 않은 이름투성이.
거기다 왜 후보군에 있는지 이해 자체가 안 되는 이름도 있었다.
그러나 심각한 이들 사이 유일하게 잃었던 미소를 되찾은 자가 있었으니.
“나는 좋다. 케이파이브란 그룹 이름, 마음에 드는군.”
“……그거… 자동차 이름… 아니 총…….”
“날 위해 지은 소중한 이름이 아닌가.”
“……아. ‘케이’ 파이브라고?”
케이는 무척 설레하고 있었다. 그가 이 세계로 온 이후 처음으로 눈이 반짝였다.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길드 이름이라니. 마치 부하를 거느리는 마왕으로 돌아온 듯했다.
“나는 케이파이브가 좋다.”
“저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누가 봐도 촌스러워서 말문 막힌 거 안보이냐?”
아덴의 짜증스러운 말에 케이가 정색하며 그를 노려보았다.
“촌스…럽다고? 네 녀석 지금 내 이름이 촌스럽다고 했는가?”
“그럼 안 촌스러워? 차라리 위에 있는 트루바드가 훨씬 낫다.”
또다시 아덴과 케이의 다툼이 시작된 사이 서도화는 허망하게 그룹 이름 후보들을 바라보았다.
“둘 다 이상해…… 다 이상하다고.”
사사오입(넷 이하는 버리고 다섯 이상은 반올림)은 뭔데. 한 사람이라도 빼면 4명이니까 망한다는 뜻인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올린 이름인데. 어떤 놈이지. 제정신인가?
“그만!!!”
김유진이 목소리를 높이고서야 케이와 아덴의 말싸움은 끝이 났다.
“그렇게 서두를 필요 없어.”
“촬영이 코앞인데요?”
“괜찮아. 서두른다고 이상한 이름으로 짓는 거보단 훨씬 나아. 그리고 어차피 이번 방송에선 그룹 이름 안 나와. 나와봐야 너희 탈락할 때나 마지막 회차쯤에 나오지.”
“네? 왜요? 이름이 안 나오면 어떻게 해요?”
“방송 컨셉이야. 관리도 쉽고 대중들이 기억하기도 쉽게 번호로 불린대. 1번 그룹, 2번 그룹 이런 식으로.”
“……와 진짜 악독하다. 초반에 탈락하는 그룹은 그룹 이름 한번 못 알리고 가겠네요.”
주상현이 어이없어 혀를 내둘렀다. 팝넷이야 원래 연습생들 괴롭히며 상품 취급하는 걸 좋아했지만 열심히 무대를 준비한 사람들이 고유의 이름조차 못 불리게 하는 건 가혹하지 않은가.
모두 씁쓸함에 잠겨있을 때 케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다들 말이 없지? 별것 아니다.”
“뭐?”
“번호로 불리는 것뿐 사람이 바뀌는 게 아니다. 공연만 잘하면 그들은 알아서 우리의 이름을 알고 싶어 할 터.”
김유진과 직원들, 멤버 모두가 경악한 얼굴로 케이를 바라보았다.
케이가 웬일로… 바른말을?
“맞는 말이에요.”
주상현이 말했다.
“케이 형 말대로 우리가 어떻게 불리든 지금 당장은 상관없잖아요. 우리도 그룹 이름에 큰 애착이 없는데.”
“맞아. 중요한 건 무대랑 멤버 하나하나 잊지 못하도록 강한 인상 심어주는 거니까.”
김유진이 케이와 주상현에게 동조하며 말했다. 두 사람을 필두로 모두가 그의 말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그래! 케이의 말대로 그룹명을 못 알린다느니 이런 생각 하지 말고 대중들이 너희 이름을 궁금해할 만큼 멋지게 준비해보자!”
“네!”
처음으로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동조하자 영문 모르는 표정이던 케이가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와 쑥스러운 듯 헛기침을 했다.
“맞다. 나도 수많은 부하들의 이름을 외울 수 없어 번호로 불렀지만 그중 유독 실력이 좋은 녀석들의 이름은 굳이 물어보곤 했다. 그들은 이름을 물으면 몹시 영광스러워했지.”
모처럼 신이 난 케이에게 아덴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라는 거야.”
* * *
“아, 하아…….”
회의가 끝난 직후 트레이너 테리는 막막한 표정으로 연습실 문을 바라보았다.
‘퇴근하고 싶다.’
한야, 주상현, 서도화는 확신이 가는 연습생들이다.
자신이 만약, 아니 절대 하지는 않겠지만 이 소속사의 고정 트레이너였다면 열정을 가지고 가르쳤을 정도로 실력과 잠재력이 충분한 연습생이었다.
그러나 아덴과 케이, 그들은 글쎄.
얼굴만 잘생겼다 뿐이지 딱히 열정도 없어 보이고 끼는 있지만 기본기가 부족해도 너무 부족하다. 솔직히 아직 데뷔는 너무 이른 느낌이었다.
그나마 최근 아덴은 서도화가 온 직후 그럭저럭 협조적으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틈만 나면 케이와 시비에 싸움박질이고, 케이는 뭐….
‘실력도 없는 게 자존심만 세지. 할 의욕은 전혀 없고.’
“아이고, 무슨 서바이벌 프로야 서바이벌은……. 예선에서 안 떨어지면 다행이지.”
그나마 주상현이 출연했던 전 시즌 경연처럼 연습생 개인별 경쟁이면 몇몇은 그나마 가능성 있겠지만 이번엔 그룹 경쟁이라 한두 명이라도 못하면 끝장이다.
“괜히 한 그룹으로 묶어선, 잘하는 애들까지 끌어내리잖아.”
잘생긴 게 벼슬이다~
테리는 투덜투덜 중얼거리며 연습실 문을 열었다.
“어?”
그리고 낯선 광경에 저도 모르게 움직임을 멈췄다.
“하나, 둘, 셋, 넷! 아니 아니, 그렇게가 아니라 허리 집어넣어요!”
“…이, 이렇게 말인가?”
“그래! 이야, 잘하시잖아요! 하니까 그렇게 잘하잖아요!”
케이가 가장 앞줄에서 적극적으로 주상현의 동작을 따라 하고 있었다.
“야아… 너네 웬일이냐? 케이. 무슨 일로 오늘은 그렇게 열심히 해?”
테리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연습실에 들어섰다.
레슨이 시작되면 항상 케이는 뒷줄 구석에서 하는 둥 마는 둥 설렁설렁 따라 하고 말아 결국 한 소리 듣는 게 원래의 레퍼토리였다.
‘경연 프로그램한다고 멤버들이 갈궜나?’
그렇다기엔 케이는 놀랍게도 불만도 없어 보였고 굉장히 열심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멤버들이 뭐라 한다고 태도를 바꿀 녀석이 아니었다.
“쟤 왜 저러냐?”
테리가 거울을 등지고 지도 중인 주상현에게 묻자 주상현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아, 케이 형요? 도화 형이 말 잘 들으면 그룹 이름 케이파이브로 부탁해보겠다고 했거든요.”
“……케이파이브? 진짜?”
테리가 있는 대로 인상을 구기며 묻자 주상현이 힐끔 케이의 눈치를 보고 테리에게 속삭였다.
“저희 연습은 제대로 해야 하니까 일단은요.”
구슬린 거구나. 어쩐지 갑자기 적극적이더라니.
“너네도 참 유쾌하게 노네.”
테리는 풉 웃곤 주상현을 연습생들 사이로 보냈다.
“자, 그럼 레슨 시작할 건데 그 전에.”
테리가 아덴과 케이를 가리키며 앞으로 나오라 손짓했다.
“아까 아덴이랑 케이는 아크로바틱 된다고 했지? 텀블링할 줄 알아? 뭐든 할 수 있으면 해봐. 그리고 또… 상현이는 잘하는 거 알고, 도화는 가능해?”
서도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정적이지는 않아도 할 수는 있어요.”
“너 할 줄 알아?”
아덴이 드물게 크게 놀라며 물었다. 서도화는 괜히 머쓱해져서 대충 대답하고 말았다.
“여기서 텀블링 못 하는 거 저 하나뿐이에요.”
한야가 말하자 아덴이 한야에게 다가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한야 형도 할 수 있을걸요. 마음먹기에 따라.”
“어?”
“할 수 있다고요.”
“그래… 고맙다.”
간단하게 말하고 돌아서는 아덴을 서도화는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마음먹는다고 눈 깜짝할 사이 안 되던 걸 완벽히 구사하는 건 아덴이라서 가능한 거고.
평범한 사람들은 뭐든지 어지간히 노력해야 제법 볼 만한 실력이 나오는 법이다.
서도화는 고개를 저으며 한야의 팔에 손을 올렸다.
“형은 제가 알려드릴게요. 쟤 은근 배우고 하는 거 잘해서 아덴 따라 하다간 크게 다쳐요.”
“고맙다. 도화야. 많이 도와줘.”
“네, 근데 아까도 말했지만 안정적이진 않아요. 할 줄 안다 뿐이지.”
“헤이 거기, 떠들지 말고.”
테리가 서도화와 한야를 향해 탁탁, 손가락을 두 번 튕기고 아덴을 흘겨보았다.
“일단 아덴이 한번 해봐.”
“네.”
아덴은 저벅저벅 연습실을 가운데로 가 연습생들을 뒤로 물리곤 크게 공간을 둘러보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도화의 머릿속에 문득 과거의 기억이 스쳤다.
“잠깐.”
아덴이 뭐냐는 듯 서도화를 바라보자 서도화는 불안한 얼굴로 입술을 잘근거리다 마지못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계속해.”
“응.”
서도화의 목소리가 떨리는 건 단지 착각일까.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차마 트레이너 선생님 앞에서 적당히 하라는 소리는 할 수 없지만…….’
생각해보니 어, 이건 아닌데 싶었다.
애초에 아덴에게 아크로바틱이란 무엇인가. 일단 그 세계에는 아크로바틱이라는 단어가 없었다.
텀블링 등의 아크로바틱 기술이 저쪽 세계에서는 암살자들의 회피 또는 공격 기술로 많이 쓰이는 무술이었다.
특히 아덴은 소드마스터로서 유연함, 체술이 상당히 좋았는데-, 아니 다 집어치우고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아크로바틱은 아덴의 특기였다.
아덴식 전투기술의 아이덴티티.
매 전투마다 온몸의 근육을 쓰며 이리저리 점프하고 뛰고 달리고 구르는 모습은 아덴과 함께 여행하던 수많은 일행들에게 귀감이 될 정도로 무척 뛰어난 실력이긴 했다.
그런 엄청난 자랑거리인데 이 세계라고 왜 뽐내지 않고 싶을까. 그래서 서도화가 걱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저 녀석에겐 적당히라는 게 없었다.
아덴은 공간을 둘러보고 툭툭 발목을 굴렸다.
“할게요.”
“그래. 안무에 써먹을 수 있는지 봐야 하니까 제대로 뛰어.”
“네.”
아덴이 연습실을 크게 둘러 달리기 시작했다. 그를 지켜보던 테리의 표정이 자연스레 구겨졌다.
“쟤 뭐하냐? 텀블링을 뛰라니까 왜 뜬금없이 달리기를…….”
그러나 아덴이 뛰어오르는 순간 테리의 말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덴은 연습실을 달리며 도움닫기 후 점프하더니 벽을 달렸다. 마치 중력이 없는 것처럼 벽을 달리다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던 찰나 타앗, 그는 강하게 발돋움하며 높이, 천장에 닿을 정도로 크게 공중제비를 돌았다.
그러곤 착지해 툭 짜증스레 내뱉었다.
“아 오랜만이라 발 삐었어.”
“이게…….”
테리가 얼빠진 표정으로 말을 멈췄다.
이건 그냥 텀블링이 아니지 않나? 거의 날아올랐다. 서커스, 묘기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엄청난 기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