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아니 아무리 요즘 연습생들 재주가 다양하다고는 하지만…….’
“이 정도면 돼요? 좁아서 이게 최선인데.”
발군의 실력을 보였음에도 아덴은 아쉬운 듯 테리에게 이것이 끝이 아님을 어필해댔다.
테리의 눈이 더 커졌다.
“이것보다 더 할 수 있는 게 있어?”
“이 정도는 눈감고도 해요.”
“혀, 형… 저게 정상이에요? 정상 아니죠? 저런 기술….”
주상현이 놀란 눈으로 서도화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서도화가 고개를 저으며 제 머리를 짚었다.
“어? 왜 그래? 도화.”
뒤늦게 서도화의 표정을 눈치챈 아덴이 물었지만 서도화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만 계속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런 아덴의 말을 끊고 테리가 물었다.
“너 혹시 외국에서 파쿠르 그런 거 하다 왔니?”
깊게 파인 미간으로 테리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 수 있었다.
아덴은 슬쩍 서도화를 봤다.
‘뭐라고 하냐?’
자문을 구하는 눈빛이었다. 서도화는 반쯤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아덴이 바로 대답했다.
“네.”
“그래……. 그렇구나!”
테리가 화색이 되었다.
“그럼 진작 말을 하지 인마! 너! 이런 재주가 있었어? 이런 건 미리 자랑해줬어도 좋았을 텐데.”
테리가 처음으로 아덴에게 진심 어린 미소를 보였다.
어쩌면 이 팀에 그나마 어필할 만한 희망이 하나 정도는 있을지도!
그러나 잠시 밝아졌던 그의 미소도 고개를 돌려 케이를 보는 순간 빠르게 사라졌다.
“케이, 텀블링할 줄 알아도 오랫동안 안 하다 다시 하려면 마음대로 안 될 수가 있어. 자신 없으면 고집부리지 말고 하지 않아도 돼.”
테리의 말에 케이는 몹시 불쾌해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할 수 있다. 나를 너무 얕보는군.”
“케이.”
서도화의 부름에 케이가 힐끔 서도화를 노려보곤 입을 삐죽이더니 작게 말했다.
“…할 수… 있습니다.”
“…어?”
트레이너는 케이의 갑작스러운 존댓말에 당황하다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한번 해봐. 조심히.”
“알았다. …네.”
아니 오늘 정말 쟤 왜 저래? 뭐 잘못 먹었나?
테리의 의심 어린 시선 속 케이는 멈칫거리며 아덴을 힐끔거리더니 숨을 한번 고르고 발돋움을 시작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무표정으로 서 있던 서도화의 안색이 알게 모르게 한층 더 창백해졌다.
“…쟤, 쟤!”
테리가 케이의 움직임을 따라 손가락질을 했다.
케이는 보란 듯이 벽을 뛰다 거울 위에서 한 번 더 발돋움한 뒤 천장을 꽝 발로 차고 반동으로 바닥에 빠르게 착지했다.
좁다면 좁은 이 연습실에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다는 건 케이도 알고 있을 터인데.
분명히 텀블링으로 테리를 깜짝 놀라게 한 아덴을 의식한 행동이었다.
테리는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며 서도화에게 물었다.
“쟤, 쟤네 친구라고 했던가? 같이 파쿠르 했었냐? 도화야.”
“아, 파쿠르 뭐 네. 그렇게 알고 있어요.”
대충 둘이 치고받고 목숨 걸고 싸우며 같이 터득한 체술은 맞으니 그렇다 쳐도 되지 않을까?
“어… 그래, 좋다. 잘하네 케이. 그럼 도화도 한번 해볼까? 넌 뭐 당연히 잘하겠지. 아 너 케이, 아덴이랑 셋이 친구 아닌가?”
테리의 눈빛에 기대가 가득했다. 춤도 노래도 비주얼도 뛰어난 육각형 연습생 서도화가 아덴, 케이만큼이나 아크로바틱까지 잘하면 이 그룹은 정말 희망이 있다.
서도화가 유학파라는 이야기는 없었지만 셋이 친구이니 같이 파쿠르 했을 수도 있지 않겠나.
‘서도화 저 자식이 아덴, 케이만큼 한다? 내가 총대 매고서라도 데스티니 다시 데려간다.’
조금의 사심과 함께 무척 기대했으나 서도화는 시원찮게 말하고 연습실 중앙으로 향했다.
“아니… 저는 그냥 평범해요. 저는 파쿠르 그거 안 했어요.”
서도화는 가볍게 몸을 풀더니 백텀블링을 한 바퀴 돌고 착지했다.
그야말로 체육 교과서적인 자세와 동작.
일반인에 비하면 뛰어난 수준이지만 저 괴물 같은 놈들과 비교하면 아주 초라해 보이는 수준이었다.
멤버 다섯 중 넷이 아크로바틱을 할 수 있다는 건 희망이 없어 보였던 이 그룹에게 크나큰 장점이었다.
퍼포먼스의 질이 달라지고 표현할 수 있는 것도 늘어난다.
한야도 몸을 잘 쓰는 연습생은 아니지만 노력하면 텀블링 정도는 금방 할 거고.
나름 그룹이 나아가야 할 길은 찾은 셈이다.
테리는 그럭저럭 만족한 표정으로 휴대폰에 무언가를 메모하고 주머니에 넣었다.
“고정 트레이너 올 때까지 안무에 써먹을 만한 몇 가지 동작이랑 이것저것 알려줄 테니까 아덴이랑 케이는 추가 연습해서 멤버들이랑 실력 맞춰 놔.”
“네.”
“적어도 카메라에 비칠 때만큼은 실력 차 없어 보이도록 해야지.”
테리는 아덴과 케이를 앞줄에 세우고 레슨을 진행했다.
평소 실력 있는 연습생들을 대놓고 편애하며 앞줄에 세워놓고 집중 레슨을 진행하던 테리였기에 이렇게 각 멤버들을 고루 살피는 건 첫날 이후 처음이었다.
“케이, 여전히 자세에 힘이 없잖아! 팔 하나를 뻗어도 확실히 뻗어야지 뭐 하는 거냐!”
“난, 나름 열심히-”
“케이파이브 안 하고 싶은가 보지? 어?”
“…더 열심히 하겠다. 아니 하겠소, 하겠습니다.”
테리 또한 서도화와 멤버들의 대화법을 따라 케이를 구슬리자 케이는 떨떠름해하면서도 최선을 다해 연습에 임했다.
케이를 포함한 멤버 모두가 합심하니 춤도 노래도 멤버들 간의 합도 조금씩 좋아지고 있었다.
* * *
대규모 라이브 프로젝트 밀리언 아이돌. 줄여서 ‘밀리언’의 첫 촬영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그룹 이름을 ‘케이파이브’로 만들고 말겠다는 케이의 염원이 무척 컸던 덕에 케이의 실력도 나날이 일취월장하고 그사이 아덴은 그룹과 이 세계에 완전히 적응을 끝마쳤다.
그리고 팝넷에 출연 의사를 밝힌 지 한 달, 유제이 연습생들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그룹명 대신 56번 그룹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았다.
팝넷에서 임의로 부여해준 번호로 앞으로 방송 내내 그들은 56번 그룹으로 불리게 될 것이다.
“약간 뭐랄까 번호로 불리는 기분이 좋지는 않네요.”
“그러게. 좀 그렇긴 하지?”
서도화와 주상현이 동시에 떨떠름한 미소를 지었다. 프로그램 컨셉이니 그러려니 하지만 솔직히 상품 카탈로그의 56번 상품이 된 것 같은 느낌이 있다.
“그런데요.”
주상현이 씨익 웃었다.
“저희 이제 약간 진짜 그룹다워지지 않았어요? 초반에 비하면.”
주상현의 말에 한야와 서도화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멤버들, 직원들이 케이를 다루는 법을 파악하고 그로 인해 케이가 조금이나마 적극적으로 협조해준 덕분에 이 오합지졸들은 간신히 그룹다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물론 미숙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예전처럼 주상현과 서도화, 케이의 비주얼을 연막처럼 이용해 미숙함을 숨긴다거나 하지 않아도 될 수준까지 왔다.
이제 경연에 오르는 것도 크게 걱정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감도 생겼다. 그룹에 강점이 생기고 멤버들마다 잘하는 것이 생기니.
“저 요즘 케이 형 연습하는 거 보면 불타오른다니까요? 케이 형 너무 열심히 해서. 저도 더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아요. 막.”
“넌 너무 열심히 해서 좀 쉬면서 해야 해.”
지나가던 아덴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멤버들 가르치면서 연습한다고 한계까지 몰아붙이던데. 그러다 죽어.”
“네? 아, 아이 뭐, 죽기까지야. 거기다 저 괜찮았는데요. 어 아덴 형 또 땀 안 흘렸네. 형 원래 땀 안 흘리는 체질이에요?”
“안 힘든데 왜 땀을 흘려?”
“헐. 이 정도 하드하게 했으면 안 힘들 수가-”
서도화는 아덴과 대화하는 주상현을 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주상현의 표정이 초반보다 많이 밝아졌다.
하나같이 또라이 같은 멤버들에게 결국 적응해버린 탓도 있지만 그것보단 이 그룹에 희망이 있다는 믿음이 생겨서일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전 이제 우리 그룹 우승은 몰라도 탈락은 안 할 것 같아요.”
“탈락 안 하면 그게 우승 아니야?”
“아이니, 우승은 진짜 모르겠지만.”
“그래도 상현이가 있어서 관심은 많이 받겠다.”
서도화의 말에 주상현이 쑥스럽게 웃었다.
“맞아.”
한야가 주상현을 토닥였다.
“우리 이제 고난이도 안무도 할 수 있고. 탈락은 안 할 거야.”
“뭐, 참가한 그룹 수는 많지만 다 동등한 신인의 입장에서 경쟁하는 거니까요. 다들 우리랑 비슷하게 불안해하고 있지 않을까요?”
“그럼!”
마침 멤버들의 연습을 둘러보러 온 김유진이 그들의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도 열심히 하면 충분히 희망 있는 거 알지? 그래도 저번에도 말했지만 일단 성적보다는 그룹 인지도 쌓는 데 초점을 두고-”
“그만… 그만! 그만!!!”
케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소리치기 시작했다.
김유진과 멤버들이 화들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어?”
“그만해라! 그런 약한 소리 따위 그만하여라!”
“…무슨.”
이 무슨 급발진인가?
김유진이 어리둥절해진 채 저도 모르게 케이를 따라 일어섰다. 케이가 한숨을 푹 쉬며 답답하다는 듯 제 머리를 잡은 채 왔다 갔다 하기 시작했다.
“형 헐리우드 액션이에요?”
“헐리우드 액션이 뭐냐?”
주상현이 아덴에게 헐리우드 액션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시작하자 케이는 더욱 크게 인상을 찌푸린 채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연습 안 하는가!?”
“뭐? 뭐라고?”
케이가?
방금 케이의 입에서 연습이란 단어가 나온 게 맞나? 김유진이 입을 떡 벌린 채 제 귓구멍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흔들어보았다.
‘귀에는 이상이 없는데?’
“연습을! 해야 한다 인간들아! 가만히 앉아서 걱정하면 누가 해결해주는가! 너희는 그 흔한 마나조차 없어서 연습을 해야 성공할 수 있단 말이다!”
“아… 어…….”
김유진이 이병수를 바라보았다. 쟤 왜 저래? 그러자 이병수는 익숙한 듯 대답해주었다.
“케이파이브요.”
“아직도?”
“네.”
케이에게 그룹명 사기를 친 이후로 회사 사람들이 수십 번은 물어본 질문이었다.
“허.”
김유진은 헛웃음을 치며 서도화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도 참 대단하다.”
“대단하긴요.”
아덴과 케이를 평화적으로 다루려면 이 정도는 해야지. 서도화는 김유진에게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미소 지어 보였다.
“저 녀석들은 걱정 마세요.”
‘이건… 내 업보라고 치자.’
따지고 보면 서도화의 잘못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주변을 제대로 정리하지 않고 원래의 세계로 넘어왔고 그로 인해 아덴과 케이가 휩쓸리고 말았으니.
적어도 저들이 그들의 세계로 돌아갈 때까진 보호자로서 지켜주고 적응하도록 도와줄 생각이었다.
아, 근데 왜 눈물이 날 것 같냐.
한야가 김유진에게 물었다.
“그럼 다시 연습할까? 가도 될까요 대표님?”
“어어, 그래. 아무튼 연습 열심히 하고 곧 공연 주제도 알려준다고 하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네!”
“아아! 그리고!”
김유진이 회의실로 나가려던 멤버들을 불러세웠다.
“트레이너 선생님 새로 모셨어. 다음 주부터 같이 하기로 했으니까 그동안 테리 선생님한테 열심히 배워놔. 테리 선생님 정도의 실력자한테 배울 기회 잘 없는 거 알지?”
“그럼요. 열심히 할게요. 대표님.”
한야가 대답하고 연습생들을 챙겨 회의실을 나섰다.
“그래도 다행이네. 걱정거리 하나는 줄었어. 그죠?”
김유진의 말에 직원들이 일제히 수긍하며 케이의 변화한 모습에 대한 감상을 늘어놓았다.
겉으로 봤을 땐 인기 많은 멤버에 실력 좋은 멤버, 비주얼 멤버까지 보유한 완벽한 그룹이지만 내부적으로 참 문제가 많아 걱정했었다.
연습생 수 부족, 장기간 수입 없음을 감당하고 연습생 일부를 정리할까 고민하면서도 비주얼, 끼가 무척 아까워 보류 중이었는데 결과적으로 보류하길 잘했다.
서도화의 입사로 문제 되던 멤버들의 태도가 무척 좋아지고 있으니.
“이젠 좀 그런대로 열정 있어 보이지 않아요?”
“그러게. 테리 씨가 애들 실력도 볼만해졌다고 했고.”
그 콧대 높은 테리가 볼만해졌다고 할 정도면 무척 잘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럼 나도 내 할 일을 해야지.’
김유진이 일어나 가방을 챙겨 들었다.
“애들 잘 챙기고, 연습하는 거 정면 촬영 부탁해요. 진아 씨, 밀리언 첫 촬영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까 애들 인터뷰 연습 좀 시켜주시고 전 방송국 다녀올게요.”
유제이와 같은 작은 소속사는 하루가 멀다고 방송국에 눈도장을 찍어줘야 그나마 떨어지는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을 기회가 생기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