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일주일 뒤, 새로운 트레이너가 유제이 사옥 연습실로 들어왔다.
“우나나라고 한다. 상현이는 나에 대해 잘 알 거고. 한야랑 도화는 내가 잘 알고. 아덴이랑 케이는 완전 초면이네. 우나나 쌤이라고 부르면 돼.”
“네!”
서도화가 거울을 통해 주상현의 표정을 살폈다. 우나나는 주상현이 출연한 경연 프로그램에서 코치 역할로 출연한 댄서로 커리어는 대단하지만 트레이너 경력은 그게 전부다.
클립 영상으로만 찾아봤지 프로그램을 제대로 본 적이 없어 어떤 성격의 트레이너인가 감이 안 잡히는데 다행히 주상현의 들뜬 표정을 보아 나쁘지 않은 선생인 모양이었다.
“일단 테리 쌤한테 대충 어떻다 듣기는 했는데 너희는 아크로바틱으로 가고 싶다며?”
“네, 멤버 중에 아크로바틱 되는 애들이 많아서요.”
“그래, 테리 쌤이 너희는 어느 정도 난이도 있는 것도 잘할 거라고 칭찬하시더라.”
“테리 선생님이요?”
우나나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테리에게 나쁜 말은 하나도 들은 것 같지 않은 기대 가득한 미소였다.
멤버 모두 테리가 자신들에 대해 혹평이 없었다는 것에 놀랐지만 아크로바틱 덕에 그런 거겠지 납득하며 넘어갔다.
“아무튼 잘 부탁하고 너희 첫 무대 주제 정해졌더라? 대표님이 말했다고 했나 나보고 전하라고 했던가 기억이 안 나네.”
연습생들이 웅성거렸다.
“엥 저희 첫 무대 주제 첫 촬영 때 알려주는 거 아니었어요?”
지난 회의 때 첫 촬영은 첫 무대 주제를 전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고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카메라도, 절차도 없이 트레이너에게 전달받는다고?
“아… 혹시 저희 첫 촬영 내용 바뀌었나요?”
“그건 나 말고 밑에 직원들한테 물어봐. 난 그것까지는 모르지.”
아니면 너무 많은 참여 그룹 수에 작은 소속사 촬영은 취소되었다거나.
그러나 연습생들의 불안함과는 상관없이 방송국은 그냥 이들에게 주제를 미리 알려주었다.
큰 이유는 없었다. 그저 주제 발표를 그룹별로 일일이 찍기도, 불러 모으기도 힘들 만큼 많은 팀이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무려 100그룹의 선곡이 최대한 겹치지 않게 하려면 주제를 광범위하게 정해야 할 것이다.
트레이너 우나나는 자신에게 집중하는 연습생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아직 경연 프로그램은 시작도 안 했는데 연습생들의 표정을 보면 이미 카메라 앞에 선 아이들 같았다.
얼마나 긴장해서 듣고 있는지 오늘 처음 본 연습생들임에도 조금 귀엽게 느껴졌다.
연습생들에게 있어 미래를 위한 시작이니만큼 긴장하고 들어야 하는 건 맞는데 표정만 보면, 특히 주상현과 케이는 주제와 싸울 것 같은 얼굴이다.
그 반응이 재밌어서 우나나는 일부러 시간을 조금 더 끌었다.
“인상 펴라 얘들아. 아마 탈락하는 그룹이 많아지기 전까진 주제 난이도가 그렇게 높지는 않을 거니까. 이번에도 쉬워.”
“주제가 뭔데요?”
“주제는 바로.”
우나나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뜸을 들였다. 그러나 연습생들은 그게 전혀 장난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우나나가 뜸을 들이면 들일수록 재밌기는커녕 입이 바싹 말라가는 느낌이었다.
결국 그나마 우나나와 사이가 좋은 주상현이 투정 부리듯 발을 굴렸다.
“선생님 빨리요!”
“하하, 알았어. 주제는 ‘K-IDOL’이야.”
“케이아이돌요?”
두 사람의 말에 케이의 눈이 부릅떠졌다.
“케이아이돌! 몹시 좋은 이름이구나!”
“저놈 저거 아직도.”
아덴이 질린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대체 언제 이 세계에 적응할는지.
원래 세계에서 목숨 걸고 싸울 때만 해도 나쁜 놈이라곤 생각했지 바보라곤 생각 안 했는데, 이 세계에서 보니 단순한 사회 부적응 멍청이였다.
“야, 너도 표정 조심해.”
서도화가 아덴의 옆구리를 찔렀다. 아덴이 인상을 찌푸리며 서도화를 바라보았다.
“내 표정이 왜?”
“너 카메라 앞에서 케이 보면서 그런 표정 지으면 무조건 논란될걸? 불화 뭐 이런 거로.”
“불화 맞는데.”
불화란 단어에 다른 뜻이 있나?
능청맞게 비꼬는 아덴에 서도화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덴은 아직 불화, 인성 등의 논란이 연예인, 특히 아이돌에게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잘 모른다.
애초에 남 시선 신경 써야 한다는 걸 아덴이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러면 안 돼.”
초반엔 라이브 공연 외 분량이 분명하게 적은 게 다행이었다.
자기 어필할 시간은 많이 부족하지만 그만큼 인성 논란이 될 여지도 없으니까.
만약 정말 운이 좋아 10위 안에 든다면 아덴과 케이에게 단단히 예절 교육을 시켜야만 하겠지만.
천천히, 그리고 부지런히 가르친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아덴은 무척 눈치가 빠른 편이니 한번 말하면 잘 알아듣고 따라줄 것이고, 케이는 언제나 문제였지만 ‘케이파이브’ 약발이 떨어지기 전까진 그럭저럭 잘 협조해줄 테니까.
“주제 엄청 광범위하네요.”
“최대한 그룹끼리 노래 안 겹치게 하려고 그러지. 근데 이렇게 해도 선곡 겹치는 팀은 무조건 나올 거야.”
“그런데 주제가 K-IDOL이라면 케이팝 자유롭게 사용하라는 말인가요?”
한야의 물음에 우나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나는 잘 모르겠네. 나중에 김 대표님이랑 관련해서 회의할 때 물어봐. 우선 연습부터 할까? 경연 프로는 선곡 정해지면 그때 생각하고.”
“네!”
“우선 너희가 어디까지 배웠는지 알아야 할 것 같은데 준비한 거 있으면 한번 보여줘. 테리 씨가 가르쳤으니까 기대해도 되지?”
우나나의 말에 연습생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아크로바틱을 선보인 이후 테리의 수업 퀄리티는 180도 바뀌었다.
“한두 시간밖에 안 가르치긴 했지만 그래도 테리가 가르쳤는데 형편없다는 소리 들으면 안 되니까 남은 기간 동안 열심히 해봐.”
끝까지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수업에 임하기는 했지만 자신의 커리어를 걱정해서인지, 아니면 유제이의 연습생들에게서 일말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인지 남은 기간은 열정을 다해 지도해주었다.
콧대 높은 테리가 수업 시간을 오버하면서까지 레슨을 이어갔으면 그가 얼마나 열심히 가르쳤는지 말 다 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수업, 후임자가 우나나임을 알게 된 그는 무척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었다.
“얘들아, 어제까지 연습한 거 좀 더 난이도 높여서 오늘 안에 마스터하게 해줄 테니까 꼭 다음 트레이너한테 보여줘라.”
우나나에 대한 테리의 라이벌 심리 덕분에 멤버들은 우나나를 맞이하기 위한 최선의 준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 저희가 연습했던 거 보여드릴게요.”
“어 그래.”
한야가 정중하게 우나나를 연습실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하하, 뭐 준비 많이 했나 보네? 하긴 그 유명한 테리 씨인데 열심히 교육했겠지.”
우나나는 테리에 대해 많은 소문을 들었다. 무척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라서 대형기획사 데뷔조 연습생들만 가르친다던가 중소기획사 연습생들 같은 경우 자신의 커리어에 영향이 갈까 봐 제 기준에 부합하는 연습생들만 편애하거나 무성의함을 보이는 등 안 좋은 이야기도 많았다.
‘특히 유제이 같은 경우엔 말이 많았지.’
김유진이 모르는 사실이 있다. 테리는 어떤 모임이고 나가면 유제이 연습생들에 대한 험담을 하곤 했다.
의욕이 없다던가 실력도 없는 사람을 비주얼만 보고 뽑았다던가 심하게는 말투가 이상한 게 정신병 있다는 말도 스스럼없이 하곤 했다.
-유제이 애들 그대로 데뷔하면 고대로 망하고 회사도 문 닫는다에 내 커리어 건다.
-이번에 서도화 유제이로 들어왔더라? 걔는 참…. 대형 걷어차고 나갔으면 제대로 조사하고 들어오지 지 앞길 스스로 망친다니까? 그 멤버들이랑 뭘 한다고. 한야나 상현이도 마찬가지야. 답답해서 계약 해지하고 다른 데 가라 하고 싶은 거 책임지기 싫어서 관뒀다.
-케이인지 뭔지 장점이 얼굴 하나밖에 없는 새끼가 얼굴도 제대로 못 쓰던데 그거 어떻게 쓰냐? 김 대표도 참 보는 눈 없어
-유제이 거기에 교포 애들 있거든? 잘생기긴 했는데 존나 못해. 욕 나오게 실력이 없어. 둘 다. 김 대표는 그딴 애들 데려올 거면 내가 아니고 기본기 잘하는 트레이너한테 맡겨야 할 거 아냐. 돈 때려 부으면 다 되는 줄 아나?
이 좁고 고립된 업계에선 사모임 중 나왔던 말들도 다 돌고 돌아 모든 이의 귀에 들어오는 법이다.
연도 없는 기자가 연예인의 연애 소식이나 스폰 사실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런고로 유제이 연습생들의 실력이, 특히 아덴과 케이의 실력이 몹시 떨어진다는 건 우나나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어차피 인수인계 때 테리한테 적나라하게 직접 듣기도 했고.
‘그래서 크게 기대는 안 하지만.’
그래도 데뷔를 앞두고 있으니 실력부터 봐야 한다. 우나나는 이들의 실력이 테리의 말만큼 정 못 볼 수준이면 차라리 김유진에게 솔직히 말하고 경연 프로그램 참여를 보류시킬 생각이었다.
망신당하고 들어가는 것보다 완벽히 준비된 채로 바닥부터 시작하는 게 오히려 이미지에는 도움이 될 테니까.
우나나가 복잡한 생각을 뒤로하고 연습생들을 보았다.
연습생들은 이미 대형을 맞추고 우나나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표정을 바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시작해.”
그와 동시에 한야가 음악을 틀고 대형에 들어오며 안무를 시작했다.
테리가 이들에게 처음으로 준 아크로바틱을 중심으로 한 창작 안무.
“어?”
이들이 춤을 추는 순간 우나나의 얼굴에 의아함이 가득해졌다.
‘잘… 하는데?’
테리가 네거티브하게 말한 건가 아니면 자신의 티칭 능력이 부족해 아직 지적할 곳을 못 찾은 건가.
‘아니!’
자신이 비록 테리에 비해 티칭 능력은 부족할지언정 보는 눈은 정확하다 자부한다.
서도화를 센터에 두고 2열에 주상현, 아덴, 3열에 한야, 케이 순으로 대형 맞춰 나오는 군무.
서도화는 테리 특유의 쫀득한 안무 느낌을 무척 잘 살렸다.
-서도화는 가장 최근에 들어왔지만 데스티니에서 A등급이었어요. 춤출 때 강약 조절을 굉장히 잘해서 춤이 예뻐 보일 때도 있고. 발군입니다. 외우는 것도 빠르고, 케이에 비하면 뭐……. 뭐는 안 괜찮을까 싶긴 한데.
서도화에 대한 테리의 평이 떠올랐다. 유제이에 대형 출신 연습생이 있는 것도 놀랐지만 메인보컬이 제대로 안무를 이끌고 있는 것도 신기했다.
춤에 힘이 있거나 정확하게 춘다기보단 쫀득하게 자신의 색깔대로 추는 타입.
안무를 제 스타일에 맞도록 변환하는 걸 굉장히 잘한다.
그리고 뒷열에 서 있는 주상현과 아덴. 힘 있게 잘 추는 멤버들을 서도화 주위에 붙여놔서 군무 스케일이나 퀄리티가 몹시 파워풀하고 안정적으로 보였다.
주상현이야 경연 프로그램에서 한번 가르친 적 있으니 잘 알고 아덴은 테리가 그렇게 혹평했던 것에 비해 군무에 있어 이질감이 없었다.
테크닉적인 부분이나 디테일은 많이 부족하지만 팔다리가 길고 힘이 있어 서도화와 함께 보는 맛이 있다.
그리고 한야와 케이.
한야는 춤에 주력하는 멤버는 아니었고 힘이 없어 잘 춘다고는 못해도 안무 자체는 그럭저럭 잘 따라오고 있었고 케이는-.
‘확실히 못 추긴 하네. 응 그렇네… 조금 심각해.’
-케이는… 하아, 뭐라고 말해야 할지. 설명하기가 어려운 놈인데요……. 흐음…….
할 말을 고르고 있는 테리에게 우나나는 소문은 익히 들었으니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역시 소문대로 서도화, 주상현과는 비교할 수 없고 춤 시작을 같이 시작했다는 아덴이나 대칭점에 있는 한야를 두고 봐도 매우 못한다.
못하는 주제에 여느 판타지 영화에서 튀어나온 요정같이 잘생겨서 시선은 주구장창 빼앗는다.
그게 최악의 문제였다. 잘생겼는데 엄청난 구멍이라는 것.
중간에 서서 어떻게든 케이에게 포커스를 뺏기지 않고 자신에게로 이목을 집중시키는 서도화가 대단해 보일 지경이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노력은 한 게 티가 난다는 정도.
아예 몸을 쓸 줄도 모르는 케이가 안무 한번 틀리지 않고 멤버들과 속도를 맞추고 있다.
삐걱대는 모양이 우습지만 그 와중 얼굴을 보면 세상에서 제일가는 춤꾼마냥 자신감이 가득 차 있다.
‘자신감…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네. 전체적으론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아.’
조금만 노력하면 춤 가지고 놀림거리는 되지 않는 그룹이 될 터다.
‘일단 상현이 춤이 너무 강하니까 하이라이트에 아예 댄브를 세워버리는 게 좋겠고 도화는 이대로 중간에 두는 게 맞겠다.’
메인보컬이라고 하기도 하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시선잡이도 곧잘 하는 편이니까.
‘아덴이는 춤에 힘이 너무 들어가서 안무를 놓치니까 디테일 챙기고 한야는 속도를 기르고 케이는 막막-’
“……어? 케이 어디 갔어.”
우나나가 연습생들에게 전할 피드백을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열심히 춤을 추던 멤버 중 케이가 눈 깜빡할 사이 시야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