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55번 리허설 끝나면 바로 들어갈게요.”
“지금 올라가 있는 팀이 55번인가요?”
“아뇨 저쪽은 53번… 아 그냥 때 되면 부르실 거예요.”
제작진은 귀찮은 듯 심드렁하게 말하고 또 질문을 받을세라 서둘러 가버렸다.
“……원래 여기는 저렇게 싹수-”
“쉿.”
서도화가 빠르게 아덴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서도화도 내심 황당하긴 했다.
아무리 무대 뒤 의자 하나 두는 것도 아티스트 인기에 따라 차별하는 업계라지만 저건 기본이 안 되어 있는 거 아닌가.
모두가 말없이 당혹스러워 하고 있자 주상현이 주위를 둘러보다 속삭이듯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분만 그래요. 전 시즌에서도…….”
“아하.”
그제야 얼어있던 멤버들이 굳은 몸을 풀었다.
벌써 차별이 시작된 줄 알고 무대에 오르기도 전에 질려버릴 뻔했다.
“병수 형. 저희 차례 올 때까지 가만히 여기 있으면 되나요?”
“어? 아, 그래.”
한야의 물음에 이병수가 멤버들에게 이름표를 나눠주었다.
“이름표 착용하고 아마 차례 다가오면 스태프가 와서 설명해줄 거야. 우린 감독님께 다녀올 테니까 너희는 여기 있어.”
이병수와 함께 온 김유진은 한야에게 멤버들 잘 챙기라 당부하며 이병수와 함께 감독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서도화는 생수를 꼭 손에 쥔 채 무대 위 리허설 중인 연습생들을 쳐다보았다.
하도 움직여서 제대로 셀 수는 없지만 아무튼 10명은 넘겠거니 싶은 대형 그룹이다.
부여받은 숫자처럼 빤히 보이는 소속사 형편만큼 멤버들의 실력은 좋았지만 편곡이나 안무는 엉망진창이다.
서도화가 데스티니 물을 먹어봐서 눈이 높아졌을 수도 있지만 노래를 잘 부른다 못 부른다의 문제가 아니고 조화가 잘되지 않고 대형이 상당히 어수선하게 보였다.
‘조화가 안 되는 건 작은 회사 특징인가.’
유제이도 초반엔 만만치 않았기에 남 일 같은 문제는 아니었다.
그래도 개개인의 실력은 좋으니 1라운드는 붙으려나.
서도화는 그들의 공연을 지켜보다 곁에 있던 케이를 툭 쳤다.
“너 잘할 수 있지?”
서도화의 물음에 케이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고말고. 지금까지 우리는 ‘완벽함’을 위해 갖은 수모를 겪었다. 음유시인, 그렇지 않나?”
“아, 그래.”
서도화는 오소소 몸을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열정적으로 해주는 건 좋은데 중2병에 열정을 더하니 청춘 스포츠물로 장르가 변경된 것 같아 사실 좀 역했다.
그래서 서둘러 자리를 피해 아덴의 옆으로 향했다. 아덴은 다가온 서도화를 힐끔 보곤 툭 말했다.
“특이한 구조물이네. 예전에 우리 퍼레이드 했던 거 생각나냐? 그때 올랐던 단상이랑 비슷해.”
서도화는 예전 프리메튼 제국을 점령한 상급 마족 에이시아를 처치한 뒤 황제의 초청으로 올랐던 퍼레이드 단상을 떠올렸다.
그 무대도 수백 가지 꽃으로 꾸며져 상당히 화려했다.
눈앞의 무대와는 제법 다른 분위기인데 용케도 그걸 생각한 모양이다.
“용도도 비슷해.”
“우리 그때 처음 만나지 않았나? 뭐 이런 별종이 다 있나 했는데.”
“누가 할 소릴? 다짜고짜 길드 보상 지분 가지고 시비 걸어서 내가 얼마나 무서-”
그때 불쑥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뭐 하세요?”
“네?”
서도화와 아덴의 얼굴이 동시에 돌아갔다. 그들의 앞에 카메라 한 대가 떡하니 서 있었다.
“아 깜짝이야.”
서도화는 작게 중얼거렸다. 카메라맨이 다시 한번 물었다.
“여기서 뭐 하세요?”
하기 싫어 죽겠다는 듯 심드렁한 표정과는 달리 부드러운 물음.
이게 김유진 대표가 말하던 밀리언 아이돌 비하인드 카메라인 모양이었다.
서도화는 얼른 활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53번 분들 리허설 보고 있습니다.”
서도화의 표정을 확인한 아덴도 빠르게 미소를 급조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기분이 어떠신가요?”
“생각보다 무대가 커서 놀랐습니다. 좀 설레요. 그렇지?”
아덴을 보며 묻자 아덴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오늘은 어떤 무대를 준비하셨나요?”
카메라맨의 물음에 서도화가 씨익 웃었다. 그리곤 자신만만하게 아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엄청난 기술을 준비했습니다.”
내가 아니고 얘가.
한편 아덴은 서도화를 힐끔 보곤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난 기술이 있던가.’
딱히 크게 힘들여 준비한 기술은 없었는데.
왜 금방 들킬 거짓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서도화가 그렇다고 하니 동료로서 말을 맞춰줄 요량이다.
“엄청난 기술이요?”
카메라맨은 그다지 궁금해 보이지 않는 표정으로 아주 흥미로운 목소리를 냈다.
서도화는 그를 모른 척하며 신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희 56번만의 특별한 무대를 보여드릴 예정입니다!”
“오 기대됩니다. 아침은 잘 먹고 왔어요?”
“저는 잘 먹었는데 여기 저희 막내랑 저 친구가-”
서도화는 안타까운 얼굴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여전히 긴장한 채 무대를 보는 주상현과 케이를 가리켰다.
사실은 서도화의 노림수였다.
저들을 보라. 화제의 연습생 주상현과 56번 그룹의 대표 비주얼 케이의 얼굴을!
자연스레 돌아간 카메라는 주상현과 케이를 향하다가 우뚝 고정되었다.
“많이 긴장해서 못 먹었어요. 특히 상현이가 많이 떨더라고요.”
카메라맨은 서도화가 말하는 동안에도 계속 그들을 찍고 있었다.
또한 서도화와 아덴보다는 얼굴이 익숙한 주상현과 잘생긴 케이 쪽이 좀 더 볼거리가 되겠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네, 리허설 파이팅 하시길 바랍니다!”
그러곤 간단히 대화를 마무리한 채 주상현에게로 갔다.
“감사합니다!”
서도화가 힘차게 대답했다. 금방 관심이 사그라드는 게 조금 씁쓸하긴 한데 그래도 비하인드 영상에 56번 멤버의 지분이 조금이나마 늘어날 것이다.
‘내가 못 받은 관심은 무대 위에서 받으면 되지.’
그때 주상현의 곁에 있던 케이가 스르르 카메라 밖으로 빠지더니 서도화와 아덴에게 다가왔다.
“저 사람은 왜 나에 대해 캐물으려 하는 것이냐.”
“쉿.”
작게 말해. 서도화의 말에 케이는 불편한 심기를 애써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저것 질문해대는 게 부담스러웠던 모양이었다. 하긴 행적이 찝찝하기 그지없는 마왕이니 자신에 대해 묻는 것에 그 누구에게도 순순히 답해본 적 없을 것이다.
서도화가 케이에게 물었다.
“잘 대답해주고 왔어?”
마치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에게 묻는 듯한 말투였다. 케이는 그게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리며 서도화의 시선을 피했다.
“해줬다.”
“내가 말하는 대로 예-”
“예의 바르게 했다! 걱정 말라.”
말투가 원래대로 되돌아왔구만. 서도화는 리허설이 끝나면 저놈의 말투를 반드시 다시 교정해주리라 결심하며 미소 지었다.
“좋아. 잘했어. 이것 봐. 너도 하니까 잘하잖아.”
서도화의 말에 케이는 멈칫거리며 그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나를…, 나는 여전히 너의 적이니.”
“그건 맞지.”
저렇게 감정이 잘 나타나선 어떻게 연예인을 하겠다고.
‘쑥스러워하는 게 너무 티가 나잖아.’
서도화는 어이없어하며 대충 케이의 말에 맞장구쳐주었다.
그러자 왜인지 모르게 케이는 당황하며 말을 얼버무리기 시작했다.
“나에게, 친한, 척을 하지 말라.”
“그런 적 없는데.”
“안다!”
생각보다 멍청해서 웃긴 놈인데?
서도화가 생각하고 있을 때 아덴이 다가와 조용히 그의 어깨를 쳤다.
“야.”
“왜.”
서도화가 그를 바라보자 아덴이 오른쪽을 향해 눈짓했다. 그의 시선을 따라 서도화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바로 옆에 대기 중이던 55번 팀과 눈이 마주쳤다.
“아. 안녕하세-”
서도화가 까딱 고개를 숙여 인사했으나 그들은 모르는 척 시선을 피하곤 쑥덕이기 시작했다.
티가 나게 이곳을 힐끔거리는 게 이들의 이야기를 하는 게 틀림없다.
“……하등한 인간 주제에 감히 나를 얕보고 있군.”
케이가 중얼거렸다.
“쟤네가 무슨 말 하는지 들려?”
“당연하다마다.”
“아 맞다 너 귀도 좋았지? 근데 너만 얕보는 거야 우리를 얕보는 거야?”
옆에서 듣던 아덴이 헛웃음과 함께 말했다.
“누가 괴물 아니랄까 봐.”
“…나는 괴물이 아니다!”
“둘 다 시끄러워. 여기서 이상한 소리 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
“이번엔 저 녀석이 먼저…!”
케이는 상당히 억울해하며 아덴을 가리켰다. 서도화가 아덴을 흘겼다.
아덴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미안.”
아덴은 케이에게 사과했지만 케이는 오히려 더 짜증이 난 얼굴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것보다 우리 보고 뭐라고 하는데?”
서도화의 물음에 케이는 작게 대답했다.
“나에게 잘생겼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보단 한야와 네놈의 이야기를 특히 많이 하는군.”
“네놈?”
“…아니, 네 이야기.”
“진짜로 말조심해. 한 마디라도 실수하면 케이파이브고 뭐고 이 자리에서 하프 켜고 노래 부를 거니까.”
농담처럼 툭 던진 말인데도 케이는 어지간히 겁을 먹었는지 창백해져선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말아라. 도화. 나와 아덴, 그리고 너의 정체가 들킨다면 이곳 모두의 기억을 없앨 테니.”
하이고 참나. 마왕의 능력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건 너무 잘 아는데 허풍은.
그러나 서도화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굳이 이 자리에서 멤버의 신경을 거스를 필요는 없으니까.
“아무튼 말조심만 해줘. 그냥 지금처럼 게임 이야기하듯 하면 돼. 잘하고 있으니까.”
지금처럼 긴장하고 있으면 적어도 사고 칠 일은 없겠다.
임시방편이지만 그들이 적응될 때까지만이라도 수동으로 챙겨줘야지 어쩌겠는가.
서도화의 말에 케이는 눈꺼풀을 내리며 고개를 숙였다.
“…내가 짐이 되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말아라.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협조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나.”
‘아 뭐 또 말을 저렇게 하냐.’
잔뜩 기가 죽어선. 누가 보면 협박이라도 한 줄 알 것 아닌가.
물론 불화가 맞지만 시작하기도 전에 불화설이 생길 것 같다.
“아 뭐, 짐 정도는 아니야.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 할걸?”
“…뭐?”
“일단 이 세계에선 동료 아니겠어? 하하.”
서도화가 멀리 떨어진 카메라를 의식하며 사람 좋은 너털웃음과 함께 말하자 마왕이 뚫어지라 서도화를 쳐다보았다.
불쾌하면 말고. 서도화는 그의 표정을 대충 넘겨버렸다.
그때 서도화의 귀에도 55번 그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서도화네. 설마 했는데.”
“쟤네 데스티니 연습생이야?”
연습생 중 누군가 묻는 소리에 아까부터 이곳을 힐끔거리던 55번의 멤버가 짜증을 팍 내며 동료의 명치를 팔꿈치로 쳤다.
“아 뭔 소리야. 서도화 데스티니에서 잠수 타고 쫓겨났잖아. 다른 회사겠지.”
“아, 하긴. 배정받은 순서만 봐도 그렇네.”
“근데 저기 한야 형도 있는데?”
다 들린다 인마.
마이크 안 달았다고 너무 대놓고 뒷담 까는 거 아닌가?
참으로 불쾌하기 그지없지만,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지.
멤버들은 모두 짜기라도 한 듯이 그들을 무시하며 고개를 돌렸다.
“뭘 야려.”
이 구역의 일진 아덴만 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