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 파티부터 시작하는 아이돌 생활-28화 (28/270)

제28화

“20위부터 25위까지의 각 그룹 리더들 앞으로 나와 키워드를 선택해주세요.”

“다녀올게.”

한야는 어떤 부담감도 긴장도 없이 느긋하게 무대 위로 올라가 가장 빨리 선택을 끝내고 멤버들에게로 돌아왔다.

무대 위에 올라간 한야보다 더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주상현이 와락 그에게 달려들었다.

한야는 덤덤히 주상현에게 C라고 적힌 카드를 쥐여주었다. 스크린 속 카드와 같이 앞면엔 알파벳, 뒷면엔 밀리언 아이돌의 로고가 그려졌을 뿐 그 외엔 별거 없는 카드였다.

주상현은 떨떠름하게 카드를 제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그 이후 다른 그룹들도 빠르게 선택을 이어갔고 마침내 모든 그룹의 키워드 선택이 끝났다.

그룹 수가 워낙 많고 힌트나 단서가 없어 선택을 고민하는 리더들이 있던 탓에 생각보다 오래 대기하고 있어야만 했다.

꽤나 시간이 지체되었는지 서영은 마지막 100위의 리더가 무대에서 내려가자마자 바로 진행을 시작했다.

“마지막 100위의 키워드 선택이 끝나며 이로써 합격자 전원의 선택이 완료되었습니다.”

서영이 말하는 사이 선택의 방이 순식간에 무대 위에서 내려갔고 그녀는 자연스레 가운데로 자리를 이동했다.

“그럼 이제 각 키워드가 무엇인지 공개를 해볼 텐데요. 보아하니 B 키워드가 상당히 인기가 많았고 반면 C 키워드는-”

아니 그냥 키워드 공개부터 하라고!

서영은 시간이 없는 와중에도 뜸 들이는 재미는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듯 멘트를 이어나갔다.

채팅창은 물론이거니와 기어코 대선배 앞이라고 잘 견디던 연습생들의 표정마저 답답함이 일기 시작하자 그제야 서영은 키워드를 발표했다.

“A의 키워드 공개하겠습니다.”

스크린 속 카드 중 A가 적힌 카드가 다른 카드를 밀어내고 가운데를 차지하더니 점점 커져 곧 주제를 드러냈다.

[새벽과 여행]

“A의 주제는 바로 새벽과 여행이었습니다. A를 고른 각 그룹은 새벽 또는 여행이란 주제로 무대를 준비하면 되겠습니다.”

준비하기에 무난한 키워드였다. 곡의 중복을 고려해 같은 키워드 내에서도 또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해두었던 모양이다.

새벽도 여행도 꽤 좋은 곡이 많으니 내용을 모른 채 A를 뽑은 그룹들이 여기저기 안도의 한숨을 쉬어댔다.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그룹의 서사를 보여줄 곡 선택도 할 수 있을 테지.

“그럼 다음은 B 키워드의 내용 발표하겠습니다.”

스크린 속 A 카드가 사라지고 B 카드가 나타나 주제를 드러냈다.

[낮과 밤]

“오오…….”

서도화가 작게 감탄했다.

확실히 인기가 많을 만한 키워드다. 둘 중에는 특히 밤이 인기 있지 않을까?

좋은 곡도 많을뿐더러 멤버들이 돋보일만한 컨셉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항상 어둠, 밤과 관련된 곡의 무대는 레전드가 자주 탄생하는 편이니까.

“그럼 마지막. 가장 늦게 선택이 마감된 키워드 C의 주제를 발표합니다.”

서영의 말에 웅성거리던 회장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도대체 C는 무엇이길래 그토록 투표율이 적었던 것일까.

최후의 최후까지 남아 어떻게 보면 가장 경쟁이 치열하지 않은, 하지만 자칫하면 망한 무대 제조기가 될 수도 있다고 모두가 불안해하는 C.

이미 주제를 알고 있는 그룹들만이 불안 없이 평온했다.

마침내 키워드가 공개되었다.

[정글과 나]

생각보다 괜찮은데? 싶다가도 마치 영화 제목이 아닐까 의심되는 주제였다.

아니 ‘정글’ 그리고 ‘나’.

생각보다 이상하거나 심각한 주제는 절대 아니다. 오히려 잘 버무리면 괜찮은 공연을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좋은 무대를 만들기엔 선곡 범위가 좁다.

거기다 어떤 무대든 살릴 수 있는 연륜 있는 아이돌도 아니고 아직 데뷔도 안 한 연습생들이 살리기엔 좀 난해한 주제긴 했다.

그래서 이 주제를 두고 연습생들 사이의 평이 극명히 갈렸다.

A, B를 고른 연습생들은 ‘어 괜찮은데?’, C를 고른 당사자들은 막막한 얼굴로 ‘이제 어떡하지?’ 속닥이며 뚫어지게 스크린을 바라볼 뿐이었다.

‘반응이 미적지근하군.’

아덴은 장내의 분위기를 판단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떤 상황이라도 어지간하면 서도화의 판단은 항상 옳았다.

설령 모든 동료가 반대하는 선택이라 하더라도 결과적으론 서도화의 의견을 따를 때가 가장 좋은 결말을 가져왔다.

그렇기에 아덴은 어떤 일이라도 서도화의 의견을 지지했다.

하지만 현장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동료들 특히 이들 중 지능이 가장 뛰어나 보이는 한야의 표정도 꽤 심각했다.

이번만은 서도화의 선택에 실수가 있었던 걸까?

아덴이 고개를 돌려 서도화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서도화의 얼굴을 보는 순간 픽 웃음을 터트렸다.

‘도화가 실수 따위 할 리가 없지.’

서도화가 제 선택에 아주 만족스러워하며 미소 짓고 있었다.

“키워드 괜찮네요.”

서도화의 말에 한야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뭐 생각나는 곡이라도 있어?”

“그건 아닌데 저희한테 잘 맞는 컨셉인 것 같아요.”

정글과 나. 정글 하면 짐승, 이 그룹의 거친 녀석들을 아주 잘 써먹을 수 있는 괜찮은 컨셉이다.

이 현장에서 아덴과 케이만큼이나 짐승 컨셉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이들과 함께라면 충분히 잘 살릴 수 있는 컨셉이었다.

“이것으로 밀리언 아이돌이 준비한 모든 순서가 끝이 났습니다. 시청자 여러분 지금까지 긴 시간 라이브 스트리밍을 시청해주셔서 감사드리고요.”

키워드가 모두 공개되고 서영이 마무리 멘트를 하기 시작했다.

“연습생분들은 키워드에 맞는 좋은 무대를 준비해서 다음 스트리밍에서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고생하셨고요. 그럼-”

현장에 마무리용 BGM이 깔리고 한층 어수선해졌다.

“대규모 라이브 프로젝트 밀리언 아이돌,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길었던 라이브 스트리밍이 드디어 끝났다.

장내는 순식간에 다시 시끄러워지기 시작했고 엄청난 소음 사이 스피커를 통해 제작진의 지시가 떨어졌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연습생들은 각 소속사 스태프들의 지시에 따라 뒷줄부터 차례대로 회장을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모두 고생했어!”

서도화는 기다렸다는 듯 달려오는 이병수를 따라 바깥으로 이동하며 머릿속에 떠오르는 곡 몇 가지를 정리했다.

꼭 정글 컨셉의 곡이 아니라도 편곡만 빡세게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몇 곡 꼽아보니 생각보다 떠오르는 게 많았다.

* * *

다음 날 유제이의 스태프들과 멤버들은 이번 주제의 컨셉과 선곡에 대한 회의를 위해 회의실에 모였다.

“어떤 곡을 했으면 좋을지 의견 있는 사람 있어요? 시간이 촉박하니까 뭐라도 말해봐요 다들.”

안건을 내놓은 김유진은 지난 라운드 때보다 한결 느긋하고 편안한 얼굴이었다.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본 멤버들이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좋은 무대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방송을 통해 보니 더더욱 멤버들의 끼와 재능, 실력 등을 객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객관적으로 보는 이 그룹은 스타성과 실력 그리고 비주얼을 고루 갖춘 무척 가능성 있는 뛰어난 그룹이었다.

불안감은 있었지만 멤버들이 이렇게 잘해주니 이제 그들 자체에 대한 걱정은 덜었다.

거기다 첫 라운드치고 성적도 기대 이상으로 잘 받았고 팬들의 반응도 심상치 않았다. 다음 라운드 기획 구성만 제대로 하면 분명히 더 높은 순위로 치고 올라갈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들에게서 가능성을 본 건 다른 직원들도 마찬가지인지라 다들 처음보다는 훨씬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크릭의 틱탁타란 곡이 있거든요? 이걸 편곡을 잘해서 정글풍으로 버무려보면 어때요?”

“정글이랑 연관이 있어요?”

“연관이 있다고는 못하는데 야자수나 코코넛 같은 열대지방 워드가 많이 들어가요. 일단 노래가 좋고요.”

“오케이 우선 킵.”

“정글 말고 주제를 ‘나’로 잡는 건 어때요? 이게 희망적인 곡도 할 수 있고 선곡 범위가 더 넓지 않아요?”

속속들이 괜찮은 의견이 나오는 사이 서도화가 손을 들었다.

“저 몇 가지 생각해봤는데요.”

“어어, 그래 도화는 어떤 곡?”

“트리프린스 선배님 곡 중에 룰(Rule)이라는 곡이 있거든요.”

“아아! 그 곡!”

스페이스의 팬들만 아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곡임에도 김유진은 바로 곡의 멜로디를 떠올렸다.

예전 데스티니에 있던 시절 퍼블리싱을 맡아주었던 스튜디오에서 내놓은 곡이었다.

대중적인 훅 파트가 없어서 타이틀곡은 되지 못했지만 트리프린스의 장점인 세 멤버의 댄스와 어둑한 분위기가 잘 어우러진 곡으로 해체하기 전 콘서트에서는 종종 선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서도화는 이 곡을 왜 추천했을까.

김유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근데 이 곡은 주제에서 좀 벗어나지 않나?”

“곡 중에 ‘이 정글엔 룰이 있어’라는 가사가 있어요.”

참고로 2절엔 ‘이 미로엔 룰이 있어’다. 서도화는 그렇게만 말하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게 다야?”

마치 더 할 말이 남았다는 듯 말하길래 기다리던 김유진이 어리벙벙하게 되묻자 서도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본인이 생각해도 설명이 한참 부족했다 싶었는지 말을 덧붙였다.

“이 곡이 그렇게 유명한 곡은 아니라서 정글 풍으로 편곡 잘하면 가사에 정글 하나 들어간 것만으로도 충분히 주제에 부합하는 곡이 될 거예요.”

애초에 정글 컨셉의 곡은 유행이 좀 지난지라 원래 있는 곡 중에 찾으려면 꽤 힘들다.

그래서 인기가 없는 키워드가 아닌가.

그러니 없는 곡 중에 그럴듯한 가사가 있는 괜찮게 편곡할 수 있을 곡들을 찾아내야만 한다.

그런 의미로 ‘룰’이란 곡은 나름 좋은 선곡이었다.

“이 곡 가사가 마음의 영역 다툼이라는 내용이라 상당히 거칠거든요. 정글의 야생과 연관 지어서 컨셉 짜기 좋은 것 같아서 추천해봤어요.”

그냥 대놓고 말하자면 화자가 성깔이 좀 있고 상대를 내려다보는 듯한 가사다.

마침 야수의 육체를 가진 멤버와 야수의 지능을 가진 멤버가 하나씩 있고. 아니, 둘 다 그냥 야수 놈들인가.

아무튼 원곡자가 원곡자이니만큼 춤과 특기인 아크로바틱을 살릴 곳도 많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보컬을 살릴 수 있는 부분이 없다는 건데 이건 뭐-

서도화가 열정 가득한 눈으로 한야를 바라보았다.

어떤 곡을 선택하든 편곡은.

……한야가 알아서 해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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