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화
다음 스트리밍 라이브 날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공연 준비는 지난 라운드보단 수월하게 완성되어갔다.
편곡도 안무도 파트 분배도 무척 잘 되었고 이들의 특기인 아크로바틱을 선보일 구간도 있어서 이대로 나가면 1라운드보다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연습을 하기에도 아주 촉박한 시간이지만 그런 때라도 받을 건 받고 할 건 해야 했다.
이른 아침, 멤버들은 오프닝 곡 연습을 위해 지정된 연습실로 향했다.
“케이, 아덴. 오늘은 어딜 가든 입조심하고. 특히 절대 싸우지 말고.”
“알아요.”
“누구한테든 예의 바르게 인사 잘하고.”
이동하는 내내 이병수는 아덴과 케이에게 쉬지 않고 충고했다.
이제 조금씩 한국 사회에도 적응하고 있어 어 느정도 눈치를 볼 줄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들은 물가에 내놓은 아이들 같았다.
특히 오늘은 더더욱 그랬다.
“잘 할 거라고 형은 믿어.”
“좀 믿어요. 이제는.”
아덴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오늘은 오프닝곡 안무 연습하는 날. 하지만 유제이 멤버들끼리의 연습이 아니었다.
지난 1라운드를 통해 같은 스테이지에 서기로 한 4팀과의 합동 연습이었다.
거기다 높은 순위에 올랐다고 연습 영상을 촬영한다고 하니 이병수의 걱정이 큰 건 당연했다.
아무리 한야가 있고 두 사람을 다룰 줄 아는 도화가 함께하고 하더라도 그곳에 카메라가 있고 연습생이 있다면 말실수, 눈빛 한 번으로도 논란이 될 수 있으니까.
“인사하고 할 말만 하고. 최대한 기분 좋은 말만 골라서 하면 된다는 거잖아요. 다 안다니까.”
아덴이 퉁명스레 말하자 옆자리에 있던 서도화가 그의 어깨를 쳤다.
“말투도 조심.”
결국 아덴은 아예 입을 다물어버렸다.
사고 치기도 전에 잔소리부터 해대는 사람들에게 어지간히 질려 버렸지만 솔직히 잔소리 들을 만해서 따질 수는 없었다.
지금까지 제에발 싸우지 말고 말조심하라는 충고를 제대로 들은 적이 없었던 건 맞기 때문이다.
그나마 지난번 1라운드 촬영 땐 지금만큼이나 충고를 쏟아부어서 별 사고 없이 잘 마무리되었다.
충고, 잔소리를 쏟아부으면 자존심이 상해서라도 말을 들을 걸 아니 이들이 이렇게나 난리인 것이다.
그를 본 케이는 말없이 창문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도 이병수에게 어지간히 잔소리를 들은 차다.
“형 이거 먹을래요?”
좀 짜증이 난듯한 그에게 주상현이 슬쩍 초콜릿을 내밀었다.
케이는 인상을 구기면서도 초콜릿은 받아먹었다.
목캔디와는 달리 초콜릿은 입맛에 맞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다들 파이팅하고. 모처럼 카메라도 있고 자리도 좋은 곳 배정받았는데 잘하고 오자!”
“네!”
어느새 차가 연습실에 도착했다.
* * *
연습실 안으로 들어가자 먼저 온 그룹 연습생들이 멤버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안녕하세요!”
“어? 어서 오세요!”
“56번 님들이시죠?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멤버들은 그들에게 인사하며 연습실을 둘러보았다.
스무 명 정도 되는 연습생들이 함께 몸을 풀며 어색하게나마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연습실 이곳저곳에 카메라가 배치되어있었다.
“연습실 엄청 넓다.”
주상현이 감탄하며 말했다.
연습할 인원수가 많기 때문인지 연습실이 무척 넓었다. 전문 댄서들이나 콘서트 연습할 때 쓸 법한 공간이었다.
“그렇죠? 연습실 엄청 넓어요. 저희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식사는 하셨어요?”
아까 전 멤버들에게 반갑게 인사하던 연습생들이 다가와 주상현의 말에 대답하며 자연스럽게 말을 붙여왔다.
심히 낯가리는 멤버들이 많은 유제이 멤버들에 비해 이들은 무척 살가웠다.
“가방은 저기다 두시고 오시면 돼요. 연습은 다른 그룹들 전부 도착하면 시작한대요.”
“저 여러분들 경연하시는 거 엄청 감탄하면서 봤어요. 와 노래 정말 잘 부르시던데요?”
서도화는 짐을 내려놓으며 엄지를 척 추켜드는 이름 모를 연습생에게 꾸벅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저도 경연하시는 거 잘 봤어요.”
“어 정말요?”
“네. 중간에 두 분이서 페어댄스 추시는 거 멋있었어요.”
이들은 80번 그룹, 순위는 24위였다.
실력은 무난하게 좋았는데 창작안무를 가져와 무척 인상에 남았던 그룹이다.
“진짜요?”
서도화의 말에 상대는 화색이 되며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와아! 감사합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저는 이언준입니다.”
“서도화입니다.”
“도화 님! 그럼 저쪽 분은-”
이언준이 서도화의 뒤 아덴을 가리켰다.
“저요?”
아덴은 서도화를 힐끔 보곤 다가오더니 이언준이 내민 손을 잡았다.
“아덴입니다. 한국말 잘 몰라요. 잘 부탁드립니다.”
“……흐읍, 풉.”
뒤에서 다른 연습생들과 대화 중이던 주상현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도 사람들이 잔소리해대니 어지간히 싫었던 건지 결국 한국어를 잘 못 한다 하고 입을 다물려는 속셈인가보다.
“아하, 외국에서 오셨구나~. 아덴 씨 경연에서 진짜 엄청 멋졌어요. 아크로바틱 그렇게 높이 뛰는 거 처음 봤잖아요.”
“감사합니다. 엄청 말씀 잘하시네요.”
“제가요?”
스몰토크 잘하는 두 사람이 만났다.
서도화는 살짝 대화에서 빠져 몸을 풀며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한국말 못한다고 말했으면서 이언준과 상당히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
“저는 춤 추는 게 아직도 어려운데 엄청 능숙하게 잘 추시더라고요. 대단하다 생각했어요.”
“에이, 아덴 님 팀에는 상현 님 있잖아요? 그분이 엄청 잘 추시는데요 뭐~”
용사 시절에도 그랬듯 아덴은 시비만 안 걸면 참 사교적이고 기분 좋게 대화 잘하는 녀석이다.
아마 이 세계에 적응만 한다면 유제이 그룹에서 가장 인싸의 자질이 있는 녀석이 아닐까.
서도화가 이곳에서도 무난히 대화 잘 나누는 아덴을 신기하게 보고 있자 아덴은 무언의 신호로 받아들였는지 적당히 이언준과의 대화를 마무리하고 그에게 다가왔다.
“좋은 사람 같아.”
아덴이 말했다. 이언준이 꽤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의심이 많은 아덴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이언준의 성격이 진짜 좋은가보다.
“그래? 친해질 것 같아?”
“그건 잘 모르지.”
서도화는 아덴의 말에 대답하며 자연스레 그와 한야의 뒤에 숨은 케이를 끄집어내 스트레칭을 시켰다.
잠시 후 21위부터 25위까지의 그룹 전원이 연습실에 도착했다.
그리고 몇 분 뒤 이들에게 오프닝곡 안무를 가르칠 트레이너가 연습실로 들어왔다.
“다들 안녕~”
살갑게 인사를 건네는 남자. 어딘가 활달하면서도 무척 기가 쎄 보이는 남자는 눈에 힘을 잔뜩 준 채 연습생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어.”
그를 본 서도화가 작게 침음을 흘렸다.
아니, 데스티니를 나오고 나니 왜 이렇게 불편한 사람들이 많아졌을까?
어딜 가도 데스티니와 연관된 사람들 뿐이다.
아 왜 하필?
아니 이 방송에선 당연한 건가?
‘제길.’
그는 서도화가 무척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 또한 서도화를 너무나 잘 알고 있어 부릅뜬 눈 그대로 매섭게 서도화를 바라보았다.
대한민국 연예계는 이미 데스티니에게 점령당한 게 틀림없다.
“서도화 오랜만이네~”
구수한 사투리로 서도화에게 인사하는 남자. 그는 연습생들에게 오프닝 곡 안무를 알려줄 안무가, 밀리언 아이돌의 블라인드 평가단, 그리고 데스티니 소속의 댄스 트레이너로 서도화의 첫 댄스 스승.
바로 도로시였다.
“오랜만입니다. 선생님.”
“니는 쌤 오랜만에 봤는데 눈도 안 마주치나?”
눈을 어떻게 마주쳐요…….
서도화는 입술을 축이며 겨우 도로시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다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도화?”
아덴이 의아한 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불편한 사람이 있어도 늘 차분하던 서도화가 도로시의 앞에서는 대놓고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래도 카메라 앞이라고 입가에 미소는 띄우고 있었지만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에이, 니 목소리가 그게 뭐야? 좀 더 크게 해야지! 쑥스러워? 참 나 귀여운 것.”
도로시 또한 대충 분위기 좋게 농담 섞어가며 말했지만 아덴은 일찍 눈치챘다.
그도 서도화에게 상당히 쌓인 게 많은 모양이었다.
서도화는 고개를 저었다.
진짜로 너무너무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에게는 죄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서도화는 도로시에게 죄송할 수밖에 없다.
무단결석을 사유로 해고를 당한 그 날부터 도로시에게 그는 죄인이었다.
불과 몇 달, 아니 5년 전까지만 해도 이 두 사람은 이런 사이가 아니었다.
* * *
서도화가 데스티니 연습생이었던 시절만 해도 도로시와 그는 무척 오붓하게 사이가 좋은 스승과 제자였다.
도로시는 재능있고 열정 있는 이를 좋아했고 서도화는 그에 딱 부합하는 연습생이었다.
그래서 참 여러모로 많이 도와줬었다.
월말평가라고 따로 개인적인 레슨도 해주고 회사 내에 연습생이 투입될만한 일이 있을 때 서도화를 추천해주는 식으로.
참고로 강 실장과 더불어 서도화를 데뷔조 내정자로 가장 강하게 밀어붙인 사람이 다름 아닌 도로시였다.
착하고 성실하고 재능까지 많은 제자가 가장 데뷔하기 좋을 나이에 최고의 푸시를 받아 정상에 서길 바랐다.
그런데 그걸…….
‘제 발로 걷어차 버려?’
서도화가 갑자기 깜깜무소식이 되었을 때 도로시는 과장 하나 안 보태고 백 번은 넘게 연락했다.
그걸 죄다 씹고는 한 달 뒤에 무턱대고 와서는 다시 받아달라 했단다.
그렇게 안 봤는데 서도화에게 진심으로 실망했던 그였다.
서도화가 그렇게 해고당하는 바람에 그를 강하게 밀어붙였던 강 실장과 도로시가 한동안 고개를 못 들고 다니기까지 했다.
‘제길, 왜 하필.’
안 그래도 미안해서 어떻게 연락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물론 억울하긴 하지만 그가 얼마나 자신을 믿고 있었는지 서도화는 너무나 잘 알았다.
그래서 그와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도로시의 실망한 눈빛을 보기가 힘들었다.
“경연하는 거 잘 봤다. 실력 많이 늘었더라?”
“감사합니다.”
“그거 다 내 덕분인 거 알지?”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아덴이 미세하게 인상을 구겼다.
서도화가 불편해 보였다.
‘막아서야 하나?’
아덴은 고민하다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서도화가 찍소리도 못하고 비아냥을 듣고 있는 게 짜증 나긴 하지만 해할 것 같진 않았다.
이 세계는 묘하게 진짜 위협과 신경 쓸 필요 없는 비아냥을 구분하기 어려워서 난감하다.
도로시는 자신과 눈도 잘 못 마주치는 서도화를 보다 한숨을 푹 쉬곤 거울 앞으로 향했다.
“니는 나중에 나랑 이야기 좀 하고. 일단 연습 시작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