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화
조용한 연습실 내 화려한 비트의 오프닝곡 가 흘러나왔다.
연습생들은 각자의 멤버들과 모여 바닥에 앉은 채 흘러나오는 곡과 커다란 모니터 속 안무에 집중했다.
눈부신 조명 아래
이번에는 혼자가 아닌 나
네 마음을 내게 줘
Feel my heart
서도화가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야…….’
오프닝곡의 가사가 매우 오그라들었다.
그러나 가사가 유치뽕짝한 건 팝넷 경연 프로그램의 유구한 전통이고 뭐, 음, 전 시즌에 비하면 노래가 나쁘지 않았다.
가사의 오그라듦이 그럭저럭 묻힐 만큼 곡이 세련되고 중독성 있었다. 또한 안무의 퀄리티도 좋았다.
진심이 요동쳐
완벽한 발 디딤을 위해
포기하지 않는 flapping
하긴 이미 완성된 그룹을 가지고 하는 공연이니만큼 어느 정도 참가자들의 실력이 볼만하다는 걸 보여줘야 하니까.
딱 이 정도 난이도가 적당히 따라 하기 쉽고 또 듣고 보기 좋을 것이다.
걱정으로 굳어있던 주상현의 표정도 서서히 풀려갔다.
그랬던 곡이 이상해지는 건 후렴구부터였다.
Click on the heart!
Click on the heart!
있는 힘껏 널 만나러 갈게
Click on the heart!
“아.”
서도화의 입에서 깨달음의 탄성이 나왔다.
갑자기 가사와 안무가 급격히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보기 좋은 안무, 높은 난이도, 세련된 곡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갑자기 중독성과 오그라드는 가사만 남았다.
여기저기서 애매한 반응들이 작은 목소리로 튀어나왔다. 연습생들이 후렴구의 가사에 말문을 잃었다. 주상현은 오늘도 시무룩해졌다.
Click on the heart!
Click on the heart!
목표를 향해 달려
“…….”
서도화가 갑자기 생수를 들이켰다. 자꾸 목이 탔다.
아무리 그래도 하트를 클릭하라니.
‘가사 너무한데?’
잘 나가다가 왜 이따구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서도화의 표정만큼은 평온했다.
들어야 한다. 차마 듣기 힘든 가사였지만 그래도 듣고 열심히 연습해야 한다.
어쨌든 이 미묘한 곡은 결국엔 히트하며 밀리언 아이돌의 대표곡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니까.
그렇게 설명하지 못할 복잡한 마음으로 영상을 보고 있는데 이번엔 갑자기 댄스 브레이크 부분부터 다시 안무 난이도가 수직상승 한다.
끝까지 별 반응 없던 한야의 눈썹이 미미하게 올라갔고 서도화의 곁에서 말없이 안무를 확인하던 아덴이 슬쩍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덴은 말은 없었지만 서도화는 어깨에 올라간 손이 대충 무슨 뜻인지는 알 것 같다.
하나도 모르겠으니 도와달라는 의미였다.
‘가관이네.’
서도화는 마왕을 바라보았다.
잘생긴 와중에도 맹해 보이는 게 저쪽도 노래, 안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인 듯 보였다.
그러자 서도화는 다른 의미로 목이 타기 시작했다.
‘이 정도 난이도의 안무도 스스로 뜨지 못하는 연습생이라…….’
“음.”
서도화가 불안한 신음을 흘렸다.
도로시에게 미친 듯이 지적받고 그 모습이 방송을 타면 어떻게 될까.
실력이 쥐뿔도 없으면서 그룹빨, 멤버빨 잘 받아서 좋은 순위 받은 연습생이라고 욕먹는 모습이 빤히 상상되지 않는가.
“곡 어때? 안무도 그렇고 다들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난이도는 그렇게 높지 않잖아.”
노래가 끝난 후 아덴과 케이의 사정을 모르는 트레이너는 가볍게 말하며 연습생들을 각자의 자리에 배치했다.
“56번은 21위 바로 뒤에. 상현이가 앞쪽에 서고 뒤엔 도화랑 한야. 아덴 케이는 도화 뒤에.”
도로시는 당연히 멤버들의 실력이 중상 정도는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저 사람이 실망하면 상당히 무서워지는데.’
그의 모습에 조금 막막해진 서도화는 잠시 고민하다 이내 결심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그래도 지금까지 배운 게 있으니 댄스 브레이크 전까지는 무난히 잘 따라올 테니까.
기왕 이렇게 된 거 이미지. 이미지를 만들자- 라고.
* * *
연습이 시작되고 두 시간이 흘렀다.
“허억……. 어억…….”
힘들어 죽겠네. 서도화가 거칠어진 숨을 그대로 내뱉으며 땀으로 얼룩진 제 얼굴을 보았다.
‘이미지를 만들어?’
두 시간 전의 서도화는 그럴 여유가 어디서 나왔던 걸까?
심지어 그는 도로시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는데 이 기회에 만들지 못할 서사라는 걸 카메라 앞에서 만들어보겠다고 호기로운 결심을 했었다.
까놓고 말해서 서도화는 자신의 위치를 너무 잘 알았다.
그는 성장캐가 아니다. 굳이 캐릭터를 분류하자면 타고난 재능을 가진 천재.
다른 건 몰라도 실력으로 두들겨 맞을 일은 없는 만능 연습생.
재수가 없을지언정 참 좋은 이미지지만 경연 프로그램에서 분량 따기는 어지간히 어려운 캐릭터가 아닌가.
실력 면으로 부족한 것이 없으니 지적받을 것도 없어. 울거나 분할 일도 잘 없어.
어쩌다 카메라에 찍힌다고 해도 성장 서사 만들기도 힘들고 되레 견제나 당할 확률이 높다.
운 나쁘면 악편에 이용당할 수도 있고.
대체로 이런 캐릭터들이 좋은 이미지로 성장 서사를 쌓는 연습생들만큼 분량을 가져가는 방법엔 두 가지가 있다.
그냥 악편 당하지 않도록 입을 꽉 다물고 다른 연습생 배려 잘해가며 실력으로 압살하거나 노력형 천재가 되거나.
원래 서도화는 전자의 방법을 선택하려 했다.
조용히 연습 잘 따르고 주변 잘 도와가며 김에 이미지도 챙기고. 마침 옆에 아덴과 케이처럼 도와줄 연습생도 있으니 두 사람 서사도 챙겨주고 괜찮은 선택 아닌가?
…라고 생각했었다.
“어 자꾸 안 맞지? 딱, 따닥, 딱! 정박을 맞추라고 정박을. …케이야! 다시!”
“허억…헉…….”
“한지혁! 뭐 얼마나 했다고 앉아? 일어나 얼른. 너네 아직 못 쉬어.”
“아아…….”
도로시의 불호령에 한지혁이란 연습생은 거의 울상이 되어 일어났다.
쉬지도 못하고 춤만 춘 지 2시간째다.
도로시와 그렇게 많은 레슨을 해 놓고선 그의 트레이닝 방식을 홀라당 까먹고 있었다.
데스티니의 아이돌들이 왜 그렇게 환상적으로 군무를 잘하는지 아는가?
발소리, 팔 각도가 정확히 맞아떨어질 때까지 휴식 시간 없는 연습생 생활을 보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팀은 안무가 어려운 것도 있는데 정말 동작이 안 맞았다.
아니 솔직히 50명이나 있는 인원이 정말 한 사람처럼 움직일 수 없긴 하다만 두 시간 내내 연습하고도 발 구르는 안무에 끊임없이 실수가 나오는 건 문제가 있다고 본다.
춤에 익숙지 않은 케이와 아덴은 틀림없이 틀리고 다른 연습생이라고 별반 다를 건 없었다.
연습생 모두가 얼굴이 시뻘게진 채 연습을 이어가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은 휘몰아치는 연습을 따라가기조차 벅찼다.
이미지고 뭐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다시! 아니 잠깐만, 왜 틀리는 애들은 계속 틀려? 한지혁, 아덴, 케이, 서상준, 오이래. 너희만 다시 해보자.”
틀리는 놈들 잡아내서 다시, 다 같이 다시, 또 틀리는 놈들 잡아내고 다시, 다 같이 한 번 더.
“아니 이게 어려워? 데뷔하겠다고 나온 애들이 오프닝 공연 연습부터 못 하면 어떻게 해? 그것도 순위도 잘 받은 애들이. 이래서 더 위로 올라갈 수 있겠어?”
끊임없이 지적당하는 연습생들의 고개가 푹 숙어졌다.
그들의 성장 서사가 슬그머니 만들어지고 있었다.
결국 세 시간 째, 연습생 중 일부가 제 땀에 발이 미끄러져 넘어질 때쯤 되자 슬슬 포기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서, 선생님…!”
도로시가 다시!를 외치기 전 연습생 중 누군가 다급히 손을 들었다.
“왜.”
“물만… 물만 좀 마시고 오면 안 될까요?”
한두 명씩 총대를 멘 연습생의 말에 살을 덧붙이며 은근슬쩍 조금만 쉬면 좋겠다는 뉘앙스의 말들이 나오고 있었다.
도로시는 그 말에 인상을 찌푸렸지만 차마 안 된다는 말은 꺼낼 수 없었다.
안무가 보통 어려운 것도 아니거니와 제 땀에 넘어져서도 일어나 다시 하는 모습들이 누가 봐도 극한의 모습이라 어지간히 욕먹기 싫으면 거절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었다.
“그럼 쉴 사람들은 쉬어.”
도로시가 마지못해 연습생들의 제안을 오케이 했다.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대부분의 연습생들이 신음하며 바닥에 드러누웠다.
도로시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들 나름 죽도록 열심히 버틴 상황이었다.
“흐억…어…와…….”
곧 기절할 것처럼 숨을 들이쉬는 연습생들을 보고도 도로시의 미간은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악으로 깡으로 다섯 시간이고 여섯 시간이고 버티던 데스티니 연습생들을 보다 이곳에 오니 연습생들의 부실한 체력이 영 성에 안 찼다.
그래서 도로시는 무심결에 서도화를 쳐다보았다. 악으로 깡으로 버티던 대표적인 연습생이 바로 서도화였다.
참 미운 정이 뭐라고 그렇게 실망하고서도 서도화에게 가장 먼저 눈이 간다.
서도화를 본 그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렸다.
“허억…허억…….”
서도화가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땀으로 샤워를 하고선 꿋꿋이 서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한 달이나 쉬고도 아직 몸이 하드한 연습을 기억하는 건지, 아니면 자신에게 미안해서 버티는 건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땀에 적셔진 모습은 나태해지고 해이해진 모습이 아닌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서도화였다. 그는 쉬라는 자신의 말이 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가만 보니 두 명 더, 서도화와 같이 서 있는 연습생이 있다.
같은 데스티니 연습생 출신이던 한야, 그리고 시종일관 지적받았던 아덴.
특히 아덴 그는 힘든 기색도 없이 숨 하나 거칠어지지 않고 도로시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쪽은 악으로 깡으로 버틴다기보단 기가 막히게 체력이 좋은 타입 같았다.
‘살아남은 건 셋인가.’
생각하는 순간 뒤에서 주저앉아 있던 연습생 하나가 더 일어났다.
케이였다.
* * *
서도화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상체를 지탱하듯 허리에 손을 얹었다.
힘들어 죽겠는데 버틸 만했다.
원래 연습하던 버릇이 남아 있어서 그런 것 같지는 않고 그냥 힘듦에 익숙해진 모양이다.
저 뒤에 땀 한 방울 안 흘리고 거뜬히 서 있는 아덴을 봐라.
저런 괴물 같은 자식이랑 동료랍시고 같이 다니다 보면 어지간한 힘듦은 깡으로 버틸 수 있다.
거기다 서도화는 도로시의 성격을 몹시 잘 알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지만 지금의 자신이 그에게 잘못한 게 있는 상황이라는 건 안다.
자신을 진심으로 아껴줬던 사람인 만큼 틀어진 관계를 회복하려면 열심히 하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그래, 전략을 바꾸자.
‘난 노력형 천재야.’
스스로 한 어이없는 생각에 픽 웃곤 당장 드러눕고 싶은 걸 참고 서 있으니 뒤에서 죽어가는 앓는 소리가 들려온다.
“크으어어억!!!”
아이돌이 내기엔 상당히 악에 받친 소리라 그가 뒤돌아보자 마왕 케이가 부들거리는 다리로 굳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도로시가 아닌 아덴과 서도화를 보고 있었다.
서도화가 그를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저놈은 연습을 더 하고 싶은 게 아니고 그냥 용사보다 오래 서 있고 싶은 거였다.
그러자 드러누워서 숨을 몰아쉬던 주상현도 눈치껏 이를 악물고 일어났다.
저 녀석도 참 정신력이 대단하다. 힘들 텐데 멤버 모두가 일어나있다고 아득바득 일어나는 걸 보니.
주상현도 제2세계에 있었다면 영웅으로 이름 좀 날렸을 거다.
‘일단 우리 멤버들은 다 살았고.’
서도화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어나 있는 사람들이 있자 물만 마시고 후다닥 돌아온 이들이 몇몇 있었다.
이를 본 도로시가 조금은 누그러진 말투로 말했다.
“그럼 애들 쉬는 동안 특별 개인 레슨이나 해볼까?”
살아남은 자들끼리 쉴 틈 없이 연습이 속행되었다. 그 모든 모습들이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기고 있었다.